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2023 WINTER48

나는솔로지옥에서:
연애 예능 중독자의 고백

중독의 이유

첫 연애의 실패를 깡그리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돌이켜보니 그 실패와 싸운 지 어언 15년이다. 〈올드보이〉(2003)의 이우진(유지태)이 오대수(최민식)를 가둔 기간과 동일하다. 이우진은 잠을 이루지 못할 때마다 오대수가 나오는 폐쇄회로TV를 틀어두고 잠을 청한다. 그는 사랑 불능 상태에 빠진다.

휴대폰에 〈나는 SOLO〉(ENA, SBS Plus)(이하 〈나는 솔로〉)를 비롯한 각종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띄워두고 잠이 든다. 이우진과 내가 닮았다. 둘 다 사랑 앞에 한낱 패배자에 불과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양한 연애 프로에 중독된다. 지난날, 돌이킬 수 없는 내 연애의 모든 파국을 잊기 위하여, 혹은 곱씹기 위하여.

가학적인 재미가 있다. 순정을 파괴하는 재미다. 출연자들이 이 사람 저 사람을 오간다. 여러 명을 동시에 좋아하는 상황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단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 최종 선택의 순간에 눈물이 흐른다. 일대일이라는 게임의 법칙에 굴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허락하지 않을 뿐 애초에 카사노바로 태어나지 않은 자가 있는가. 순정은 욕구를 억누르기 위한 대안이다. 진정한 이상은 폴리아모리가 아닐까.

〈나는 SOLO〉 ©ENA

모태솔로론

연애 예능 프로그램 〈나는 솔로〉의 기획 중 ‘모태솔로 특집’은 연애라는 개념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다. ‘모태솔로’라는 말에 아직 위화감이 드는 것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전 세대에는 필요치 않았던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직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지 않았어요”로 운을 떼거나, “결혼할 사람과만 연애하려고요”라고 자기 주관을 내세우는 등 개인화된 설명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지금은 ‘모태솔로’ 한마디가 모든 인생을 설명하는 양 군다. ‘아직 연애 경험이 없어? 어디 문제 있어?’ 바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려 한다.

왜 ‘모태솔로’라는 재빠른 규정이 필요한가. 그들을 예외 상태로 치부하기 위해서다. 연애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미성숙한 바깥의 존재가 있어야 〈솔로지옥〉(넷플릭스)이나 〈퍼펙트 매치〉(넷플릭스)에 나오는 연애 선수들과 대비되며 더욱 극렬한 재미를 창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태솔로는 과거 ‘아다’라는 속어의 경멸적인 쓰임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하다.

다양한 삶의 선택들이 획일화되므로, ‘모태솔로’라는 말이 멸칭으로 쓰이다시피 하는 곳에선 연애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어려워진다. 연애경험 없이 고시만 준비하다 ‘결정사(결혼정보회사)’에서 180번의 소개팅을 통해 결혼하는 사람, 앱으로 하룻밤 만남만을 즐기는 사람, 비자발적 독신주의자(incel, 인셀), 썸만 타는 사람, 오랜 짝사랑의 실패자, 스스로 연애 시장의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 뛰어들지 않았던 신중한 사람 등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치지 못하게 된다.

모태솔로 특집에서 이들을 하나의 무리로 퉁치기 위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연애에 대한 서투름이다. 연애를 안 해봤기 때문에 서투르고, 서투르기 때문에 결국 연애를 못 했다는 순환논리다. 그러나 소위 남녀관계에서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연애가 실제로 엄청난 성별 역할 수행 덩어리라는 것을 폭로한다. 유튜브에서 조회수 100만이 넘는 〈많은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하는 매력 없는 행동들〉, 〈남자들이 ‘뻑 가는’ 여자 카톡〉, 〈여자에게 고백받은 남자가 하는 생각〉같은 지식이나 기술을 그들은 습득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것을 습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성별의 경계와 그로 인한 위계를 미시적인 수준에서 납득하고 체화하는 것을 뜻한다.

양성애로 레벨 업!

성별의 경계 짓기는 초보적인 편 가르기 규칙이다. 이 경계는 아직 와해되거나 제대로 유희된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솔로〉에서 짜장면을 먹는 여자들끼리, 혹은 남자들끼리 한 번쯤 서로에게 눈이 맞을 수도 있는데 아직은 그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애 리얼리티에서 동성연애가 배제되는 이유는 동성간 연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동성연애가 이성연애와 섞일 경우 게임의 규칙이 좀 더 복잡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남의연애〉 ©디스플레이컴퍼니

한국의 경우 동성연애를 배제하지 않은 짝짓기 리얼리티 예능은 〈남의연애〉(wavve)나 〈좋아하면 울리는 짝!짝!짝!〉(wavve) 정도이다. 후자의 출연자 모집공고에는 ‘이성을 좋아하든 동성을 좋아하든 상관없이 누구나’라는 문구가 기재되어 있다. 다른 프로에서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당연한 듯이 배제하던 집합을 가시화한 문구다. 그러나 정작 방송된 내용을 보면 스킨십 등 보다 구체적인 감정 표현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남의연애〉는 동성연인의 가벼운 키스가 나오지만, 출연자를 남성에 한정했다는 점에서 어디까지나 ‘동성연애는 동성연애끼리’ 다루려는 단순화된 관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는 게임의 초보 단계를 벗어날 때도 되었다. 〈퍼펙트 매치〉는 출연자들이 즉석에서 커플을 맺고 누구의 궁합이 더 좋은지 대결하는 프로그램이다. 남자들에게 최고 인기녀로 등극한 프란체스카가 양성애자임을 밝힌 후 상대를 여러 번 바꾸다가 마침내 여자와 매칭되어 딥 키스를 나누는 순간은 게임 체인저로서 양성애자의 가능성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보여준다. 〈러브 아일랜드: 미국〉(itv, 넷플릭스)(이하 〈러브 아일랜드〉) 시즌1에서도 양성애자인 키라가 등장한다. 그 또한 중간에 매력적인 여성 참가자가 등장하자 남성이 아닌 여성 참가자에게 대시한다. 양성애자의 등판은 연애 예능의 판을 뒤흔드는 새로운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는다.

예외 상태는 예외 상태끼리 다뤄야지 섞이면 안 된다는 비현실적인 세계관은 〈돌싱글즈〉(mbn)와 같은 프로그램이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을 납득케 한다. 〈나는 솔로>의 ‘돌싱 특집’을 포함해 이혼 경험이 있는 사람들만 출연할 수 있다는 두 프로그램의 조건은 한국의 연애 예능이 영미권의 연애 예능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러브 아일랜드>와 〈블라인드 러브〉(넷플릭스) 등에서는 아이가 있거나 이혼을 했다는 것이 따로 구별되어야 할 사실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동등한 참가자로 전체에 섞인다.

〈돌싱글즈〉 ©MBN

인생이라는 판돈

그래도 〈돌싱글즈〉가 센세이셔널했던 것은 동거 과정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방송에 공개될 수 있는 수준으로 제한된 형식적인 동거다. 〈투 핫!〉(넷플릭스)이나 〈러브 아일랜드〉, 〈퍼펙트 매치〉, 〈블라인드 러브〉처럼 섹스 장면을 암시하는 수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방금 매칭된 커플이 한 공간을 일주일 동안 공유하는 모습은 다른 프로그램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진정성을 홍보할 수 있는 조건이 됐다. 연애 리얼리티에서의 진정성이라는 것은 참가자의 인생이 프로그램과 얼마나 지독하게 얽혀 돌아가는지를 잣대로 삼는다.

각 연애 예능마다 진정성을 표방하는 대표적 요소들이 프로그램의 포맷과 특징을 결정한다. 〈나는 솔로〉는 출연자가 직접 지원서를 내고 뽑힌, 결혼 목적이 뚜렷한 일반인이라는 것으로 진정성을 담보한다. 다른 연애 예능에서 보기 힘든 사전 면담 과정을 노출하며 꾸며진 리얼리티를 과시한다. 〈핑크 라이〉(디즈니플러스)는 참가자들이 각자의 비밀을 상대방에게 숨긴 후 데이트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비밀이 공개되는 순간 시청자는 비밀의 무게에 따라 그들의 진정성을 저울질한다. 비밀은 진정성의 조건이 아니라 프로그램 출연을 위한 대가로 치른 희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러브 아일랜드〉와 〈솔로지옥〉은 모두 자연 다큐멘터리를 찍는 듯한 카메라 배치를 도입한다. 출연자들은 대부분 인플루언서이거나 카메라에 익숙한 모델 출신이다. 그들이 카메라의 존재를 잊을 수 있도록, 현실의 블랙박스처럼 곳곳의 틈새에 렌즈와 소형 마이크가 배치된다. 이런 제작 방식은 〈나는 솔로〉와 큰 차이가 있다. 16기 상철과 영숙이 빌런으로 열연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따라다니는 카메라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가자들을 섬에 포위시켜놓고 카메라를 숨기는 프로그램들은 볼일 보는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곳이 소형 카메라 천지다. 화장실에 불법 카메라가 설치된 현실이 반전된 모양이다. 시청자로선 그들의 거의 모든 것을 본다는 전능함을 느낀다. 그중 진짜 감정이 없을 리 없다고 믿는다.

〈솔로지옥〉 ©NETFLIX
〈핑크 라이〉 ©CJ ENM

내가 보는 것은 쓰레기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참가자들이 내건 인생이라는 판돈은 충분히 무거우나 조롱을 곁들인 편집을 거치면 〈인간극장〉(KBS1)의 눈물보다 중독성 있는 냉소와 만난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사랑 불능 상태였던 걸까.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눈꺼풀 위에 휴대폰 액정 불빛을 새긴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중독은 우울증에서 유발된 것인지 모른다. 앤드루 솔로몬은 우울증에 관한, 의지할만한 에세이 『한낮의 우울』 첫 장을 이렇게 시작했었다.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울은 그 절망의 심리 기제다.” 그렇다면 지금 사랑을 위해 절망하는 과정에 있는 것일까. 천천히 끓는 물 속에 있는 것일까. 빠져나와야 한다. 황폐한 내 마음 그대로를 바라봐야 한다. 무섭다. 용기를 내야 한다.

글 김주은
카사노바로 태어나 불화 속에서 자랐다. 영화 〈토탈이클립스〉(1995)에서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는 시인 랭보의 대사가 심금을 울렸다. 앞으로도 그럴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