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민

돌아온 탕자
익숙한 관용 표현이자 비유, 교훈으로 받아들여지는 ‘돌아온 탕자(탕아)’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서 기원한다.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화가 렘브란트는 빛의 화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붓놀림으로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3~1665)를 남겼다. 무릎 꿇은 탕자.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 회개와 용서라는 숭고한 장면. <돌아온 탕자>는 헨리 나우웬과 같은 신학자의 명시적인 해석1 외에도, 그 오묘한 빛과 그림자의 활용, 오브제, 그림 속 제3자 등으로 불가사의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탕자>의 들끓는 동력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대, 혈연, 연속성, ‘돌아온 탕자’다. 엄격하고도 따스한 신, 아버지, 혹은 대타자의 품. 그 품에 안기면 광야에서의 모든 방종은 종식되고 방황은 끝난다. 오로지 나와 아버지. 1대1 관계로 모든 것을 청산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 고전적 결속이 유효하던 시대. 참으로 안온한 풍경이다.

꽤나 엄숙하게 입을 뗐다만 나는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의 구글 뷰로 이 작품을 이리저리 기울여 본 게 전부다. 구글 아트 앤 컬처(Arts & Culture)의 ‘스트리트 뷰로 보기’ 기능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에르미타주 미술관(The state Hermitage Museum)의 벽면을 2021년 대한민국 침대 맡으로 훌쩍 가져다준다. 까칠해 보이는 유화의 질감은 터치 스크린에 갇힌다. 렘브란트의 원화와 구글 뷰. 둘은 같은 그림이지만, 구글 뷰에서 탕자의 귀환은 그리 엄숙하거나 절절해 보이지 않는 것도 같다. 자연광이라는 변수가 끼어든다. 비대칭적이고 비스듬한 관람 각도로 아버지와 아들의 수직적 구도는 희석되고 결속은 희미해진다. 탕자는 방탕한 삶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을까? 그런데 밖에서 뭐 하고 돌아다녔을까? 작품의 아우라를 의심하는 즐거운 의구심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이제 17세기 렘브란트의 원화에서 2021년의 한국의 구글 뷰로 훌쩍 건너오면서 이 탕자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가설을 세워 보자. 때마침 귀에는 반복 재생 중인 SM 아이돌 에스파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넌 광야를 떠돌고 있어 아야야야야야야....”

‘유산 없음’이라는 유산
우리가 잠들지 못하고 K-콘텐츠의 링크(link)를 떠도는 상태를 광야를 떠도는 것과 유비해 보자. 당신은 거기서 역시나 광야를 떠도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사람들을 마주쳤을 법하다. 당신이 K-유튜브를 떠도는 유목민이라면 <고등래퍼2>의 우승자, “안녕 날 소개하지 이름은 김하온 직업은 트래블러(traveler)”라는 나그네를 마주쳤을 법도 하다. 이것은 어떤 이변이었다. 언제나 고독하고, 화나 있고, 헤이터(hater)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힙합 아니던가. 그런데 트래블러라니. 김하온은 ‘취미는 Meditation(명상), 독서, 영화 시청’이라는 가사답게 끝까지 여유로운 자세로 우승을 가져갔다. 남다른 철학. 속세에서 벗어난 듯한 아우라. 갑자기 나타난 천재. 이 소년의 유산 없음. 이 유산 없음이 곧 유산이 되어 학생 래퍼들 사이 고등학교 ‘자퇴 swag’이 범람하고 그것이 명예로운 힙합의 유산이 되었을 때, 다음 시즌의 우승을 가져간 건 목끝까지 교복 넥타이를 맨, 농담 섞인 ‘넌 힙합이 아니네’ 소리 듣던 이영지였다.

또 다른 이변. 나는 이영지의 우승 무대 ‘Go High’를 보며 1539가 어째서 이에 열광하는지 뒤늦게 깨달은 것도 같다. “바래 모두 내가 정상에 서길 그 바람대로 다 이룰 거고 to the next level”.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단 한번의 무대. 자수성가 철학. “잊지 않아 또 결국엔 믿게 됐어 나 자신을” 자기 확신과 증명. “The Q, CODE KUNST2 And ma fam, ma friends. 돌려줄게 내가 받은 만큼 전부”. 내가 선택한, 리스펙(Respect)할 수 있는 스승. 이 지점에서 겹쳐지는 2020년대 동시대가 열광한 K-콘텐츠, <고등래퍼>, <쇼미더머니>,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철학이 있달까. 스승과 제자가 한데 섞여 치열하게 승부한다. 전설적인 스승이 기꺼이 왕좌에서 내려와 다음 참가자가 된다. 어제의 스승이 내일의 트래블러다. 굳건한 스승, 굳건한 아버지는 없다. 유산 없는 땅. 유산 없음이라는 유산. 거기서 시작되는 K-콘텐츠는 일견 새로운 계보를 쓴다.

New라는 곤경에서 벗어나기
대담하게 던진 새로운 계보라는 표현이 석연치 않다. 엄밀한 잣대를 들이민다면 ‘새로운’도, ‘계보’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새로운’부터. 가령 누가 뉴 시네마와 뉴 웨이브의 차이를 묻는다면 나는 곤란해진다. 영화사에서 국가별, 세대별, 사조별로 끊임없이 재호명되는 New라는 수식은 새로움을 표현할 말이 새로움뿐인, 현상이 개념을 압도하는 어떤 곤경인 셈이다. 본래 뉴 웨이브의 정치적 아젠다는 어떤 세대가 자기 세대를 다음 것으로 규정하고, 이전 세대를 비판함으로써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니던가. 눈앞에 나타난 새로움을 명명하고 싶은 열망, 스승을 거스르는 제자, 부모를 배반하는 자식. 계보를 부수고 싶은 욕망이 출현한다. 그리하여 계보는 부서지는 동시에 다시 쓰여야 하는 딜레마에, 즉, 탈-계보는 (이전) 계보를 부정하는 동시에 (새로운) 계보 쓰기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난관에 봉착한다. 바로 이 순간이 2020년대 K-콘텐츠가 처한 New라는 곤경이라면, 다만 우리는 숨을 죽이고 이 파편들을 타오르는 불씨로 바라보자. 벤야민의 말을 조금 비틀어 보자면 불씨는 ‘불꽃’의 단서이지만 아직 ‘재’라는 유산(주해)을 남기지 않은, 비평가에게 가장 흥미로운 순간이다.

신출귀몰
2021년 한국에서 신출귀몰한 영화들을 보았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화제작 <불도저에 탄 소녀>가 아버지의 물리적인 죽음에서 출발하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엄마 말 잘 듣는 K-입시생 예서였던 배우 김혜윤은 한쪽 팔이 문신으로 뒤덮인 생경한 얼굴, 혜영으로 스크린을 채운다. 혜영은 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동생을 돌봐야 할 가장, 아빠의 억울함을 밝혀야 할 탐문자, 세상의 추악함을 이겨 내야 할 투쟁가3가 된다. 그 어떤 어른의 유산도 부재한 세계에서 혜영이 불도저의 운전대를 쥐기까지, 일렁이는 생의 집념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통념을 어기고 살아남는 딸들의 영화다. 올여름 제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단편의 물살도 빼놓을 수 없겠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감독들이 메가폰을 쥔, 정혜연 감독의 <귀신친구>와 백시원 감독의 <젖꼭지 3차 대전>은 올해 관객의 반응이 가장 궁금한 영화들이었다. 그간 한국 영화 스크린에 여성의 자위 기구와 노브라가 부상한 적 있던가. 젠더 규범을 엄숙하게 비판하기보다 여성 당사자의 눈과 입으로 유희하는 호흡이 즐겁다. 올가을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기꺼웠다. 영상원 출신 남궁선 감독의 <십개월의 미래>가 각종 영화제의 초청에 이어 극장 개봉했고,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가 20주년 기념 재개봉했다. 여성의 갑작스러운 임신을 담은 <십개월의 미래>와 IMF의 파장 당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흩어진 여고 친구들의 이십대를 응시하는 <고양이를 부탁해>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 되기를 택하고, 아버지 없는 땅으로 떠나는 여성들을 보여 주었다. 오늘날 정착 할 땅이 없는 모든 밀레니얼 세대에게, 이 청춘의 미시사는 여전히 유효하다.

종횡무진
꿈과 현실, 장르와 독창성, 그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이 종횡무진한 해이기도 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상원 감독들의 <뒤틀린 집>, <요정>, <세이레>는 불가사의한 상상력으로 주목받았다. 박강 감독의 <세이레>는 아기의 탄생과 장례에 얽힌 한국의 미신을 기이하게 감각시키며 그야말로 ‘뉴 커런츠4’ 섹션의 저력을 보여 주었다. 다큐멘터리 부문에서도 New한 시도가 돋보였다. 오세연 감독의 <성덕>은 범죄자가 되어 버린 오빠(스타)의 팬이라는 당사자성에서 출발하여 나와 같은 이들의 ‘탈덕’을 쫓는다. 내 안의 비밀스러운 불씨가 사그라드는, 지극히 사적인 ‘탈덕’의 역사를 그 누가 기록했던가. 영화제 현장을 넘어 SNS까지 <성덕>을 향한 성원은 단절된 개인들을 팬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결집해 낸 결과다. 또 하나의 전례 없고 계보 없던 파편적 공동체의 역사가 쓰이기 시작한다.

올 한 해 한국 독립 영화의 필드에서 일궈진 성과를 하나의 지면에 아우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도무지 낡지를 않는 영화라는 태생, 신진 감독들의 힘이 상생하여 만들어 내는 신선함에 K-콘텐츠의 최전선으로서 다시금 영화를 바라보게 만든다.

‘아비’ 없는 <오징어 게임>
좀 더 판을 넓혀 볼까. 올해 K-콘텐츠의 가장 글로벌한 흥행 <오징어게임>을 빼놓을 수 없겠다. ○△□는 일종의 코드가 되었고 깐부 패러디가 범람했다. 극 중 알리 역을 맡은 연극원 출신 배우 아누팜 트리파티(Anupam Tripathi)가 <나 혼자 산다>, <라디오스타>에 출연하며 <오징어 게임>의 전국민적 인기를 가늠케 했다. 인기만큼 담론도 쏟아졌다. <오징어 게임>의 상업적 성공,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글로벌한 소구력, 일본 서브컬쳐 데스게임의 레퍼런스, K-정서와 장르의 혼종적 정체성, 독특한 미술과 미장센 등 열갈래, 스무갈래로 비평 할 수 있는<오징어게임>을 하나의 축으로 꿰뚫어 보려 한다. 첫 장의 질문, 돌아오지 않는 탕자라는 가설이다.

성기훈. 47세. 신용불량자. 이혼. 열 살짜리 딸아이. 양육권 없음. 아버지의 덕을 봤을 리가 만무한, 허름한 집안은 성기훈의 역사를 압축한다. 그렇다. 성기훈은 아버지가 없다. 더 정확히는,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노모의 희생이나 현현하게 썩어 들어가는 가난과 병증의 신체에 비해 그의 아버지는 소거되어 있다. 아버지가 없는 그는 아버지가 되어야 하나 실패한 아버지다. 결여. 의무. 박탈. 삼진 아웃. 합법적인 노동이 아닌 도박으로 돈을 만져 볼 궁리뿐이라는 점에서 대타자마저 그를 버렸다. 신자유주의 경제 안으로 포섭된 법과 사회라는 대타자는 반쪽짜리로 찢겨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어떠한 아버지의 유산도 없이 독자 생존해야 하는 성기훈과 그의 처지가 패러디적으로 전치된 ‘무한경쟁’ 속 ‘게임말’ <오징어 게임>에서 아버지가 불가결하게 암시된다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에는 아버지와 상속이라는 알레고리가 있다. 이 유산 없는 세계가 상속으로 움직인다니. 어떻게?

K-아버지에서 길을 잃은 자들5
내내 거슬리는 점. 불효의 아이콘에 ‘아비’도 없는 기훈이 놀랍도록 기특한 효를 실천한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능청스럽게 정을 붙이는 그의 성격은 차치하고도, 그와 오일남 할아버지의 사이는 각별해 보인다. 의혹이 확신으로 굳어진 구슬치기 편을 떠올려 보라. 이날의 아침. 바지에 용변을 실수한 일남. 그에게 체육복 상의를 벗어 둘러 주는 기훈. 자네만 겉옷이 없으면 무시당할 거라며 자신의 체육복 상의를 내어주는 일남. 이 따스한 교환. 바로 여기서 구슬치기 게임이 시작된다.

이 구슬치기 세트장의 쇼트는 일견 이상하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마을 골목. 치매로 오락가락하는 일남의 증언. 거짓말로 일남을 속여 넘기는 기훈. 그리고 그것을 알아챈 일남. 바로 이때, 그 둘이 마주보고 있는 롱숏. 따사로이 내리쬐는인공조명. 다정하게 기훈을 꾸짖는 일남. “그럼 자네가, 날 속인건 말이 되고?” 이 쇼트는 명백히 아들에게 교훈을 주는 아버지, 즉 고전적인 부자의 멜로드라마로 연출되어 있다. 이 짧은 상속의 순간을 남기고 기훈의 유사-아버지였던 일남은 곧장 퇴장한다.

<오징어 게임>에서 아버지의 유산, 일남의 상속은 기훈을 생존으로 이끈 핵심 장치였지만 마치 부재한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암시는 소거되고, 기훈은 현실의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퇴장한 아버지의 암시가 다시 출몰하는 때가 있다. 기훈이 미용실에서 이발을 하고 나오는 장면과 곧이어 보육원에 있는 새벽의 동생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이 몽타주를 형성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아버지가 출몰한다. 미용실에 들어가 별생각 없이 눈앞의 모델 사진을 가리킨 결과로 얻어진 기훈의 새빨갛고 촌스러운 염색 머리. 그리고 이어지는 보육원 방문 장면. 확인 혹은 증명의 순간. “네가 철이구나.”

거친 가설. 기훈(이정재)의 새빨간 머리에서 2006년 <괴물>, 강두(송강호)의 샛노란 더벅머리로 점프가 이루어진다. 막바지에 급격하게 과열된 새벽과 기훈의 유사-부녀 멜로드라마가 복기하는 부분이 분명해진다. 그건 실패한 아버지의 페르소나로 공모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하지만 아버지가 되지 못한, 어쨌거나 아버지라는 연속성이다. 이상한 확신이 엄습한다. 새벽은 <괴물>의 현서, 딸을 계승하고 새벽의 동생은 <괴물>의 양아들을 계승할 것이다. 기훈은 혈연적 아버지 되기에 실패하지만 상징적 아버지가 될 것이다. 기훈은 많은 돈을 가지지만 새벽의 동생을 입양해 키우며 소박한 일상을 영위할 것이다. 이는 K-아버지로부터 길을 잃은 자들, 그러나 이를 다시 획득해야 하는 이들에게 예정된 운명과도 같다.

탕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오징어 게임>의 결말이 이상한 희열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K-아버지 법칙, 그러니까 K-아비정전을 보기 좋게 함정에 빠트리는 데 있다. 기훈은 양아들을 입양 하지도, 친딸을 만나러 가지도 않는다. 아버지의 혈연도 상속도 끊어진다. 그는 또 한 번 아버지 되기에 실패한다. 아니, 이제는 관심도 없다. 작위적일 정도로 진지한 엔딩을 떠올려 보자. “(딸에게 가는) 그 비행기를 타. 그게 당신한테 좋을 거야.”
이건 기훈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를 넘어선 드라마의 메타 고백이다. 당신에겐 ‘아버지’라는 자리 외엔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당신은 많은 돈을 가지고 그것을 당신의 유산으로 삼아 성실하게 상속하라고. 그야, 이 게임에 혁명은 프로그래밍되어 있지 않거든.

그리하여 관객은 <오징어 게임>의 다음 장면을 짐작할 수 없다. 아버지의 유산과 상속의 법칙이 끊어지면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K-아버지에서 길을 잃은 자들, K-콘텐츠에서 길을 잃은 우리는 어디서 와 어디로 가야 하는가.

K-콘텐츠의 방랑자들, 유산 없는 땅에서 출발한 신출귀몰 · 종횡무진하는 한국 영화의 물결, <오징어 게임>의 다음 스테이지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이전 것과 상생하고 때론 뒤엎으며 다음으로 나아갈 시동을 걸었다. 재를 남기기엔 미약한 불씨가 타오른다. 광야는 춥고 배고프기에 우리는 간혹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모든 방종과 방황이 종식되던 아버지의 따스한 품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광야에서 살아남은 자식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편이 훨씬 재미있으니.

박솔빈
1 “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귀향’ 비유를 고스란히 화폭에 옮긴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헨리 나우웬은 작은아들의 방탕한 삶과 귀환, 큰아들의 깊은 상실감과 분노,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을 깊이 파고든다.” 『탕자의 귀향』, yes24 책 소개.
2 The Quiett(더 콰이엇), CODE KUNST(코드 쿤스트)는 국내 힙합 래퍼로 <고등래퍼 3>에서 이영지의 멘토이자 프로듀서였다.
3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영화 줄거리 참조.
4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램 섹션 ‘아시아 영화의 미래를 이끌 신인 감독들의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장편 경쟁 부문’,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5 한국영상자료원 기획 칼럼 ‘한국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에서 착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