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플라스티쿠스. 플라스틱 소비를 그만둘 수 없는 현재의 인류를 뜻하는 신조어이자 프로젝트 그룹 빠-다밥이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초연한 연극의 제목이다. 투명한 플라스틱병 속에 갇혀 좁은 병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게끔 구성한 포스터가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극장에 들어서니 말끔한 막, 하이글로시(high-glossy)1 바닥으로 간결하게 디자인한 무대 위에 검은 비닐봉지 더미가 비정형적 형태를 유지한 채 차가운 연보랏빛 LED 조명을 받고 있었다. 메인 스피커에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엠비언스(ambiance)2를 활용해 우리가 여태 알지 못한 세계, 익숙하지 않은 어떤 공간감을 구현하려는 듯 보였다. 그 세계, 그 공간은 플라스틱처럼 매끈하고 가벼우면서도 엉성한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무대 위에는 두 세계가 그려졌다. 하나는 한때 환경 위기 심각성을 공유하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두 사람, 무영과 영인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이고 나머지는 환경운동가에서 동화 작가로 인생의 길을 틀어버린 무영이 창조한 세계다. 후자는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기 위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축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작가 무영의 변태적 욕심이 빚어낸 곳으로, 모든 것이 플라스틱이 되어 가는 세계다. 버리려고 만들어진 플라스틱은 버려진 채로 소멸하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되어 거대한 세계를 형성하고 남아 있는 것들을 잠식해 간다.
무영은 그 세계안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세상과 닮고 싶어하는, 즉 플라스틱이 되고 싶어하는 아이를 배치한다. 성인 배우가 연기하는 아이는 어른이 되지 못했지만 다 자라버린 몸을 가지고 긴 팔과 다리를 허우적대며 무대를 자유롭게 휘젓고 다닌다. 아이는 플라스틱으로 변태한 아버지에게 자기를 버릴 것인지, 자신은 기형인지 궁금해하며 실존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을 계속 던지지만 플라스틱 더미 안으로 침잠한 채 얼굴만 내밀고 있는 아이의 아버지는 “모르겠구나.”라는 공허한 대답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다 플라스틱 산 위로 다시 플라스틱 쓰레기가 쏟아져 내리는 것으로 추정되는 굉음이 들리면 아이는 겁에 질린 채로 플라스틱 더미일 뿐인 아버지의 품으로 파고든다. 아이는 세상에서 별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인 별보다 변모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계속 적응하는 식물이야말로 살아 있는 존재이기에 꽃이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낸 플라스틱은? 아름다워야만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일까? 이 세계에서 정의하는 기형과 정상성은 어떤 것일까? 문어체에 상징성을 잔뜩 담은 선문답 같은 부자의 대화를 들으며 내 안에 질문이 쌓여갔다
2021 SPAF ©옥상훈
갑자기 마주한 낯선 세계관이 소화되지 못하고 어지럽게 산적될 때쯤 버거운 현실의 벽과 싸우고 있는 인물 영인이 등장한다. 한때 열혈 환경운동가였던 무영에 감화되어 환경운동가의 길로 들어선 영인은 현실을 등지고 도망쳐 버린 무영을 원망한다. 장면이 진행될수록 그 원망은 인간이 버리는 플라스틱 쓰레기 만큼이나 쌓이고 또 쌓이며, 누그러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영인은 화가 잔뜩 났다. 치우고 또 치워도 생겨나는 쓰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의미 없는 일이 될 것이라는 무력감 때문에, 자신이 하려는 일에 다른 정의를 내세우며 어깃장을 놓는 무영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청혼하지 않고 도망쳐 버린 무영 때문에, 그래서 자신이 결혼과 출산으로 대표되는 ‘평범한 삶’을 놓쳐 버린 것 때문에.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캐릭터는 맞지만, 시종일관 화를 내고 있으니 거대 세계와 마주한 개인의 무력감과 갈등이 도리어 옅어지고 만다.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 쉽게 말해 대사가 있는 장면이 종료되고 나서도 배우들은 퇴장하지 않고 무대에 존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실과 작가가 만들어 낸 디스토피아는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서로 이어져 있음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대사가 땅에 발 딛지 못하고 허공을 떠도는데 저 배우는 왜 저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숨죽이고 있는 것일까 생각했던 것을 보면 그다지 효과적인 연출은 아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플라스틱으로 변태할 수 있도록 자신의 외피를 물려주고 소멸을 택한다. 영인은 무영과 말다툼을 하고 떠난다. 한무영은 플라스틱으로 변해 가는 아이 앞에 꽃을 피워 내는 결말을 선사한다. 배우들이 빠져나간 무대 위에는 가느다란 선재로 제작된 나무 의자, 비닐 더미, 검은 비닐봉지로 감싼 화분과 긴 줄기가 위태로운 식물, 그 위로 떨어진 꽃 비잔해가 남는다.그렇다. 소멸하지 않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심각성, 인간과 환경의 관계 맺기를 말하면서 또 새로운 쓰레기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 이 연극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지점이었다.
다소 올드하게 느껴지는 대사, 피부에 닿지 않는 현실감 없는 발화 방식, 고민이 더 필요해 보이는 무대 연출과 더불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애매모호함과 공허한 문제의식까지. 닿지않는 거대 담론의 비닐을 한차례 한차례 벗겨내고나자 그 안에 남은것, 내 손에 닿은 알맹이는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은 연결되어 있다. 한 개인이 제 아무리 그 고리를 끊어내려 노력해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내일을 위하여, 다음 세대를 위하여 내 안에 창조한 다른 세계속으로 침잠하는 것 보다 자기 연민을 넘어선 더 나은 결말을 발명해 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위치한 이 땅에 꿋꿋하게 발 딛고 서 있을 때라야 비로소 흐리고 흐린, 약하디 약한 희망을 발견할 가능성을 지닌다. 필멸자가 창조해 낸 불멸의 세계가 필멸자의 소멸을 앞당기는 것은 더는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