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듣는 연습
배선희

지난 5월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두 명의 여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극단 지금 아카이브의 배선희와 김진아였다. 그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수상소감을 말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 백상예술대상에서 연극 부문이 18년 만에 부활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생색내기나 보여주기식은 아닌가 하는 냉소적인 마음이 한쪽에 있었다. 하지만 올해 두 여자의 수상소감을 들으면서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다른 후보들과 함께 앉아 있던 김신록 배우의 눈에서 연신 눈물이 흐르는 장면이 화면에 잡혔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알 것 같았다. 벌판 위에 “아무도 오지 않는 집을 짓고”1, 끝없는 외로움을 길어 올리고 그 곁에 기꺼이 있길 자처하는 사람들이 연극 생태계를 지탱하고 있다. 지금 아카이브는 〈조금 쓸쓸하고 언제나 다정한 노래들〉(2022, 신촌극장)이라는 공연으로 젊은 연극상을 받았다. 이 공연에는 한 명의 배우가 나온다. 배선희다. 배선희는 동생 하나를 살리는 데 온 힘을 쏟는 언니다. 세상의 수많은 하나들과 그들의 곁을 살피던 언니들을 위한 공연이었다고 생각했다. 최근 함께 했던 공연을 준비하면서 들여다본 배선희는 걷고, 보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걷기와 보기와 말하기는 모두 깊게 들어야만 가능하다. 그것에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람과 나눈 대화를 이곳에 옮겨본다.
(정혜린 이하 정, 배선희 이하 배)

걷는 사람―연기와 몸

정: 수상 이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배: 질문을 받고 시상식 때 무엇이 좋았는지 생각해 봤어요. 영화나 드라마는 정말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지만, 제가 한 연극은 총 마흔 명의 관객이 본 공연이에요. 화려한 시상식에서 마흔 명의 관객에게 감사함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 되게 좋았어요. 이후 일상은 그렇게 달라진 건 없어요. 작업하고, 책 보고, 협업하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글도 쓰고 그랬어요. 또 주변을 조금 더 살피게 되는 힘도 생겼네요.

정: 저희가 최근에 〈정류장들〉(2023, 서울연극센터)이라는 공연을 같이했었죠. 이 작업을 제안하게 된 것은 연출로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배우의 일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어요. 〈정류장들〉에서 의도했던 것은 연기하는 상태와 연기를 하지 않는 상태의 경계를 지워보자는 것이었는데 배선희에게 연기란 어떤 상태인가요?

배: ‘나’라는 단일한 객체로서 저는 점점 없어지고 있어요. 순간순간 만나는 것들로 계속 새롭게 형성되고 다시 바뀔 뿐이에요. 공연을 한다고 해봅시다. 모두 시간을 내서 극장에 모여요. 그럼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고 목격할 것인지, 무엇을 듣고 말해야 하는지, 이 자리는 무엇을 위한 자리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여기에 들인 시간과 마음, 에너지가 헛되이 쓰이지 않길 바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미 승인된 ‘좋은 것’을 보기 위해서 모이는 것은 저에게는 의미가 없어요. 그보다는 길을 잃거나, 예상치 못했던 틈을 잠깐 엿보는 게 더 재밌죠. 그래서 닫혀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몸 안의 경계들을 계속 확장할 수 있도록 연기를 설계하고 연극을 만들어요. 모든 연극에서의 연기는 내가 이만큼 준비해도 그날 만나는 관객과 극장의 상황에 따라 어떤 경험이 될지,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엇이 발생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어요. 어떤 면에서는 체념과 포기의 상태로 무대에 올라가야 해요. 그러니 믿음이 필요하죠. 내 몸 안에 있는 것, 내가 시간을 들여 지금껏 해 온 것에 대한 믿음이요.

정: 직전의 인형극2은 반대였던 것 같아요. 정확하게 어떤 인물이 되고, 그 인물로 무대에 섰어요. 두 연기의 차이가 있었을까요?

배: 물론 보이고 표현되는 것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어요. 극장이 다르고 만나는 관객들의 몸이 다르고 텍스트가 다르고 그래서 작용은 달라지지만 제가 두 공연 안에서 하는 일 자체가 다르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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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기존의 인형들: 인형의 텍스트〉 낭독쇼케이스는 이지형의 인형으로부터 시작하는 3개의 단막극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배선희의 출연작은 김연재 작 〈한쪽 발은 무덤을 딛고 나는 서 있네〉, SAC아트홀, 2023.10.26.~10.27.

정: 인형극 끝나고 저한테 그러셨지요. 그 인형이랑 함께 있었던 시간 동안 그 인형을 정말 사랑했다고요. 연출은 배우가 인물에 빠져들어 가는 매 순간을 마주합니다. 거짓말이나 놀이 같은 이상한 광경이에요. 낡아가는 나무 인형을 향한 그 사랑은 무엇이었을까요?

배: 희곡을 처음 읽다 보면 얘가 왜 이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이러는지 쫓아가다 보면 결국에는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해요. 그 사랑은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 사랑이에요. 이번에 만난 인형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저보다 조금 더 크거나 저랑 비슷한 크기였어요. 매우 무거웠고 사실 운용을 전혀 할 수 없었어요. 전적으로 저에게 기대는 인형의 무게감을 온몸으로 받아 들다 보니, 그 자리에는 사랑만 남더라고요.

정: 연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배: 여기엔 두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짜 시작은 친구 따라 우연히 간 연기학원 선생님이 저에게 독백을 시키셨던 거예요. 그래서 했더니 “거짓말하지 마!”라는 말을 한 달 동안 들었어요. 결국 어느 날은 덜덜 떨면서 그 분한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담은 독백을 했어요. 칭찬을 받았죠. 그때 처음으로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 말이 내 몸을 관통해서 그대로 몸 밖으로 나가는 무아지경의 경험을 강렬하게 느꼈고,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리-스타트의 경험도 있는데요. 연기과 3학년 때 휴학을 하고 배우를 관두려고 했어요. 그러고 3년이 지나자 선생님이 졸업은 하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복학해 졸업 작품에 들어갔는데 저보다 앞선 등장을 준비하는 배우의 뒷모습을 그때 백스테이지에서 보게 되었어요. 등을 웅크린 채 서서 관객석과 무대를 들여다보며 차례를 기다리는데 그 등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배우가 공연에 도구처럼 쓰이는 것을 경험하고 배우를 그만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다시 돌아와 땀에 젖은 배우의 둥근 등을 보면서 배우란 대단한 존재라고 느낀 것이죠. 그때 다시 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정: 배우님은 실험극이나 스탠딩 코미디 같은 여러 형태의 무대연기와 퍼포먼스, 영상 매체 등 넓은 스펙트럼의 연기를 하시는데요, 어떻게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나요?

배: 저는 분열의 감각을 안고 살고 있어요. 통합된 나가 없다고 생각해요. 여성으로서, 여성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분노와 우울감이 한참 팽창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어느 순간 그게 빵 하고 터지고는 다 흩어져 버렸어요. 그 파편들이 모이지 않으면서 이제는 분열된 감각인 채로 살고 있어요. 관심사도 하나로 정리되지 않고 느닷없이, 막, 흩어져요. 그러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을 무시하거나 간과하지 않으려 해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는 의지보다는 어쩌다 보니 이런 걸 하고 있네, 이렇게 되는 것이죠. 지금 저는 내부로 향하는 몸보다는 밖으로 열려 있는 관계에 집중하고 있어요.

정: ‘몸’과 ‘관계’를 분리하기란 어렵지 않나요? 배우님은 몸을 어떻게 인식하시나요?

배: “배우의 몸은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라는 말을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도통 모르겠는 거예요. 견디기 어려운 소식에 자꾸만 가라앉는 제가 있는데 내 몸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그즈음, 도나 해러웨이의 책 『트러블과 함께하기』(마농지)를 읽다가 무릎을 탁 쳤어요. “우리는 모든 곳에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어떤 곳에 있고, 어떤 곳에서 어떤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전에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감이 막연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내 몸은 여기에 있고 바로 이것들과 만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잘 만나는 것’에 대해 집중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결국 잘 보고 잘 듣는 일인 것 같아요. 말하기는 그다음의 일인 것 같고요.

보는 사람―새와 책

정: 자연스럽게 도나 해러웨이를 불러오셨어요. 애독가이자 애서가인 배선희에게 읽기란 무엇인가요?

배: 지금 아카이브의 〈2022 코미디캠프: 파워게임〉(펀타스틱 씨어터) 공연을 준비할 때였어요. 자기 고백적인 내용들이 많았고, 제가 가진 취약함을 ‘파워’로 전환시켜보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에 엘렌 식수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책을 읽으면서 엄청난 힘을 얻었어요. 길을 자꾸만 잃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말 정확하게 안내해 주었어요. 책은 저에게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에요. 물론 읽고 싶은 책을 만날 때까지 굉장히 많은 책을 뒤적거려요. 더 극적인 만남을 위해 노력하는 편이에요.

정: 배선희가 새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연극계에서 유명합니다. 어쩌다 새와의 사랑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했던 2021년이 제가 탐조인이 된 해예요. 전쟁 소식에 엄청난 무력감으로 쓰러져 버렸죠.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이 세계 앞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너무 작고 연약하기만 한 거예요. 황폐해진 마음에 책으로 도망쳤어요. 그런데 마침 읽고 있던 책들이 새에 관한 책도 아니었는데 모두 새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다음날 보온병에 물만 챙겨서 야트막한 뒷산에 갔어요. 그때 직박구리를 본 거예요. 그리고 그 새도, 저를 봤어요. 동시에요.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잠깐 본 다음, 새가 정말 큰 소리로 세 번을 울고는 떠났어요. 주변에 보내는 경고신호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어요. 놀라운 일이었어요. 그 소리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도, 서로 눈을 마주친 감각도 이상하기만 했죠. 바로 도감과 쌍안경을 샀어요. 그렇게 만남들이 이어지면서 이 지구상에 인간이 아닌 다양한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얼마나 각자의 삶들을 힘껏 살아가는지 알게 되었어요.

정: 〈정류장들〉을 보신 관객 한 분이 그런 말을 했어요. 새와 연극은 둘 다 날아가 버리고 사라진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다고요. 연극의 난점은 떠남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것 아닐까요. 새를 보는 사람이자 연극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배: 서식지가 보호된다면, 새들은 그 주변에서 지내기 때문에 같은 곳에 가면 새를 다시 만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연극은 그렇지 않아요. 연극은 매번 새로이 만나고 매번 이별하는 일이에요. 초연했던 작품을 재연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른 공연이죠. 오늘 본 새는 내일 다시 볼 수도 있지만 오늘의 공연에게 내일은 없어요. 배우로서도 관객으로서도 ‘사라짐’의 감각은 너무 슬프지만 절대 익숙해질 수 없겠구나! 그러니 오히려 계속 슬퍼해야겠다 싶어요. 잘 이별해야 다음 만남을 또 잘 시작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저는 모든 작업을 너무 어렵게 해요. 스스로에게도 동료들에게도 가혹해질 때가 있어요. 그게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해서 그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농담을 할 여유를 만들면 되겠더라고요. 웃을 수 있는, 농담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같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 같아요.

정: 배우님은 〈코미디캠프〉를 4년간 해오고 계신 스탠딩 코미디언이기도 한데요, 그 자리는 맘껏 농담할 수 있는 자리라고 느껴지기도 하는데, 농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과 이미 마련되어진 농담의 자리에서 농담하기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배: 일단 저는 스탠딩 코미디를 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코미디’를 위한 다양한 연극적 형식을 시도하고 있죠. 저는 먼저 ‘요즘 나는 뭐가 가장 웃기지?’라는 고민에서 시작해요. 가장 어려운 점도 ‘어떻게 웃길 수 있지?’ 입니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코미디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데요, 가능하기도 하더라고요. 웃음의 양태들이 다를 뿐이에요. 여기서 낄낄거리는 사람과 저기서 머쓱해하며 웃는 사람, 또 박장대소하는 사람과 울면서 웃는 사람이 동시에 존재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취약함을 드러내고 솔직해져야 합니다. 전략적이어야 해요. 그러나 전 그 전략에 있어 굉장히 약한 사람이라서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비장해지기보다는 깔깔 웃기를 더 훈련하고 싶어요.

말하는 사람―연극

정: 어떻게 웃기지가 어려운 이유는 웃겨야 하는 대상이 명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내 앞에 앉아 있는 관객의 존재는 코미디와 연극의 난점이 아닌가요. 다수의 실체를 공연 내내 마주해야 하는 배우와 누군지도 모르는 관객을 생각하는 연출의 어려움은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관객은 연극 만들기의 핵심이기도 하죠. 배선희는 관객과 어떤 관계를 맺나요?

배: 먼저 모든 관객을 만족시킬 수 없어요. 모두를 웃길 수도 없고, 이해시키는 것도 불가능해요. 그래서 코미디 공연 만들 때 제가 하는 것은 나에게 진짜 웃긴 것을 먼저 찾는 것이에요. 그때의 ‘나’는 관객을 이미 만나고 있는, 수많은 타자가 섞인 나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나에게 진짜 웃긴 것, 내가 진짜 욕망하는 것, 내가 진짜 떠들고 싶은 것을 찾는 게 더 어렵기도 해요. 그러나 그걸 찾게 되면, 관객들도 좋아할 것이 분명하다고 믿어요. 〈정류장들〉에서는 연습할 때 만났던 것들을 다시 취합하거나 정리하지 않고, 파도에 씻기는 모래처럼 흘러가 버리게끔 내버려 두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뭘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는 불안함이 있기도 했어요. 연출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라고요.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고,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다.” 그 믿음이야말로 내 안에 있는 타자에게서 오는 것이에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극장에 관객이 옵니다. 서로에게 침투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그 만남은 사건이 되고,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저에게 관객과의 관계는 한쪽에 종속되어 있다기보다는 완전히 상호적인 일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