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민

‘팬데믹 이후’가 쏘아 올린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루는 2021년 하반기의 비엔날레와 페스티벌을 감상해 보았다. 이 축제들은 미디어와 신체가 융합하고 충돌하며 만들어 가는 예술의 여러 모양들을 보게 해 주었다. 또한 기후 위기, SF, 뉴노멀, 도피주의 등 다방면의 키워드들이 얽혀 한눈에 확인하기 어려운 복잡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명 ‘위드 코로나’로 나아간다고 하는 지금이지만, 코로나가 바꾸어 놓았거나 눈에 띄게 가시화한 수많은 현상과 담론들을 바라보면 여전히 가쁜 숨을 내쉬게 되었다. 모든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연결 지점은 잦은 교차 충돌로 인해 울퉁불퉁함에 가까운 인상을 주었다.

무기력한 인터랙션: ‘미디어 전시’에서 신체가 소외될 때
아르코미술관의 융복합 예술 페스티벌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1는 인간, 기술, 환경이 서로 관계하는 방식을 살피며 가능한 미래의 시나리오들을 톺아본다. 페스티벌은 오프라인 전시와 ‘라이브 아트’ 프로그램, 그리고 온라인 전시와 아카이브로 구성되었다. 전시가 ‘횡단-신체성’이라는 이론적 용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도 오프라인 전시장에서 나의 신체와 몸짓은 거추장스럽게 느껴진 반면, 온라인 전시2는 차분히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괜찮은 경험으로 다가왔다. 이 또한 팬데믹 이후의 증상이었을까? 신체의 비활성화와 온라인 경험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많은 오프라인 전시가 특유의 시공간적 문법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 봐야 할 때라는 생각을 했다.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 오프라인 전시에서 필자가 경험한 신체의 무력함은 공연의 주체가 없었던 ‘라이브 아트’와 ‘인터랙티브 VR’ 작품을 감상할 때 두드러졌다. 아래에 서술될 경험은 개별 작품의 내용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뉴미디어’를 내세운 전시장의 환경과 매체 경험에 관한 이야기임을 밝혀 두고 싶다. 이런 경험은 다른 전시에서도 종종 느꼈던 것으로 분명히 작품과 관객인 내가 상호 작용을 하고 있음에도 나의 신체가 수동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에서의 ‘무기력한 인터랙션’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특히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기관 측의 통제가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신체의 무력함은 강화된다.

라이브 아트 프로그램 중 고병량&아토드의 <희생 없는 공존을 그리워하다: 파괴적 공생에 대한 가벼운 반성>은 피아노 연주를 매개로 기계와 인간이 교차하는 풍경을 만들어 냈다. 공간에 울려 퍼지는 음악은 컴퓨터가 기계 학습으로 만든 것이거나 작가가 손수 만든 것이었으며, 그것을 연주하는 주체는 로봇 손이거나 자동 연주 피아노이거나 혹은 스마트폰으로 원격 연주하는 관객의 손이었다. 관객은 QR 코드를 통해 웹 페이지에 접근하여 피아노를 원격으로 연주할 것을 권장받았다. 작은 스마트폰 위에서 불편하고 서투른 손가락의 움직임은 불청객 같은 소리를 내어 나의 존재를 민망한 방식으로 드러냈다. 그리 넓지 않은 공연장에서는 시스템 운영자들의 존재가 두드러져 보였고, 나는 그 ‘감시자들’을 의식하며 손가락을 몇 번 간신히 움직여 보다가 그곳을 빠져나왔다.

전시장에는 그 밖에도 관객의 인터랙션을 유도하는 여러 미디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아영의 <수리솔: POVCR>은 인터랙티브 VR 작품으로 헤드셋과 핸드 그립 컨트롤러를 통해 체험이 가능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양손에 쥐어진 컨트롤러는 ‘오작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사용이 통제되었다. 모든 감상은 미술관 직원과 그가 제공하는 기계에 나의 신체를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하는 것을 전제로 한 안내를 통해서만 헤드셋을 쓰고 벗을 수 있었다. 관객은 의자에 앉아 360도로 회전해 보거나 아무 기능 없는 무기력한 손을 들어 화면에 나타나게 하는 정도의 개입이 가능했다. 그래픽이 나를 대신해 이동하며 해저를 탐사하는 동안 인간 여성과 AI 여성의 대화가 교차하며 들려왔다. <수리솔>은 ‘거대 해조류 연료가 세계의 주 에너지원으로 쓰이게 된 세계’라는 독특한 미래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진행되는데, 해조류를 관리하기 위해 탐사선을 움직이는 일은 모두 AI에게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등장인물인 소하일라(헤드셋을 쓴 나)는 해저 탐사선의 오작동이 일어나는 순간 의지해 왔던 세계의 기반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와중에도 나는 헤드셋 밖의 시야에서 드문드문 확인되는 미술관의 바닥을 볼 수 있었다.

미술관의 바닥은 몰입을 위해 봐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으나, 아직 헤드셋이라는 매개체와 한 몸이 되지 못한 나의 눈은 자꾸만 그 바깥을 의식했다. 한편 센서 위에서 손을 움직여 데이터를 확대해 볼 수 있는 작업도 있었다. 그러나 센서와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손, 작품의 흐름을 끊어 놓는 손은 얼마나 불필요하게 느껴졌던가. 더 이상 신기하지 않지만 여전히 자연스럽지 않은 ‘뉴미디어’는 지금이 기술의 과도기임을 체감하게 했다. 매체의 가시화가 주는 피로함은 전시장의 크기에 비해 넘치게 느껴졌던 정보량과 맞물려 오프라인 경험의 당위성을 감소시켰다. 공간을 거의 빈틈없이 채운 작품들의 메시지는 거대한 정보의 바다를 기반으로 하는 인터넷 생활의 모습과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전시의 주제인 인간 신체와 비인간 자연을 가로지르는 ‘횡단-신체성’에 대해 사고하는 일은, ‘테크 박람회’를 연상시키는 지금의 방식보다는 스크리닝 행사나 웹 사이트 전시의 형식에 더 적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전시장의 QR 코드로 링크를 연결해 둔(현장에서는 미처 실행하지 못했던) <뉴보통 게임>3을 실행해 보았다. 이 게임은 룹앤테일, 우아름, 정화영, 최진훈의 일시적 팀 프로젝트인 <뉴보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20년 코로나 상황으로부터 출발해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미래 시나리오를 도출하고 그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가능성을 가늠해 보는 질문들로 이루어진다. 게임은 두 개의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선택은 잠시 보류할 수 있으나 언젠가는 다시 되돌아온다. 또한 하나의 선택은 다른 선택지에 대한 거부가 아닌 ‘좀 더 동의하거나 좀 더 반대하는’ 방향성일 뿐이며, 게임을 ‘리셋’하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 게임의 마지막 질문은 ‘뉴노멀은 기후 위기 극복이 목표 vs 뉴노멀은 다양한 가치의 공존이 목표’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둘 중 하나가 정답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며, 이는 팬데믹 이후 수면으로 올라온 두 가지 문제, 전 지구적 기후 위기와 취약 계층의 사회경제적 위기를 가리키는 지표로 다가온다. 첫 번째 문제는 ‘인류’ 전체가 무겁게 감당해야 할 주요 이슈로 떠오른 반면 두 번째 문제는 미래 시나리오가 하나의 인류가 아닌 개개인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다르게 펼쳐질 서사임을 시사한다.

나에게서 도피하여 타인의 몸짓을 보기
개인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팬데믹은 ‘모두에게 다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재택근무로 인한 안락하고 지루한 생활이거나 투자의 기회였다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직장을 잃고 집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였다. 이처럼 팬데믹은 자연적 재난인 동시에 사회적 격차를 강화하는 매개체였다.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하루하루 탈출한다》4는 이와 같은 사회정치적 문제들에 무게를 두고 있다. ‘탈출’은 이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을 대변하는 동시에 전시 전체를 가로지르는 키워드인 ‘도피주의’를 암시한다. 전시 서문은 도피주의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부정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도피주의를 포용하고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어떨까?”를 질문하며 이것이 어떠한 몸짓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는 도피란 ‘우회함으로써 근본적인 어떤 것에 접근하는’ 예술적 전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탈출한다》의 이러한 서술은 개별 작품들의 사회정치적 메시지에 집중하여 감상하도록 유도했다. 필자는 전체적인 전시 경험을 의식하기보다는 마음에 닿는 몇몇 작품들에 몰입하는 방식으로 이 전시를 봤다. 유독 한 작품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정신적 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도록 했다. 하오징반의 영상 작업 <나도 이해해...>에서 중국 출신의 작가는 베를린의 레지던시에 머물며 코로나19의 상황과 동양인에 대한 일상적 차별, 그리고 ‘흑인의 삶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이하 BLM)’ 운동을 마주하게 된다. 인종차별에 대한 경험과 분노의 감정을 공유하지만 BLM 운동에 대해서는 완전한 당사자가 아닌 감각으로, 지형적으로도 미국에서 떨어져 있는 베를린의 집회에 참여하며 연대하려는 시도를 이어간다. 제3자의 입장에서 BLM 운동의 그늘을 보기도 하는데, 분노로 점철된 미국에서의 폭력적 시위와 약탈 등의 사건이 그것이다. 그리고 하오징반은 SNS를 통해 떠돌아다니는 한 영상을 접하게 된다. 격한 분노를 분출하려는 자와 ‘더 나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만류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영상이었다.

분노하는 자는 45세 흑인, 만류하는 자는 30세 흑인이다. 그들 사이에 있는 16세 청소년을 매개로 어른들은 각자의 입장을 토로한다. 45세의 남자는 “어린 나이에도 자신이 싸워야 할 일에는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30세의 남자는 “똑같은 일이 10년 후에도 벌어질 것”이라며 “다음 세대가 할 일은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것”이고 “지금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소리친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가장 이성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가장 먼저 무너지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나와 다른 입장을 지닌 타인과 연결되려는 노력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타인과 연대한다는 것은 ‘피부에 닿는 온도의 감각’을 통해 가능한 일이며, 누군가가 경험해 온 숱한 일상과 감정의 깊은 곳에서 비롯하는 분노를 이해해야 하는 아주 어려운,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라는 점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나는 정말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 적이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미약한 고통 외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현실이 수면에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나에 대한 몰입에서 빠져나오는 것, 나에게서 도피하여 타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일의 출발점 이라면 예술이 그 길을 열어 줄수도 있지 않을까.

다른 층에서 폴린 부드리와 레나테 로렌츠의 비디오 설치 작업 <(No) Time>은 몸의 움직임을 매개로 소수자적인 시간 또는 퀴어한 시간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퍼포머 네 사람의 독특한 안무는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듯이 “극단적인 느림, 어긋난 동기화, 뒤떨어짐, 중단 또는 고요”5를 통해 ‘폭력적인 정상화’를 넘어서려는 몸짓으로 자리한다. 영상 속에서는 자동문이 열리고 닫히면서 퍼포먼스의 시작과 끝, 중간의 뒤섞임을 만들어 낸다. 한편 영상 밖에 설치된 블라인드의 간헐적인 움직임은 실제 공간을 열고 닫으면서 스크린을 구획하고 전환하며, 때때로 블라인드 너머의 신체가 분절되어 보이도록 만든다. 영상 속과 영상 밖을 가로지르는 이중의 ‘문’은 안과 밖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 문 너머로 관객을 초청하는 듯하다. 이들이 꿈꾸듯 춤은, 몸짓이라는 언어는 다른 시공간을 횡단하며 ‘정상성 너머’의 타인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인도할 수 있을까. 팬데믹은 몸짓들 사이의 직접적 만남을 막았지만 스크린을 통한 공유는 강화했으며, 몸에 대한 담론들을 오히려 더욱 활성화시켰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

인간의 신체와 ‘신체 기계’ 사이를 교차하는 정금형의 작업은 이 시기에 접합하여 다양한 생각과 움직임으로 뻗어 나간다. 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전시된 설치 작업 <언더 컨스트럭션>과 《옵/신 페스티벌》6에서 선보인 공연 <만들기 쇼>는 가상의 신체를 만드는 일과 그것을 만드는 제작자 자신의 신체를 드러내는 일에 연관되어 있다. 전자는 신체와 유사한 모양을 한 사물처럼 보인다. 분해된 채로 각기 조명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는 ‘로봇 팔’들은 인간의 골격을 재연한 것으로 어느 몸체에 부착되었을 때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한다. 후자의 공연은 로봇 제작 과정을 공연화한 것으로 이미 한번 만들어졌던 모델을 관객 앞에서 다시 만드는 쇼다. 무대에서 유사 공학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작가는, “차가운 도구에 지나지 않던 말없는 부품들”이 점차 뼈와 근육을 이루고 움직임을 갖게 될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낸다.7 신체 기계가 움직이는 과정은 인간과 기술, 환경의 관계를 물질 사이의 유동성으로 재정립하는 ‘횡단-신체성’의 개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옵/신 페스티벌》은 서울의 여섯 장소(문래예술공장, 문화비축기지, 대학로예술극장 등)를 오가며 공연, 영화, 전시, 대화를 넘나드는 동시대 예술 축제로 관람 가능 시기와 성격이 다른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하나의 동일한 체험 이라기보다는 ‘장(scene)으로부터 벗어나(ob)’ 분절된 시간과 장소에서의 경험들을 선사할 것이다. 이 축제는 “예술이 약속했던 변화의 가능성이 무력해지고 있는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할 수 있는 일”8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하루하루 탈출한다》에서 ‘도피’를 내세우며 예술의 의미를 도출했던 것과도 맞닿는다.

아마 이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답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예술이 수행해야 할 단 하나의 책무에 관한 선언문은 유효하지 않겠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각자의 예술을 포기하지 않아 다수의 선언들이 서로 연대하고 대립하며 겹쳐질 것이다. ‘매끄러움’9으로 위장된 현실 너머 모두에게 다른 방식으로 감각되는 다면적인 현재를 드러내고,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들이 쌓여 ‘울퉁불퉁한’ 지형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김명진
1 2021.09.17.~12.12.
2 https://nothingmakesitself.art/ 에서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 온라인 전시를 열람할 수 있다.
3 http://newbotong.com/
4 2021.09.08.~11.21.
5 작가 폴린 부드리, 레나테 로렌츠가 2021년 9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관객을 위하여 작성한 메모에서 발췌한 표현
6 2021.10.29.~12.05.
7 옵/신 페스티벌 인스타그램 계정 참조. https:// www.instagram.com/p/CV-F_8apD5-/
8 옵/신 페스티벌 소개 참조. http://obscenefestival.com/
9 ‘매끄러움’이라는 표현은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문학과지성사, 2016)을 참조했다. 이 책에서 아름다움과 구별되는 매끄러움의 미학은 부정성이 제거된 밀착성과 무저항성을 특징으로 하며, 표면 외에 해석하거나 생각할 여지가 없이 즉각적 만족을 주고 빠른 소통을 촉진하는 예술과 인터페이스를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