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일, 제26회 신작희곡페스티벌의 막이 올랐다. 졸업을 앞둔 본교 연극원 극작과 예술사 4학년들의 졸업 공연으로 꾸려진 페스티벌은 2주에 걸쳐 총 여덟 편의 공연을 선보였다. 극작과 학생들은 자신이 쓴 희곡을 직접 연출하여 낭독극으로 올렸고, 매 공연 객석은 새로운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참여자들은 본인의 작품 제작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품의 스태프로 임하며 함께 축제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어제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질문에 응답하던 작가가 다음 날 공연에서는 객석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은 이 행사를 진정 하나의 ‘페스티벌’로 인식하게 했다. 외부 극작가와 극작과 전문사 재학생으로 구성된 평가위원의 선정에 따라 하나의 작품만이 다음 학기 연극원 공연으로 제작되는 경쟁 구도임에도 서로 격려하며 축제를 만들고 있음이 느껴졌다. 혼자는 미약할지 몰라도 이들의 연이은 공연은 젊은 작가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1998년 극작과의 학기 말 희곡발표로 소박하게 시작했던 신작희곡페스티벌은 지난 20년간 ‘극작과 학생들을 이롭게 하는 방향’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학교 밖과의 소통’ 사이에서 진자운동 했다.1 초기의 페스티벌은 후자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2001년부터 오픈 공모방식으로 전환하여 외부 작가 작품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국립극단, 한국연출가협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등이 협업하는 방식으로 공연을 제작했다. 한편 연극 현장에서 희곡공모 제도가 늘어나고 작가들의 작품 제작 기회 또한 늘어났다는 판단 아래, 페스티벌은 2014년부터 재학생과 갓 졸업한 동문을 대상으로 하는 내부 공모로 다시 전환되었다. 이를 통해 당선작에 대한 공연 기회를 부여했고, 매년 두세 편의 공연이 제작되었다. 극작과 예술사 졸업 예정자들이 직접 낭독 공연을 꾸리는 현 시스템으로 방향 전환이 일어난 시점은 2021년 제24회 신작희곡페스티벌 이후이다. 이는 앞서 말했던 두 가지 방향성 중 가장 내부지향적인 선택이다. 이와 같은 개편을 거치게 된 이유와 취지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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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희곡페스티벌 연혁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글을 인용, 편집하였다.
박상현, 「신작희곡페스티벌, 또 한번의턴」,2021제24회
신작희곡페스티벌 프로그램북, 3p.
이는 연극원 및 극작과의 교육 방향과 맞물려 있다. 극작가가 무대를 겪어보고 극장이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중요한 경험이라고 극작과 고연옥 교수는 강조한다. 신작희곡페스티벌이 개편되기 전에는 극작과 학생들이 자신의 장막극을 발표할 기회가 충분치 않았다. 신작희곡페스티벌의 기존 방식은 공모 제도 당선이라는 장벽을 넘어야 공연화가 가능했다. 수업 외 시간을 활용하여 자발적으로 공연을 제작하도록 지원하는 ‘야합플레이’, ‘인큐베이터’와 같은 프로그램 또한 존재해 왔지만, 적은 제작비와 제작 크루 모집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극작과 학생들의 적극적인 도전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극작과 졸업 공연 역시 작품을 연출과에 의뢰하는 방식이다 보니 매년 소수의 공연만이 제작될 수 있었고, 극작과 내부에서 직접 연출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진 못했다고 한다.
희곡이란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의미와 매력이 있지만, 언젠가 무대 위에 펼쳐지길 기다리는 운명을 지녔다. 극작과 내부에서 공연 제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극작과 학생들이 희곡을 쓰는 목표 의식이 희미해지고 학생들이 극장과 멀어지게 된 건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왔다. 극작과 학생들 사이에서도 무대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2021년도 극작과 예술사 교과과정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극작스튜디오 수업이 전공 필수로 개설되었고, 졸업을 앞둔 극작과 학생들은 이 수업을 통해 자신의 장막 희곡을 낭독극으로 연출하게 되었다. 수업과 연계된 신작희곡페스티벌에서 최대 8편의 공연을 꾸리되, 예술사 졸업생으로 8편이 모이지 않을 경우, 극작과 전문사가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두었다. 작년에는 전문사 2인, 올해는 1인이 신작희곡페스티벌에 함께했다.
극작과 학생들이 직접 연출까지 도맡는 축제는 2019년도에 개설된 ‘창작콜라보레이션’ 수업을 통해 그 가능성을 예비한 바 있다. 연극원 예술사 과정에 개설된 창작콜라보레이션은 연출과와 극작과의 협업 수업으로 작가와 연출의 매칭을 통해 단막극을 제작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다. 극작가는 자신의 희곡이 공연화 될 기회를 얻고, 연출가는 동료 작가의 희곡을 만나 소통하는 기회를 얻음으로써 함께 성장하고 교류하는 장을 만들고자 함이다. 실습수업의 도입으로 인해 극작과 내부에는 작품의 무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직접 연출을 해볼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고 한다.
개편된 신작희곡페스티벌의 가장 큰 의의는 작가 자신의 개성적인 세계를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펼쳐 보일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고연옥 교수는, 학생들이 추구하는 다양한 양식과 동시대성이 무대 위에서 어떠한 생명력을 가지고 펼쳐질지 경험함으로써 더 단단하고 자유로운 글쓰기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그는 작가가 직접 연출을 도맡으면서 신선한 매력을 지닌 공연들이 탄생했다고 평가했다. 희곡은 그 자체로 완결된 문학이면서 동시에 공연화를 염두에 둔 글쓰기라는 점에서, 작가의 상상이 형상화되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는 일은 이후의 창작 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페스티벌 준비는 여름방학 때부터 바쁘게 진행되었다. 페스티벌의 주체들은 극작과 ‘희곡쓰기’ 수업을 통해 탄생한 희곡을 수정 및 합평하는 과정을 거치고, 공연 프로덕션을 꾸렸다. 극작과 1~3학년은 극작과 ‘공연실습’ 수업의 일환으로 공연 스태프 역할을 도맡아 프로덕션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활동한다. 한편 작가들은 ‘극작스튜디오’ 수업에서 마련한 조명, 연출 워크숍을 통해 연출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쌓고, 약 한 달간의 연습이 지난 11월 초, 극장에서 관객을 만났다.
페스티벌의 당사자들은 작연출의 경험이 부담스럽고 막막한 점도 있었지만, 이번 경험이 유의미했다고 입을 모았다. 〈코코〉를 쓰고 연출한 장지영은 제작 과정을 통해 프로덕션 인원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프로덕션 인원 각자에게 어떤 역할을 어느 정도 기대하는지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요구하고자 노력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그들에게 완전히 일을 맡기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공연 제작이라는 큰 책임 앞에 모든 일을 혼자 도맡으려는 경향이 생길 수도 있을 터인데, 그는 다른 사람을 믿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무대에 본인의 작품이 구현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작가의 세계가 객석에 가닿았다는 피드백을 듣는 경험을 통해 미술과 음악, 연출에 관심이 생겨 더욱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그이다.
혼자 글을 쓰는 시간이 익숙한 작가들에게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공동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공연 제작은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시간이시여 이곳은 세상의 끝입니다〉의 작가 채수본은
연출을 하면서 배우의 언어, 작가의 언어, 연출의 언어가 다 다르다는
사실을 느꼈다. 배우들 앞에서 작가의 언어로 얘기했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고, 다른 사람에게 연출을 맡겼을 때보다 작품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겸허히 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건널목
교차로〉의 조승혜 작가는 연습에 들어가기 전, 총 3회에 걸친
워크숍을 마련했다.
그의 작품이 퀴어 서사인 만큼 관련 서적을
함께 살펴보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팀 규칙을 만들어
안전한 창작 환경을 조성하고자 한 점 또한 눈에 띄었다. “‘쓰기’의
시간을 지나서 ‘말하기’와 ‘듣기’”2의
시간으로 넘어간 작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구성원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고, 이는 연출의 역할에 도전함으로써 경험하게 된
영역이었다.
2
이연주, 「새로운 세계의 출현을 반갑게 기다립니다.」, 2021 제24회
신작희곡페스티벌 프로그램북, 5p.
이번 26회 신작희곡페스티벌은 공연마다 각기 다른 소재와 형식, 매력과 상상력을 보여주며 한국연극의 미래를 엿볼 수 있게 했다. 젊은 작가들이 펼쳐 보이는 세계는 이번 페스티벌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21년도 신작희곡페스티벌을 통해 극작과 졸업 공연으로 무대화되었던 최현비의 〈이리의 땅〉은 올해 10월 CKL 스테이지에서 재연했으며, 22년도 극작과 졸업 공연 선정작이었던 조제인의 〈사랑스런 신을 위한 DIY 안내서〉는 제31회 젊은연극제에 참가한 바 있다. 이들은 학교의 울타리를 떠난 후에도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구현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이처럼 신작희곡페스티벌을 통해 주체적으로 공연을 제작한 경험은 많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작업을 이어갈 힘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남은 과제도 존재한다. 그동안 신작희곡페스티벌은 단 한 번도 연극원의 정식 공연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학내 공연 참여자들의 출석 인정 문제, 학내 연습실 부족, 티켓 자체 제작, 기획자의 부재 등 실무적인 어려움이 다수 존재한다. 또한 진로를 고민하는 중요한 시기에 공연을 제작하는 일은 부담이므로 페스티벌 참여를 전공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바꾸자는 의견, 극작과 부전공생에게도 제작 기회를 부여하자는 의견 등 신작희곡페스티벌은 아직 과도기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해 가고 있는 듯하다.
연극은 장르적 특성상, 많은 인력뿐 아니라 연습실, 극장, 제작비 등의 물리적인 제작 여건이 필요하다. 그간 극작과에서 학내 공연 제작 시스템을 활용하기 어려웠고,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고독한 시간을 겪은 작가들은 또 한 번의 기나긴 기다림을 겪어내야 했다. 작가들이 소수의 공모 제도 혹은 연출가의 선택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이유이다. 연출과 학생들이 주도하는 연극원 스튜디오 공연에서 극작과 학생의 희곡이 활용되는 비율은 높지 않다. 학내에서 공연을 경험해 보도록 제반 시스템을 마련해주는 일은, 작가들이 앞으로의 연극계에서의 경험을 더 용감하게 해나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것이다. 현실적인 제약 및 당사자들의 입장차는 쉽게 해소되기 어렵겠지만, 작가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펼칠 수 있는 방향으로 페스티벌이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작가들은 이미 자신의 책상 앞을 떠났다. 다양한 프로덕션 인원과 협업하고 관객을 만난 경험이 학교를 떠나는 이들 안에서 오래도록 빛나길 희망한다.
참고자료
1
2021 제24회 신작희곡페스티벌 프로그램북
2
2023 제26회 신작희곡페스티벌 프로그램북
글 황지성
연극원 소속. 올해는 춤과 함께 했다. 글을 쓰는 학과이나 엉덩이가
매우 가볍다는 불운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