48 2023 WINTER48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MEGABOX

우정과 사랑으로 되돌아오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너와 나〉

언제인가, 내가 잠을 깬 이 순간은.
언제인가, 하루의 처음 무심코 펼쳐든 책 속의 이야기가
그대로 나 자신의 것으로 되어버리는 그런 때는.
이미 나 자신이거나 앞으로의 나 자신인 그것들.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배수아

상실 이전과 상실 이후

올해 같은 날 개봉한 두 편의 영화가 있다. 하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다른 하나는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이다. 두 영화는 물론 서로 다른 영화다.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유사하다. 두 영화의 배경은 실제 사건이 일어난 시공간(태평양 전쟁 중인 일본/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하루 전날의 안산)이며 주인공은 어린아이도, 어른도 아닌 그사이의 존재이다. 그들은 소중한 존재를 이미 잃었거나 잃기 직전의 상태이다. 상실은 불길한 꿈의 형태로 반복되거나 예지된다. 인물들은 울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잃어버린 존재에 대한 그리움으로 혹은 상실의 예감에 대한 대처로 일종의 모험을 시작한다. 그들은 모험에서 동물(새와 개)을 마주치고, 화면에는 빛과 바람이 어린다. 그리고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세계는 혼란스럽고 우리는 불완전하다. 그러나 (또는) 그러므로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서로 사랑하라고.

균형 잃은 세계에서 내 안의 악의와 마주하기

미야자키 하야오의 (번복된) 은퇴작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감독의 자전적인 요소들이 많이 녹아 있다고들 한다. 군수업자인 아버지 영향으로 전쟁 중에도 유복한 생활을 한 유년기, 스튜디오 지브리의 동료들, 은퇴할 때까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것, 노년을 바라보는 감독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작업에 대한 은유……. 그도 그럴 것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전의 미야자키 하야오 작업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간단하게 요약해보자면 이 영화는 “어머니를 잃은 11살 소년 마히토가 외가이자 아버지의 공장이 있는 시골 마을에서 왜가리 남자를 만나고, 사라진 새어머니를 찾기 위해 탑의 세계에 들어가 모험을 겪고 탑의 바깥으로 돌아온 이야기”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 속에서 서사는 명확한 인과 관계를 가지고 흘러가지 않는다. 영화 속 유동하는 이미지들은 유려하게 일렁이지만, 이야기는 무언가를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거기 놓여 있는 것에 가깝다. 파편적인 기억들이 점점이 뒤섞인 채로 명멸하듯이.
또한 용기 있고 타인을 위하던 전작들의 주인공과 달리, 마히토는 마냥 순수하고 용기 있는 인물이 아니다. 마히토는 때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비겁하게도 행동하며, 악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어머니가 있는 병원이 불타고, 거리가 아수라장이 된 마당에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시간을 허비하여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하고, 피난을 간 시골 마을에서는 말수 적은 소년이 된다. 죽은 어머니를 꼭 닮은 새어머니(죽은 어머니의 동생) 나츠코에게 예의를 지키되 절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새어머니와 아버지를 몰래 훔쳐본다. 또래와 주먹다짐을 벌인 뒤엔 돌로 자해해 큰 상처를 낸다. 이 상처를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 아버지가 오해하게 만든다. 이 상처로 인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머물던 마히토는 어머니가 불타는 꿈을 꾸고는 눈물을 흘리며 깨어난다. 그리고 어머니가 선물했던 책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는 시골 저택의 숲에 있는 탑으로 향한다. 마히토를 유인 혹은 위협하는 왜가리를 따라 탑의 세계로, 이세계(異世界)로 들어간다.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혹은 사라진 새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또는 새어머니가 낳을 아기를 구하기 위해.
탑의 세계는 이상한 곳이다. 마히토의 죽은 어머니는 마히토 또래의 소녀 히미가 되어 마히토를 돕고, 시골 저택 할머니는 젊은 여성 키리코가 되어 마히토를 돕는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심스럽기만 했던 왜가리 남자는 ‘상처를 준 사람이 상처를 고쳐 주어야만 회복된다’는 탑의 규칙에 따라 마히토와 협력 관계가 된다. 그들은 와라와라(인간 탄생 이전의 존재)를 먹으려는 펠리컨을 물리치지만, 펠리컨이 영원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며 와라와라를 잡아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드러나며 탑의 세계가 뭔가 고장 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맹목적으로 대왕 앵무를 따르는 (그래서 군대를 연상케하는) 식인 앵무들은 섬뜩하다. 금기를 어겨 가며 산실(産室)에 들어서지만 새어머니 나츠코는 마히토에게 “네가 싫다”고 적의를 드러낸다.

이 탑의 세계를 관장하는 신적인 존재는 바로 큰할아버지다. 그는 순수한 조각들을 찾고 이 조각들을 쌓아 아름다운 세계, 평형을 이룬 세계를 만들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그가 쌓은 흰 조각들은 위태롭게, 간신히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큰할아버지는 마히토가 후계자가 되어 탑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기를 원한다. 이때 마히토는 지금까지는 말하지 않았던, 감추었던 자신의 흉터에 대해 말한다. 자신은 이미 악의를 가지고 있기에 이 조각을 쌓을 수 없다고. 이때 엿듣고 있던 사랑앵무 왕이 조각을 쌓는 일 따위로 세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거냐고, 격분하며 끼어들어 조각들을 부숴 버린다. 탑의 세계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탑을 빠져나오기 위해 마히토와 조력자들은 각자의 타임라인과 연결된 문 앞에 선다. 마히토는 히미가 그 문을 열고 나가면 자신을 낳고 불길 속에서 죽게 될 미래를 알기에 잠시 주저하지만, 히미는 마히토를 낳고 그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자기 앞의 문을 열고 탑을 나선다. 마히토와 일행도 마치 알을 깨고 나오듯, 사랑앵무 떼와 함께 쏟아져 나온다. 현실로 돌아온 마히토는 부서진 조각 하나를 쥐고 다짐한다. 친구를 많이 만들면서 살겠다고. 처음엔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서로를 구하며 친구가 된 왜가리 남자와 같은 친구를.

사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앞서 말했듯 서사가 촘촘히 짜여 있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한평생의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찍어야 했던 마침표 같은 이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자서전이자 다음 세대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미 한 시절을 지나온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자신의 비겁함과 실패를 고백하며 상처를 드러내고 인정하는 것 같다(마히토가 탑의 세계에 진입해서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덮어 두고 감춰 왔던 흉터가 드러난 것처럼). 순수한 무언가를 만들고자 했지만,
그 안에는 부조리함과 불평등이, 누군가의 희생이, 때때로 악의와 공격 또는 자기혐오가 있었다고. 영화가 제목을 가져온, 요시노 겐자부로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 사람이 마음에 가장 깊은 상처를 입고, 눈에서 가장 쓰라린 눈물을 짜낼 때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절실하게 깨달을 때란다. 결과를 떠나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을 때 내 탓이다, 하는 가책이 느껴진다면 이보다 더 큰 아픔은 없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변명을 만들어 내 실수를 덮어 보려고 한단다. 하지만 코페르, 이 세상에서 오직 사람만이 자신이 잘못한 일은 인정하고 그 아픔을 받아들일 수 있단다.”1

1
요시노 겐자부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양철북(2012), p.221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후회를 고백하면서, 자신이 해온 작업을 우리에게 건넨다. 일견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평생을 걸려 찾은 가장 순수한 블록들을.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지금 여기와는 다른 세계로 떠나는 모험을 선사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상상의 세계에 머무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세계의 모험은 기억 한 조각으로 쥐고, 우리는 다시 지금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 누군가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너와 나〉 ©필름영

평범한 하루를 죽음 앞에 두고 바라보기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는 조현철 감독의 첫 장편 영화 〈너와 나〉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기 전날, 세미가 불길한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뒤에 밝혀지지만, (세미가 사랑하는) 하은이 죽는 꿈이다. 세미는 학교를 조퇴하고, 최근 발목을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하은을 찾아간다. 입원 중이기도 하고 형편도 여의찮은 하은을 자꾸만 졸라 함께 수학여행에 가자고 한다. 하은은 안 쓰는 캠코더를 팔아 여비를 마련해 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세미와 함께 병원을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하루를 보낸다.
세미는 하은이 너무 좋은데, 하은을 향한 자기감정의 깊이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라 불안한데, 하은은 자꾸만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아 서운하다. 최근 10년간 기른 개 제리를 떠나보냈으면서도 덤덤해 보이고, 수첩에 적힌 ‘훔바바’를 좋아하는 모양인데 누군지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고, 길에서 만난 개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함께 놀다가도 갑자기 사라져 자전거로 자신을 친 오빠와 웃으며 떠들고 있다. 캠코더를 사겠다는 ‘똘이 아범’이 나타났는데도 갑자기 중고거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 세미가 기대감에 들떠 선물한 키링을 아무 데나 흘리고 다닌다. 하은도 나름대로 불편하다. 세미는 왜 자꾸 다른 친구의 이름을 꺼내며 누구랑 더 친한지 따지고 드는지, 어렵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왜 갑자기 수학여행을 가자고 조르는지. 세미와 하은은 계속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한다. 결국 크게 말다툼한 이후 둘은 헤어지고, 하은이 연락 두절되면서 세미와 친구들은 하은을 찾아 나선다. 이 과정에서 하은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하은이 개를 떠나보내고 슬퍼한 것, 스토킹 때문에 불안해했다는 것, 스토커를 피하려다 사고가 났다는 것 등). 세미는 조금씩 하은의 마음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어두운 교실에서 세미와 하은이 재회한 순간, 운동장에, 낮에 만났던 개가 다시 나타난다. 세미는 낮에 지나치지 않고 찍어 두었던 전단 속 연락처를 찾아 개를 가족에게 돌려보낸다. 개를 잃어버린 줄 알고 마음 졸였던 여성의 이야기를 듣던 세미는 그제야 하은의 마음과 상실을 오롯이 마주하게 된다.
한낮에 꾼 불안한 꿈을 떠올리는 세미. 그리고서야 가능해지는 고백. 꿈에서 죽은 것이 너였다가, 나였다가, 모두였던 순간. 그래서 오늘은 너에게 꼭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고. 세미의 고백을 들은 하은은 나의 마음도 너와 같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세미와 하은은 죽음과 상실에 아주 가까이 다가선 뒤에 용기 내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세미는 긴 하루를 보낸 뒤 반려조인 앵무새 조이에게 말한다. 사랑해, 라는 말이 메아리치듯 보이스오버 된다. 화면은 앞선 세미의 꿈속 장면으로 전환된다. 풀밭에 뺨을 대고 죽은 듯 누워 있던 하은은 이제 세미가 되었다. ‘사랑해’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세미는 미소 짓는다.

누군가 〈너와 나〉에 대해 사전지식 없이 영화를 보았더라도, 결국은 세월호 참사 하루 전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안산이라는 공간, 수학여행 전날, 고등학생들, 거울에 비치는 환영 같은 뒷모습, 부재한 누군가가 직전까지 여기 있었다는 것을 환기하는 듯한 먹다 만 (갈변되지 않은) 사과,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테이블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물컵,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세미와 하은 뒤로 지나가는 근조 화환과 상복 입은 사람들과 같은 상징적인 장면들. 좀 더 직접적인 장면도 있다. 안산역이 비치는 장면, 제사를 지낸 듯 종이를 태우는 아랫집 사람, 세미와 함께 타던 버스에 홀로 올라탄 하은이 끝내 엉킨 이어폰 줄을 풀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 그때 흘러나오고 있는 라디오 뉴스 같은.
영화는 참사로 인해 세상을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 모두를 위로하려고 한다. 잃어버린 일상의 순간들과 소중함을 돌려주려고 한다. 짧게 여겨질 수 있는 하루를 영화 안에서만큼은 아주 길게 느껴지게 만든다. 허무와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다른 방식을 찾으려고 한다. 일상과 모험이 뒤섞이고, 꿈과 현실이, 삶과 죽음이 뒤섞인다. 그렇게 너와 나의 거리를 좁혀 본다. 모두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참사를 영화에 가져오지만, 많은 갈등을 그대로 두어(어쩌면 현실은 이에 더 가까울 것이다) 후회를 남기기보다 많은 걸 이뤄보려고 한다. 세미는 길을 떠돌던 개를 가족에게 되찾아 주고, 하은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하은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로 핀잔을 주고받으면서도 가족들과 희한하고 웃긴 방식으로 국수를 먹는다. 엄마는 세미 손에 난 상처가 흉 질까 봐 랩을 감아준다.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구조 작업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는 버스 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하은으로 영화를 끝내지 않는다. 세미는 엄마에게서 태몽 이야기를 듣는다. 죽음을 예고하는 꿈에서 시작해서 탄생을 예고하는 꿈으로 끝나는 하루. 세미가 용기 내 한 말, “사랑해”가 세미에게 되돌아와 그녀를 웃음 짓게 만든다.

우정과 사랑으로 되돌아오기

이제 와 (늦은 감이 있지만) 솔직히 털어놓자면, 여전히 두 영화에 풀리지 않는 의문과 복잡한 마음이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탑의 세계와 현실 세계는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는가? 몇 선택 받은 인물/동물들만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는 건가? 둘 중 한 곳을 선택해야만 하는 건가? 히미는 탑 속에서 1년 동안 (현실에서, 마히토의 어머니 히미가 어린 시절 1년 동안 실종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무엇을 했던 걸까? 나츠코는 왜 탑 안에서 아이를 낳으려고 한 걸까? 마히토와 큰할아버지가 아닌 히미가 자신의 조각을 찾고 그것들을 쌓아 탑의 세계를 재건하면 안 되는가? 물론 그게 영화가 의도한 바도 아니고, 그랬다면 다른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우리는 탑의 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살아가야 함을 알면서도, 나는 자꾸만 히미가 만들 세계를 보고 싶었다.
영화 〈너와 나〉는 위로가 될 수 있나. 자기기만이 아니라 위로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인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다 되어 간다. 진상규명은 아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화에서 세미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게 실제 비극이다. 그러나 영화 속 세미는 따뜻한 햇빛 속에서 잠든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미소 짓기도 한다. 그건 우리의 소망에 가깝다. 몇몇 장면들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반 아이들이 단체버스 차창 가득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잠들어 있는 모습이, 난시인 눈을 지치게 했던 시종일관 희뿌연 꿈결 같은 필터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상징으로 가득 찬 매 장면이, 그 상징들이 뻔하다고 느껴지는 점이. 그리고 조심스러운 듯한 영화의 전반적 태도와 달리 ‘똘이 아범(미성년자가 싫다는 데도 계속 쫓아온 성인. 사실 하은이 이 남자를 피하다가 다친 것인데…)’가 애매모호하고 유희적인 캐릭터로 소비된 것이.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영화들에 어렵게 꺼낸 진심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보며 자란 세대는 그를 통해 여기와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법을, 나와 다른 존재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그 세계는 아름답기만 한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미야자키 하야오는 고백하는 것 같다. 누군가가 자신의 결점이나 약점을 드러내는 즉시 공격받는 요즘, 그 과정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고. 비겁한 행동을 하고,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누군가를 방해하기도 했다고. 우리는 이 고백을, 솔직함을 외면하기 어렵다. 마치 영화 속 나츠코가 마히토에게 “네가 싫다”고 소리 질렀을 때 오히려 그제야 마히토가 나츠코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었듯이.

그리고 우리는 기억한다. 세월호 참사가 보도되는 뉴스를 보던 순간을.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음과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 느꼈던 막막함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또 한 번 참사를 겪어야 했다. 우리는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아니면 그렇기에 더욱더 상관있다는 듯, 모두의 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너와 나〉는 애쓴다. 이 영화는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나에겐 그랬다). 하지만 생각하게 했다. 세미는 불안해하고 헤매면서도 하은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이 영화는 세미처럼 주저하고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그래서 일견 과잉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위로하려고 한다. 모든 것이 빨리 잊히고… 잊지 못하는 사람에겐 “그만 좀 하라”고 하는 세계에서, 열일곱 번이나 “사랑해”라고 말하며 끝나는 영화도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우정과 사랑은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이 말해졌다. 그게 소중하다는 걸 우리가 모두 알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잃거나 잃게 될 것이고, 실수하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부끄러움은 그 자체로 용기가 될 수 있고, 어떤 과잉은 과하지 않을 수 있다.

글 정소영
현실에 지각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