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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A R N I N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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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허공에 박힌 굵은 글자. 접근금지 명령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붉은 테이프 라인으로 위아래를 휘감아 둔 새까만 무대는 단숨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너머에 과연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안 될 것 같은 그곳에서, 앳된 얼굴의 청소년(이때 등장하는 청소년은 ‘청소년 역할’의 성인 배우가 아니라 ‘진짜 청소년’으로 명명된 10대의 학생이다)이 문을 열고 나오며 연극은 시작된다. 그의 온몸을 감싼 방호복은 자신이 방금 빠져나온 공간이 ‘낯설고’, ‘기이한’ 곳임을 나타내는 패션이다. 하지만 금세 헬멧을 벗고 드러난 얼굴 표정에는 어쨌든 살아나왔다는 안도감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뒤이어 등장한 다음 탐사자에게 카드키와 무전기를 건네고 전화를 받으며 사라지는 그의 발걸음은 ‘진짜’라는 이름처럼 자연스럽다. 그는 대사를 뱉거나 행동을 연기하는 연극 무대처럼 극적이고 특별한 실험실이 아니라, 노래방을 가고 마라탕을 먹는 그저 그런 일상으로 향한다.
국립극단의 청소년극 〈Tank ; 0-24 (탱크영투이십사)〉 (이하 Tank)는 명동예술극장에서 2023년 10월 26일 막이 올라 11월 19일까지 3주간 진행되었다. 구성과 연출, 미술을 맡은 여신동은 참신한 기법 위로 강렬한 색감과 오브제를 통해 화면의 깊이를 확장하고, 네 개의 막이 갖는 짜임새의 밀도를 시각적으로 구분한다. 무대 디자이너로서 연극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연출가의 면모가 돋보이는 지점이다. 여러 개의 막과 장 안에는 처음 마주했을 때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한 본 공연의 제목처럼, 단번에 해석하기 어려운 것들이 널브러져 있다. 제작진은 ‘Tank’를 “비어 있으며 각자가 채울 수 있는 인생의 시공간”으로, ‘0-24’는 “어린이청소년이 해당하는 연령과 24라는 숫자가 갖는 인생의 시간성”1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연극은 그 시공간 안에서 ‘나’를 찾아가는 행위를 ‘탐사’로 명명하고 있다. 〈Tank〉에는 마치 해설자처럼 느껴지는 ‘목소리’가 등장하는데, 목소리는 무대 안과 밖을 넘나들며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인지되는 존재이다. 공간을 채우는 데 주력하는 사운드는 밴드 혁오의 리드보컬 오혁이 맡았다. 모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음악은 질문하지도 대답하지도 않은 채로 부유하고, 또 다른 음향 속성인 ‘목소리’와 확연히 구분되는 역할을 맡는다.
1
국립극단 프로그램북 참고
좁고 기다란 탱크가 무대 바닥을 뚫고 나타나면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각기 다른 자아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화장을 하거나 틱틱거리는 말투로 대화하고, 인형을 껴안거나 바닥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모습들을 보며 관객은 그들이 전부 삶의 다른 궤적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모두 지나왔거나 지나갈 청소년기의 나날들이다. 왁자지껄한 탱크 안에 적응할 즈음, 검은 옷을 입은 한 ‘아이’는 사다리를 타고 밖으로 올라와 탱크 위에 우뚝 선다. 머리카락과 옷이 흩날리고 차가운 조명이 번뜩이는 아슬아슬한 모습은 탱크 안과 밖의 상반된 분위기를 잇고,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추락에 대한 공포가 밀려온다. 그가 떨어질까 봐 겁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0시부터 24시까지, 매일 정해진 하루의 시간을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이 미덕인 청소년기의 삶에서 돌발행동은 곧 재난으로 읽힌다. 그가 탱크 안으로 돌아가자 나는 안도한다. 미적지근하지만, 나의 좀 더 어린 날에 주고 싶었던 위로와 비슷한 온도의 마음이다.
〈Tank〉는 우리를 계속 ‘처음’으로 이끈다. 지금부터 시작, 하고
헤아리던 시간의 숫자가 쌓인 탱크, 태초가 발아하고 새 생명을
잉태하는 따뜻한 물 속도 탱크, 아끼고 좋아하는 것으로 꾸며 둔
아지트도 탱크. ‘목소리’가 탱크 속 아이들을 귀찮게 굴며 던지는
말들은 매몰차게 들리지만, 어딘가 애달프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원초적인 질문.
“사랑받아 본 적 있어?”, “네가 멋지다고 생각해 본 적 있어?”,
“엄마는 날 진짜로 좋아할까?”
그 질문에 심기가 거슬린 탱크 안의 자아들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다시 묻는다.
“너 지금 화났지?” 또렷하게 반복되는 목소리는 어둠 속에
내버려진 관객의 감각을 다시 무대로 집중시킨다. 사랑받는다고 느꼈던
때가 언제더라. ‘나’는 언제 ‘나’이며,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순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다를까. 고민은 끝나지 않고, 붉은
풍선이 되어 구멍에서 다시금 솟아오른다. 내가 떠올리던 것들을
‘나’와 분리하여 마주하는 경험은 풍선으로 가시화되고, 이는 마치
일기장과 닮았다.
청소년기에는 과거보다 더 넓고 낯선 세상과의 관계 맺기가 시작된다.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난관들은 당연히 넘어서기 어렵고, 그러다
보면 실패와 좌절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그 느낌은 너무 막막해서,
그저 하루를 살아내고 있을 뿐인 ‘나’ 자신이라도 탓해야 할 것만
같다. 다가서면 늪처럼 날 빨아들일 듯한 문제들은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망설여지거나 그저 외면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어쨌든 그 순간을 살아나온 나는, 내가 성장하고자 하지 않았더라도
어느새 장애물보다 커져 있다. 커다랗게 부푼 풍선이 나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높이로 떠오르고, 그걸 껴안을 수 있게 될 때 나는
비로소 이해하지 못했던 나 자신, 그리고 세상과 화해한다. 복잡하게
중첩되던 스스로를 향한 여러 시간대의 오해는 풍선이 터짐으로써 일부
해소된다. 터진 풍선의 파편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품이 넓어졌을지도 모른다. 그제야 색색의
조명들이 반짝이고, 이 세상엔 빨강 말고도 수많은 색이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극단적인 암전, 독특하고 적극적인 조명과 안개, 위험천만하게 뚫린
구멍으로 솟아오르는 태양을 닮은 풍선. 아주 짙은 페인트로 거침없이
그려낸 듯한 추상화를 닮은 80분은 정말 그림인가 싶을 만큼 정적이다.
무대를 지켜보는 시간의 흐름은 건조한 피부와 뻑뻑한 눈가로 절절히
와닿고 ‘그들’이 벌이는 산발적인 행동의 이유도 끝까지 혼란스럽지만,
연극과 연출은 그것이 나 스스로를 탐사하고 내게 온전히 집중할
기회라고 해명하며 오히려 우리의 숙고를 요구한다. 그러니까 극중의
‘진짜 청소년’이 다음 탐사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Tank〉가 모든
관객에게 친절한 길잡이는 아니란 사실을 받아들이자.
극 초반부터 목소리는 관객에게 말을 걸어 온다. 이 거리감은
꾸준히 유지되며 이후 관객이 목소리에 이입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는 관객에게 이 안에서 웃고 울어도 됨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정작
관객이 웃거나 울 만한 감정적 동요를 얻기에는 배우가 ‘연기’라는
매개를 통해 깨우는 내러티브가 부족하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불현듯 번뜩이는 감상을 내놓기에는 감각을 자극하는 역동성이 적다.
제작자가 표현에 부여했을 의미를 최소한으로 공개한 상태에서
관객에게 자발적으로 결말까지 곱씹어 달라고 종용할 수는 없다.
관객은 연극 속 ‘그들’이 표면화했듯 결국 객석을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하나하나의 독립적인 ‘탱크’이기에, 어둠 속을 배회하는
장면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관객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소화할 이야기가 없으니, 러닝타임이 넉넉하게 느껴진다는 장점도 있다. 관객은 연극을 쫓아갈 필요 없이, 그저 자신의 앞에있는 극 중의 장면들에 머물 수 있다. 이를 증명하듯 여신동 연출은 연극을 ‘라이브’라고 부르며, 극의 형식을 변호한다. 또 나는 김신록의 인터뷰집 『배우와 배우가』(안온북스)에서 연극에서 힘을 발휘하는 ‘현존’이란 배우가 관객의 앞에 서 있다는 데에서 온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다. 즉, 무대 위와 아래가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연극이 갖는 동시대성인 것이다. 나는 공연장에서 객석 안내원 일을 하는데, 공연 도중에 공연장에 들어가는 관객들에게는 앞장서서 관객석까지 안내해야 한다. 비슷한 조건이고 심지어 더 어두운 영화관에는 왜 그런 안내원이 없는지 의문을 품곤 했는데, 요즈음 공연을 자주 보고 그에 대해 재고하게 되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연극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공연은 우리의 ‘지금’을 무대 삼아 이뤄진다. 어쩌면 타인과 긴밀하게 공유하고 있기에 조금 더 조심스럽고 특별한 ‘지금’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닐까. 일을 하다 보면 공연이 시작한 후 도착한 관객이 객석으로 입장할 때, 예매한 자리가 생각보다 무대와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안쪽까지 들어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저 주목받기 싫거나 타인의 관람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배려의 차원일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공연이 주도하는 ‘지금’이 분명히 유별나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지점이라고 여겨진다.
다시 〈Tank〉로 돌아오자. 연극은 수미상관으로 마무리된다. ‘WARNING’이 크게 쓰인 무시무시한 벽은 사라지고 휑한 무대에는 안개만이 자욱하다. 지극히 비현실적인 세상에서 생소하고 몽롱한 시간들을 마주했던 그는, 막이 내리기 직전 털썩 주저앉아 방호복을 벗고 ‘진짜 청소년’으로 되돌아와 걸려 오는 전화를 받으며 유유히 퇴장한다. 가방 속으로 아무렇게나 구겨넣은 방호복과 함께, 어둠과 구멍과 빨간 풍선은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듯이. 하지만 그가 방호복을 가지고 돌아가듯, 어둠과 구멍과 빨간 풍선은 마치 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처럼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여행 전과 같은 핸드폰과 캐리어이지만 그 안에는 놀라운 맛의 초콜릿과 알싸한 냄새, 햇볕에 그을린 표정 같은 게 가득 들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연극에서 일상으로의 재빠른 모드 전환은 답이 없어 보이는 그들과 우리의 탐사가 그렇게까지 비장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암시하는 듯하다.
‘연극이 끝난 후’엔 그저 정적과 고독만이 남는다던 노래2를 기억한다. 다행히도 나는 〈Tank〉에서 그것만 느끼지는 않았나 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어느 날, 공연장에서 일하며 어두운 객석 복도를 작은 랜턴으로 비추다가 〈Tank〉 생각이 났다. 반질거리는 방호복 차림의 사람들이 헬멧에 달린 헤드라이트로 구멍 너머를 비춰보던 장면. ‘그때’가 되어버린 그날의 ‘지금’, 수많은 관객이 같이 공유하던 11월의 순간. 매일매일 또 다른 영투이십사를 재생하고 있는 나는 분명 연극을 보던 그날을 담은 풍선보다 커다란 사람이 되었을 거다.
2
〈연극이 끝난 후〉(1988), 샤프
각자가 삶의 어느 부분을 살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모두 ‘지금’을 들고 표류하고 있다. 과거가 안쓰럽고 미래가 두려울 때도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다면 그 방랑의 시간이 마냥 고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반복되는 환난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헬멧을 쓰고, 등지고 섰던 어려움을 마주하자. 덩그러니 뚫린 먹먹한 구멍을 내려다보며 모호하고 지난한 탐사를 인내하자. 24시간의 막이 내리면 우리는 다시 들어선다. 0에서 말미암은 세계로, 매캐한 꿈속으로.
글 오서윤
음악학과 작곡을 공부하고 있다. 음악을 만드는 것과 음악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을 아우르며, 어쨌든 음악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다. 바다와 달, 여름,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고, 가끔
시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