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민, 임윤찬
연주하는 악기도 성격도 다른 두 사람. 하지만 음악에 대한 애정을 흔들림 없이 고백하는 모습은 꼭 닮았다. 영재라는 타이틀에 부담을 느끼기보다 연주자의 고뇌와 기쁨, 더 높은 이상을 연료삼아 고유한 소리를 내기 위해 단련하는 길 위에 서 있다. 힘들지만 가치있는 것을 좇고 있다는 믿음, 마음속의 노래를 꺼내고 싶은 열망, 그리고 나보다 나를 아껴 주는 서로의 존재가 이들의 재능을 꽃피우고 있다.
최근 여러 콩쿠르나 연주를 통해 실력이 알려지고 굉장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한재민: 아무래도 전보다 실감이 나요. 예를 들어 학교 앞을 걸어가는데 누군가 알아본다든지 하는 일들이 있는데,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래도 크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에요.
임윤찬: 스케줄이 많아져서 힘든 건 있지만 어떤 관심이나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고 제 음악을 하려고 합니다.
재민씨는 올해 루마니아 제오르제 에네스쿠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또 10월엔 제네바 콩쿠르에서 3위 입상을 했죠. 정명화 선생님 이후 51년 만의 한국인 입상이었어요.
한재민: 원래 에네스쿠보다 제네바 콩쿠르에 먼저 도전해 보려고 했었는데, 제네바 콩쿠르가 1년 미뤄져서 겹치지 않게 둘 다 나갈 수 있었어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콩쿠르에서 입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영광이죠. 특히 어릴 적부터 저의 우상이셨던 정명화 선생님의 뒤를 이을 수 있어 더욱 감회가 남다른 것 같아요. 과분한 상을 받은 것 같아 감사해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윤찬 씨는 2019년에 윤이상국제콩쿠르에서 1위를 하셨고, 올해는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으로 전국 공연을 열었죠. 기교를 넘어서 리스트의 음악 인생을 표현해야 하는 쉽지 않은 레퍼토리였어요.
임윤찬: 윤이상국제콩쿠르는 예원학교 다니면서 짧은 시간에 준비를 한 거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기대하지 않으면 연주가 좋게 나오는 것 같아요. 첫 전국 공연은 프로그램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을 해 보고 싶었어요. 음악을 진실하게 해야겠다는 영감을 받은 굉장히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음악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스펙터클한 여정을 거쳤을 것 같아요. 아주 빨리 음악을 습득하고 발전해 왔으니까요. 음악에 대한 생각이 처음과 달라진 점이 있나요?
한재민: 음악에 대한 애정은 처음과 다를 게 없는데 연주를 준비하는 자세나 마음가짐에는 확실한 차이가 생긴 것 같아요. 예전에는 솔직히 재능을 믿고 ‘이 정도만 하면 되겠지’ 생각하기도 했지만요. 듣는 귀가 높아져서인지 연습량도 많이 늘어났고 또 무대에 대한 욕심이나 책임감, 좋은 의미의 부담감이 생겼죠.
임윤찬: 음악에 대한 존경심은 바뀌지 않았어요. 요즘은 특정 음악만 좋아하지 않고 모든 음악을 제 연주에 흡수하려고 합니다. 음악가로 살아가려면 모든 음악을 사랑하고 모든 생명체를 품어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음악뿐만 아니라 스포츠와 문학에서도 배울 것이 아주 많아요. 예를 들어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연습할 때 절대 꽃이 필 수 없는 지역에서 꽃이 피는 기적을 상상한다든가, 다른 곡에서는 축구 선수 리베리가 섬세한 드리블로 골대를 강타하는 동작을 상상한다든가…. 모든 장르가 예술가에게 필요한 요소가 될 수 있어요.
최근 연주해 보고 싶은 작품이 있는지 궁금해요. 어떤 기준으로 연습곡을 선택하나요?
한재민: 항상 바뀌는데 요즘은 날씨 때문인지 쇼팽 소나타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임윤찬: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바흐 평균율 전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전곡, 모차르트 소나타 전곡, 쇼스타코비치 프렐류드와 푸가 전곡 등입니다. 같은 레퍼토리를 하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못 느끼기 때문에 레퍼토리를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연주자의 삶에서 힘든 점, 그런데도 계속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한재민: 이 악기를 평생 하려면 진짜 하루도 연습을 빼면 안 된다는 게 힘든 점이에요. 매일 자신과 싸워야 하죠. 하지만 힘들게 준비한 연주일수록 무대에서 관객들의 호응을 볼 때 희열이 더 큰 것 같아요. 완벽함도, 한계도 없는 게 예술의 힘든 점이자 매력이라는 것을 배워 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윤찬이 형 같은 연주자와 음악을 같이 할 때 느끼고 배우는 게 많아요.
임윤찬: 항상 자기 전에 ‘이 정도로 음악이 나오고 있구나’ 보려고 녹음을 하는데 보통은 저한테 화가 나요. ‘새벽 1시까지만 하고 음악이 나오면 접어야겠다’ 하다가 녹음을 들으면 ‘왜 이거밖에 못할까’하고 새벽 3시까지 연습을 하죠. 불안하고 자괴감도 들지만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제가 원하던 음악이 정말 딱 한번 나올 때가 있어요.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최근 연주자로서 고민이 있다면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있나요?
한재민: 콩쿠르 이후 제 연주 영상을 다시 보니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문제들이 많더라고요. 어떤 악기든 근본적인 소리가 좋아야 원하는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소리를 내는 방법이나 색채가 지금보다 더 다양했으면 좋겠어요.
임윤찬: ‘어디를 고쳐야 되겠다’보다는 제 안에서 노래하고 있는 음악을 ‘어떻게 현실로 꺼낼 수 있을까’부터 시작해요. 사실 모두가 그렇게 노래를 하고 있지만 그대로 꺼내기까지 매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죠. 제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음악을 꺼낼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해요.
2021 교향악축제에서 연주하는 임윤찬 ©예술의전당
반대로 내가 연주자로서 가진 강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한재민: 젊음에서 나오는 열정이나 패기가 아닐까 싶은데요. 물론 약간 어리숙하다 느낄 수는 있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윤찬: 저는 없는 것 같습니다. 호로비츠, 코르토 같은 사람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아직 부족한 학생이거든요. 그런데 재민이는 무대 위에서 나오는 카리스마와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성격과 외모를 가지고 있어요.(웃음)
한재민: 저도 형 연주를 좋아하는데요. 무대에서 갑자기 나오는 즉흥성이 있어요. 형이야 말로 남들과 차별화되어 있죠. 관객을 몰입시키는 능력이 엄청난 것 같아요. 연주를 보고 나면 ‘더 이상 쓸 감정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요. 물론 외모는 말 할 것도 없고.(웃음)
요즘 롤 모델로 삼는 연주자는 누구인가요?
임윤찬: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를 말하려면 이틀이 걸릴 것 같아요. 일단 첫번째는 손민수 선생님이고요. 전설 속의 인물 중에서는 알프레도 코르토, 노이하우스, 마리아 유디나 등 러시아 연주자들도 좋아하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에드윈 피셔나 부조니,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가 있어요. 음악에 모든 것을 헌신한 이 연주자들 처럼 되고 싶어요. 그들 곁에는 늘 음악적 파트너들이 있었는데 저와 재민이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한재민: 날마다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어서 한 명을 꼽기는 어려워요. 오늘은 다닐 샤프란 음악을 듣고 왔고요. 샤프란의 연주를 보면 ‘이렇게도 연주할 수 있겠구나’ 자주 생각해요. 이전에 좋아했던 첼리스트에는 고티에 카퓌송, 에드가 모로, 지안 왕, 다닐 샤프란, 에마누엘 포이어만, 파블로 카잘스 등이 있는데, 다들 차별화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어요. 가슴에 있는것을 잘 끌어내는게 아닐까요.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는 언제였나요?
임윤찬: 기억에 남는 무대로는 미국에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쇼팽 협주곡 2번을 연주했던 세브란스 홀이 생각납니다. 피아니스트가 가장 좋아할 만한 피아노에 아름다운 홀이었어요. 연주 퀄리티나 만족했던 무대로는 저도 역시 재민이와 함께했던 연주가 떠올라요. 솔로로 하는 것보다 더 최고의 연주가 나왔어요. 저는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어서 200%를 준비해도 무대에서 30%밖에 안 나오는 편인데, 그래서 그런지 재민이와 했던 공연을 특별히 더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고, 소위 ‘Z세대’는 특히 유행에 민감한데요. ‘클래식’ 연주자로서 전통으로부터 계승할 부분과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한재민: 저는 유행에 민감한 편은 아닌 것 같아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는 먼 과거로부터 배울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예술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후자가 되고 싶어요.
임윤찬: 시대가 어떻게 변하는지보다도 제 진정한 목소리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앞서 말한 코르토나 노이하우스 같은 사람들도 그런 가치를 지켜 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죠.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연주보다도 저만의 해석이 담긴 음악을 하겠습니다.
2021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한재민
앞으로 어떤 음악적 목표를 가지고 있나요?
한재민: 어릴 때부터 짠 계획이 있는데요, 15살부터 5년 주기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첼로 소나타를 대여섯 개 남긴 작곡가가 거의 없으니까요. 나이마다 연주가 다를 텐데 그 차이가 재밌을 것 같아요. 5년마다 발전하는 제 모습을 느껴 보고 싶기도 하고요. 15살은 지났지만 최대한 빨리 시작하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이 사람이 정말 진실한 예술을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임윤찬: 바로크부터 현대음악까지 모든 레퍼토리를 남기고 싶어요. 사실 다섯 번을 다시 태어나도 모든 피아노 레퍼토리를 연주할 수 없어요. 그래서 베토벤 소나타, 모차르트 소나타, 바흐 평균율처럼 뿌리가 될 수 있는 레퍼토리를 남기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저의 목소리를 찾는 거예요.
올해를 마무리하며 나에게 한마디 해 준다면요.
한재민: “올해 열심히 달리느라 수고했다.” 작년 9월에 에네스쿠 콩쿠르 세미파이널 결과가 나온 후부터 올해 10월 제네바 콩쿠르까지 매일 머리에 콩쿠르라는 단어가 있었어요. 긴장감 속에서 매일을 살았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왔어도 스스로 칭찬을 해 주고 싶었던 해였던 것 같아요.
임윤찬: 칭찬할 것은 사실 없어요. 다만 이번 전국 공연 프로그램인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은 5월에 처음 악보를 봤는데, 다섯 달 동안 ‘리스트의 인생을 어떻게 잘 담을 수 있을까’ 매일 고민했어요. 결국 그 과정을 견뎌내고 연주를 마무리했고요. 리스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그런 안도감은 들어요.
한재민: 아니야. 칭찬할 만해! 저는 옆에서 봤잖아요. 근데 형이 그 기간 동안 진짜 노력한 게 보였고 ‘이렇게 음악을 해야 제대로 된 음악을 할 수 있구나’ 배웠어요. 형은 지금 형한테 칭찬을 안 하면 안 돼. 내가 칭찬해 줄게. 수고했어 올해!
마치 오랜 친구들과 떠드는 것처럼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두 사람의 끈끈한 유대가 부러워 첫 만남을 물어보니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의 실내악 수업에서 마음이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만약 음악 파트너로서 재민이가 여자였다면, 제가 좋아했을 거예요.”라고 나지막히 말하며 인터뷰를 끝낸 임윤찬과 폭소를 터뜨리는 한재민의 모습에 모두 웃음을 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