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상했던 시절은 우리를 고정시켰다. 물리적 움직임은 제한당했고 행동은 점점 작아지고 줄어들었다. 이 틈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움직임을 보였던 장르가 있다. 댄스 필름이다. 댄스 필름은 카메라 영상 기술과 춤의 움직임이 함께 어우러져 나온 새로운 예술 형식이다.1 무용과 필름은 모두 ‘움직임’을 활용한 장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무용이 신체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면 필름은 다양한 카메라 워크나 점프컷, 몽타주 등 여러 촬영 및 편집 방식 이라는2 또 다른 움직임을 파생해 내는 예술 형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용과 필름이 결합한다는 것은 곧 움직임과 움직임이 곱해지는 것과 같다. 움직임의 곱셈들로 말미암아 무용은 더 큰 역동성과 시공간의 확장을 실현해 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아르코 댄스 필름 A to Z>는 이러한 곱셈들의 향연이었다.
고블린 파티 <나는 도깨비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리만의 소동 x 초대받은 렌즈 = 고블린 파티 <나는 도깨비입니다>
고블린 파티의 <나는 도깨비입니다>는 도깨비 나라에서 벌어지는 작은 소동을 담고 있다. 팀명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은 자신을 도깨비라 칭한다. ‘비상한 재주로 사람을 홀리기도 하고’, ‘심술궂은 행동으로 사람을 놀래 주기도 하는’ 도깨비의 나라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이상하고 아름’답지만, ‘아무도 두드리지 않는’ 나라. 그렇게 자의인 듯 타의로 고립된 나라에 그들이 우리를 초대한다. 카메라는 고립된 도깨비 나라의 열린 문고리를 잡고 이들의 기이한 아름다움을 탐험한다.
영상 전반에 걸쳐 펼쳐지는 움직임은 잘 다듬어지고 제련된 움직임은 아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다소 다급하고 불안정해 보이기까지 한 신체의 흐름 사이로 이들의 기이한 아름다움은 분출된다. 이에 더해 카메라 워킹은 쉴 틈 없이 흔들리고, 편집은 신체를 확대하고 겹쳐지게 하고 화면의 색을 반전시키기도 하며 움직임들을 마구 왜곡하고 비틀어 댄다.
이러한 움직임의 틈바구니에서 천진한 목소리로 ‘우리는 멋진 몸매나 예쁜 얼굴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라는 외침이 울려 퍼진다. 이 외침이 다른 어느 외침보다도 선명하게 와닿는 건, 이것이 반복되어 등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부정문이 결코 자신에 대한 자조나 부정을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타인에 의해 ‘두드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길어지는 조금의 슬픔은 묻어 있을지 몰라도, 자신만의 개성을 인정하는 단단함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불완전함에서만 파생되는 고유한 모습을 사랑하며, 그 안에서 그들만의 내밀한 리듬감을 직조해 춤을 춘다.
누가 두드리지 않으면 어떠한가. 먼저 초대하면 될 것을. 그렇게 우리는 그들의 이상함에 매료되어 또 한 번의 초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도깨비 나라와의 아쉬운 작별을 고하게 된다.
아트프로젝트 보라 <초기화 된; 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분리된 개인 x 겹쳐지는 파편들 = 아트프로젝트 보라 <초기화 된; 몸>
아트프로젝트 보라의 <초기화 된; 몸>에선 8명의 무용수가 극장의 각기 다른 공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에 답을 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질문은 노출되지 않은 채 그들의 답만이 발화된다는 점이다. 더불어 그들의 답은 단순 발화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들의 답은 신체를 통해서도 수행되는데, 팔을 꺾고 몸을 뒤집고 발을 구르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을 목소리로도, 신체로도 점유한다.
각각 다른 공간에서 움직이는 신체들은 자신들의 공간에만 충실할 뿐, 다른 공간과 다른 신체에게로 나아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개인으로서 치열하고 격렬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각개 전투는 엉뚱한 방식을 통해 접점을 갖게 되는데, 바로 편집의 방식이다. 편집 과정에서 각각의 장면들은 만날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겹쳐진다. 개인의 목소리와 신체는 자신만의 리듬으로 흐르고 있었기에 이들의 겹쳐짐은 단순한 만남이 아닌 충돌이 된다. 충돌을 통해 이전까지 이루어지고 있던 개별 무용 장면은 더욱 분절되고 파편화된 채로 다가오며 이로써 이들이 얼마나 개별적인 ‘개인’이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신체는 너와 나의 구획기준으로서 가장 일차적인 단위다. 너와 나는 몸을 통해, 뼈와 살을 통해 구분된다. 이 작품은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면서도, 가상의 공간 안에서만 함께 할 수 있는 팬데믹 시대 우리가 겪고 있는 모순적 상황을 감각하게 한다.
모던테이블 <속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자연이라는 움직임 x 질주하는 렌즈 = 모던테이블 <속도>
모던테이블의 <속도>는 속도와 빠르기 그 자체에 관한 작품이다. 무용수는 영상의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혼자, 때로는 함께 격렬하고 빠른 움직임을 선보인다. 이들은 속도 그 자체가 되어 속도라는 개념을 신체로써 은유한다. 이에 빠른 박자감의 음악까지 더해지며 작품은 끊임없이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과 달리 자연 공간, 야외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두가지 층위를 만들어 내는데 하나는 움직임과 정지의 대비이며 또 하나는 계획될 수 없었던 우연한 움직임의 더해짐이다.이 작품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은 메타세콰이어 숲이다. 숲속에 자리 잡은 나무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고정되어 있어 그 앞에서 변화하는 몸짓의 속도감은 더더욱 부각된다. 깊은 뿌리를 내리고 고요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이 존재들은 사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출연진이다. 이들은 단순한 배경 요소 이상으로 빠른 것과 정지된 것 간의 대비를 만들어 내며 작품의 맥락을 심화시킨다. 나아가 동작을 재빠르게 쫓는 카메라와 긴박한 음악, 이러한 속도감을 모두 앞장서 끌고 가는 무용수의 신체뿐만 아니라 이곳엔 자연의 움직임이 있다. 바람이다. 숲의 바람과 만난 무용수의 머리카락, 백색의 옷자락이 또 하나의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바람의 움직임은 계산되지 않은, 계산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 우연한 모양의 공기를 만들어 내고 이 우연함의 층위는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 이렇게 각 요소의 속도들은 개별의 리듬을 품고 함께 켜켜이 쌓여가며 질주한다.
바리나모 <가무2>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애정 x 기록 = 바리나모 <가무2>
<가무2>는 앞서 보았던 아트프로젝트 보라의 <초기화된; 몸>과 같이 발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다만 <초기화된; 몸>이 각자의 정체성을 파편화된 방식으로 발화했다면 <가무2>는 춤과 음악, 움직임과 소리의 관계 및 표현을 탐구하며 연주자 타무라 료, 무용수 김바리, 무용수 주나모 각자의 가치관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형식의 댄스 필름이다.
앞서 다루었던 영상들이 신체 자체와 그 즉물적인 움직임으로 영상을 끌고 나갔다면 이 작품을 끌고 나가는 움직임은 애정이라는 감정이다. 춤에 대한 애정과 음악에 대한 애정이 이 필름을 움직인다. 이들에게는 춤을 출 때 바라는 것, 공연의 의미, 관객의 의미, 음악가/무용가로 산다는 것에 관한 질문이 주어지는데,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며 눈을 빛내는 그들에게선 음악과 무용이 만날 수 있는 이 시공간을 아끼는 마음이 역력하다. 수많은 반짝거리는 진실들을 속이지 않고, 그 자체로써, 그 흐름을 몸을 통해 형태로 빚어내고 싶다는 김바리와 춤을 잘 살기 위한 지도라고 정의하는 주나모, 그리고 삶에 있어 많은 시간을 음악 앞에서 썼다고 담담히 고백하는 타무라료. 질문과 답 형식의 발화가 하나의 움직임으로서 역동성을 담지한 채 다가오는 까닭은 바로 그 감정이 가진 에너지 때문이다.
이에 상응하듯 카메라가 이들을 따라가고 조명하는 방식도 추적이나 질주, 초대 등의 동적인 표현으로 서술되었던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잔잔한 기록의 방식이다. 특정 부분을 비틀고 왜곡하며 그 움직임을 확대해 내는 것이 아니라 기교없이 촬영된, 특별한 편집 기법도 사용하지 않은 담백한 기록이다. 그 꾸밈없고 열정 어린 고백들이 전달하는 파동은 화면 너머 관객에게 은은히 퍼져 나간다.
지난 2년, 우리는 정말 고정되어 있기만 했었던가. 곱셈의 수식으로 표현된 이 네 가지 움직임들은 우리가 사실은 원의 중심에 있었음을, 중심만을 고정한 채 누구보다 열심히 컴퍼스의 각도를 늘려 갔음을 상기 시키며 그 시간이 그려낸 커다란 원모양의 궤적을 보여준다. 정지해 있는 줄 알았지만, 우리의 반지름은 계속해서 그 길이를 늘려 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