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와 음악을 합친다면? 입으로 따라 부를 수 없는 음악. 소란스러운 음악. 누군가 무엇을 듣느냐 물었을 때 들려준다면 ‘이게.. 뭐야..?’ 하는 답변이 돌아올 것 같다. 한 디제이는 레슨 선생님께 “힘든 길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말을 들었다. 전자음악은 매니악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만 듣는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듣는 데에 열중한다. 온몸으로 듣는다. 전자음악을 듣는 방식은 다른 음악과 조금 다르다. 보통은 어두운 곳에서, 때때로 알코올과 함께, 대부분 춤을 추며 듣는다. 그리고 특별한 순간을 함께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점은, 디제잉 공연 현장에서 여러 경계가 모호해 보인다는 것이다. 전자음악 공연은 음악을 들은 것인지, 퍼포먼스를 본 것인지, 소리를 감각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분명 음악을 들은 것은 맞는데 눈앞의 음악가는 퍼포먼스에 가까운 행태를 보인다. 관객은 때때로 소리를 지르고 몸을 움직인다. 이는 공연의 일부분이 된다. 커다란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온몸을 울리게 한다. 심장이 둥둥 뛴다. 청각뿐 아니라 촉각을 포함한 전신의 입체적인 감각으로 느끼는 것에 더 가깝다. 다양한 감각을 활용하는 경험인 것이다. 공연장에서 나오면 귀에서 들리는 이명 소리와 소리의 진동이 남긴 잔상이 몸에 감돈다. 경계 없고 종합적인 경험이다.
여러 명의 디제이가 음악을 트는 공연이라면 1시간에서 1시간 반 단위로 타임테이블이 짜인다. 다음 순서의 음악가는 앞 순서의 음악가가 튼 음악의 bpm에 맞추어 바톤을 넘겨받는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모양새가 좋다. 자신의 순서가 오기 전까지 음악가는 관객이었다가, 음악을 트는 순간 퍼포머-창작가-음악가 그사이의 존재가 되고, 셋리스트를 모두 틀고 난 후에는 다시 관객이 된다. 음악이 나오는 동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섞이고 흩어진다. 각자 다른 춤을 추는데 모두가 춤을 춘다는 공통점이 있다. 공연장 내부는 항상 어둡기 때문에, 외부의 밝은 빛 아래 있을 때와 달리 모든 경계선이 흐려진다. 외부와 나, 나와 타인, 공간과 음악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비일상적이고 통제불능한 순간이다.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전자음악의 역사는 다른 장르에 비해 길지 않다. 전기의 소리와 음악이 합쳐진 ‘전자음악’의 시초는 1948년 프랑스의 피에르 쉐페르(Pierre Schaeffer)가 작업한 〈철도 에튀드〉에서 찾을 수 있다. 〈철도 에튀드〉는 기차에서 나는 여러 기계음과 사람의 목소리, 자연음 등을 테이프로 녹음하여 재가공한 후 조합한 최초의 전자음악이다. 이후 1951년 독일에서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을 필두로 전자음악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이탈리아와 미국 등 타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본다면 전자음악의 역사는 70년 정도 된 것이다. 그러나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큰 폭으로 성장했다. 전자음악 안에서 세부 장르가 파생해 테크노, 엠비언트, 하우스, 드럼 앤드 베이스와 같은 이름들이 등장했다. 각 세부 장르를 정의하다보면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물론 필자의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전자음악에 대한 결론을 ‘모호한 경계’로 내려본다.
아마도 전기를 처음 인간이 활용하기 시작했을 때, 음악에 쓰일 줄은, 사람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처럼 세상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며, 이것은 때때로 위안을 주기도 한다. 예상치도 못한 사건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 즐거움은 해방감이 될 때도 있다. 새로움이자 자극이기도 하다.
모호한 음악을 하는 여성 음악가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글항아리에서 9월에 출간된 책 『여성x전기x음악』에는 여섯 명의 여성 전자 음악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음악가이자 동시에 관객이다. 공연을 하기도, 관람하기도 한다. 음악을 틀면서도 감각한다. 그리고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공통점은 전자음악을 한다는 것뿐이다. ‘여성’과 ‘전기’와 ‘음악’ 사이를 채우는 기호는 곱하기이지만, 다양성의 수는 제곱을 한 만큼이다.
영 다이는 “미술가인지? 영상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유머와 패러디에 환장한 사람인지?
디제이인지? 파악할 수 없는 익명의 누군가처럼 보인다”(19p)는 의심을
받은 적 있다고 말한다. 이 수많은 영역은 좋아하는 일로 묶인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 대한 의심은 남아있다. 피아노를 치다가,
실용음악과에 진학하고, 재즈를 배우다가 앨범을 내며 전자음악에 손을
뻗는다. 봉준호라는 이름을 거쳐 ‘영 다이’라는 이름에 정착한다.
보안여관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회사원이기도 하면서, 갑작스럽게
코로나를 겪는다. ‘컴퓨터 뮤직 클럽’을 결성한다. 삶의 궤적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굴곡을 돌아보며 영 다이는 단말마의 의문을
던진다. “친구들은 괜찮을 거야. 나도? 나는? ? ???? ????????”(35p)
위지영은 제도와 비제도, 클럽과
미술관, 글과 소리를 넘나든다. 픽션을 쓰는 작가로서의 고뇌, 사운드
아티스트로서의 노고, 즉흥 음악 퍼포머로서 겪는 작업 과정의 난해함.
그에게는 여러 경계를 넘나든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어려움인 것
같다.
키라라는 스스로가 여성
음악가일 리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성이란 뭐지? 이 책에서는
전기와 음악보다도 앞에 여성을 위치시켰다. 여성은 곧 정체성일까?
생물학적 성별에 불과한가?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는 것이 옳을까?
시스젠더와 트렌스젠더로 나누어야 하는 것일까? 수많은 물음표 앞에서
‘여성’은 아픈 말이 된다. 여성과 전기와 음악으로 살아온 이에게
각각의 단어는 다른 함의를 갖는다. 싫은 것, 그럭저럭, 좋은 것.
분명한 것은 음악이 좋다는 것이다.
애리는 전자음악 씬, ‘이 바닥’에서 겪은 어려움과 개인적 슬픔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한다. 여성이라는 단어가 갖는 사회적 함의에 대해
고민해 본다. 그리고 개인적인 슬픔 안에서 다시 정의되는 것들, 나와
나의 조우에 대하여 사유한다.
조율은 닿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을 넓히는 음악가이다. 그 영역 안에서
과거의 기억과 개인적인 감정이 뒤섞인다. 영역은 외부와 나 안을
가로지른다.
황휘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기, 음악, 여성, 그리고 재미로서의 효율.
기계로 음악을 한다. 그 주체가 여성이다. 이 모든 것이 모인 장소는
다름 아닌 공연장이다. 공연장의 효율은 재미에 있다.
여섯 명의 전자 음악가는 각각의 경험과 이야기로 전자 음악과 여성 간의 교차를 말한다. 관객 입장에서 자유롭고 즐겁기만 한 전자 음악에 대한 경험은 작업자의 입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발화된다. 마냥 즐겁고 자유롭지 못하다. 누군가에게는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이고, 누군가에게는 정체성이며, 누군가에게는 생존이다. 공통적으로는 ‘어려움’이다. 여성 전자음악가라는 (어쩌면 관계없어 보이는) 세 가지 단어의 조합은 각각의 작업자에게 새로운 어려움과 정체성을 부여한다. 여성과 전기, 음악을 곱한 값으로 나온 이러한 어려움에 대처하는 하나의 접속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관객으로서의 정체성만 가질 때에는 필요 없는 자세일지도 모른다. ‘전기’와 ‘음악’의 곱셈은 그저 즐겁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여성’을 곱해본다. 이 단어는 입체적이다. 상상하지 못한 문제가 튀어나온다. 갖가지 수가 생긴다. 인디 씬에서 겪는 불합리, 제도권과 그 밖의 존재, 젠더 정체성, 우울과 불안, 창작 과정. 도사리는 위기들은 점들은 모여 경험의 선을 만든다. 경험의 점은 또다시 모여 삶의 한구석을 그려낸다.
‘여성’과 ‘전기’와 ‘음악’은, 각각 다양한 층위의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이 의미는 개인 혹은 집단에 부여된다. 그렇기에 세 단어를 곱했을 때,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한 세계를 맞이하는 것이다.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경계를 흐리는 전자음악의 세계는 난리의 장처럼 보인다. 키라라의 말을 인용해 본다. “전자음악은 인위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멀쩡한 것들을 부수는데 능하다. (중략) 어쩌면, 전자음악이란 변형의 미학이다. 목소리가 베이스가 될 수도 있고, 드럼이 멜로디가 될 수도 있다. (중략) 무언가 바꾸어 쓴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전자음악가가 되는지도 모르겠다.”(87p) 전자음악은 경계를 부순다.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시작된 음악이고,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마음껏 소리를 바꾸고 활용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규범들을 흐려 본다. 여전히 미지의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글 정지원
얕고 넓게 보는 것이 취미이다. 미술과 영상에 관심이 있다. 근래에는
노이즈 음악이나 전자음악을 엿보는 중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아직
찾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