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烈士)의 아우라를 떼고 서슴없이 ‘태일아’ 하고 불러 보는 영화다. 12월 1일 개봉한 홍준표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주인공 캐릭터들은 참 사랑스럽고 초롱초롱하게 그려졌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흑백의 전태일은 만화책 <태일이>에서 새벽 어스름 속의 태일이였다가, 다시 홍준표 감독의 밝은 빛에 둘러싸인 애니메이션 <태일이>로 우리에게 왔다. 따뜻한 총천연색이다.

에너지 같은 불, 감독 홍준표의 전태일
“처음에는 ‘아 전태일 열사 이야기구나’ 하고 영화를 보겠지만 어느 순간 열사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사라졌으면 했어요. 물론 전태일이라는 사람이 헌신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희생이 가능했다고 생각 할 수도 있죠. 근데 깊게 들어가 보면 그냥 평범한 청년이었을 뿐이에요.” 2017년 홍준표 감독이 명필름으로부터 <태일이> 연출 제안을 받은 후 태일이의 초기 캐릭터 디자인은 감독의 생각대로 좀 더 ‘흔히 주변에 있을 것 같은 청년의 이미지’로 수정되었다. “그런 후에 마지막 분신 장면이 되어서야 ‘아 맞아 이거 전태일 열사 이야기였지’ 하는 느낌으로 다시 한 번 다가왔으면 했죠.”

“분신 장면의 연출은 상당히 고민이 많았어요. 분신 이미지를 아예 배제할까도 생각을 했어요. 전태일과 근로기준법, 분신은 항상 따라오는 키워드예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처음엔 과감히 생략해 보았다. 임팩트가 약해서 다시 본격적으로 연출해 보기도 했다. 그건 또 너무 과한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는 건 슬픈 일이고 이미 영화를 통해 보았는데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직접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건 분신 장면 자체보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태일이를 친구처럼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게 핵심이었죠.”

“분신 장면도 몸에 불이 붙어서 탄다는 느낌보다 불같은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는 느낌으로 표현했습니다. 마치 에너지가 사악 휘감는 느낌이 큰 것 같아요.” 카메라는 태일이를 클로즈업하지 않고 주변 인물들의 얼굴을 공들여 비춘다. 그 이후 카메라는 서울의 전경이 보일 만큼 멀리 솟아오른다. “우리는 태일이가 분신해서 희생했다는 부분에 많이 집중하는데 저는 그보다는 가까운 사람들이 상당히 놀라고 충격받고 슬퍼하는 모습을 더 보여줬습니다. 카메라가 멀리 빠진 것도 그의 에너지가 확산된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였어요. 한 사람의 희생은 굉장히 큰데 전체적으로 봤을때는 아주 작은 불씨로 보이는 거죠. 그것이 이후에는 폭발적으로 평화시장, 동대문, 우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느낌으로, 따듯한 햇살이 비치면서 마무리가 됩니다.”

그가<태일이>에서 보여준 다양한 시도 중 하나는 카메라 사용이다. 애니메이션이지만 역설적으로 영화 촬영의 느낌을 냈다. “보통 영화 촬영때는 카메라 트랙의 존재를 최대한 감추는 방식으로 무빙을 하잖아요. 근데 오히려 전 반대로 봤어요. 애니메이션에 어차피 카메라는 없어요. 그냥 그림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카메라가 있는 것처럼 만들면 사람들이 ‘실제 공간 안에 내가 있구나’ 라는 느낌을 받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카메라를 흔들어 줄 때도 있었고 덜컥이게 할 때도 있었고요.” 좁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걸 관객이 느끼도록 일부러 물건이 시야를 가리도록 할 때도 있었다. “따듯함뿐만 아니라 괴로움, 답답함도 함께 느끼는 거죠. 공간의 분위기 또한 하나의 캐릭터로 작용하는 거거든요.”

감독이 인물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을까. 평소 그의 성격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지 물었다. “희생정신이나 열사가 가질 만한 어떤 영웅적인 행동력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이해하기로는 전태일이라는 인물은 상식이 통하는 것을 원했던 것 같아요. ‘분명히 근로기준법이 있는데, 왜 안 지켜지지? 이것만 지키면 될 것 같은데’처럼. 저는 상식적인 것은 웬만하면 지키는 편이에요. 기본적으로 무단횡단이나 신호위반 같은거 안 하고. 고리타분할 수 있지만 그래야 질서가 유지되고 서로 아름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요일마다>(2016) ©스튜디오 루머

루머(Roomer), 우리끼리 모여 보자
‘상식을 지키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같이 작업하는 애니메이터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작업하다 보니까 이걸 다 지키고 작업을 해보고 싶었고, 결과적으로 다 지켰습니다.” 대신 감독은 밤을 많이 샜다. “옛날에는 밑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고 위쪽으로 경제적인 이득이 올라갔잖아요. 이것만 역전시켰더니 뭐, 되더라고요.”

홍준표 감독의 명함에는 ‘STUDIO ROOMER(스튜디오 루머)’가 적혀 있다. 루머(Roomer)는 ‘셋방살이하는 사람’이라는 뜻. 졸업 후 동기 두명과 머리를 맞대고 지은 이름이다. “처음엔 가볍게 시작했던 것 같아요. 사업의 느낌보다는 그냥 ‘우리끼리 모일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졸업해서도 같이 재미있는 작업을 이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2014년에 외대 후문 근처에 사무실을 얻었어요. 반지하였는데 같이 작업하고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좀 들어오면서 개인 사업자를 내고요.” 2년 정도 함께 생활하던 동기들은 저마다의 창의적인 길을 찾아 흩어졌다. 혼자 남은 홍 감독은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로 발전시켜 볼 테니 기대해 달라”는 마음을 먹었고 지금은 성산동 부근에서 10명 내외의 직원들과 함께 일한다.

알려진 대로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 규모는 타 장르에 비해 열악한 편이다. “작은 스튜디오들 같은 경우에 각자의 아이덴티티가 있거든요. 아트웍(artwork)이 있고 필살기들이 있는데 아직은 그걸 발휘 할 수 있는 시장이 좀 제한적인 것 같아요.” 영화진흥위원회의 「2021년도판 한국영화연감」에 따르면 2020년 전체 개봉 영화 1,692편 중 애니메이션은 63편을 차지한다. 이 중에서도 한국 애니메이션은 단 6편. 관객 수로 따지면 한국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관객은 0.47%. 근 10년간 이 수치가 1%를 넘긴 때는 2011년, 2018년, 2019년 세 번뿐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2011년 관객 수 220만을 넘겼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은 국산 애니메이션 최고 기록이다. 아직은 작은 시장인 것이다.

스튜디오 루머의 대표이기도 한 그가 ‘지속가능성’을 말할 때 애초에 마음속에 뜨거운 도전을 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11월 <태일이> 시사회에서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님들을 만났을 때 튀어나온 첫마디가 그간 품어온 소망이었다. “제가 길을 마련할 수 있는 입장이 되면 좋겠다고, 그래서 영화사와도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고, 작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도 큰 영화사와 협력해서 큰 극장에서 작품을 상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랬더니 고맙다며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태일이>(2021) ©명필름

애니메이션이 주는 자유와 희열
그는 영상원에서 벌써 4년째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가 강의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실습>은 그가 1학년 때 입학하여 디지털 작업을 처음 배웠던 바로 그 수업이기도 하다. “1학년때 입학해서 애니메이션 작업 툴을 배우면서 디지털 작업이라는 걸 알게 됐죠. 이종혁 교수님이 수업하실 때 들었는데 그때 배웠던 밑천으로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교수님 작업 중에 영화 <와니와 준하>에 짧게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있어요. 두 배우가 수채화로 변하면서 어른이 되는 시퀀스가 있는데 디지털로 수채화 느낌을 정말 예쁘고 따듯하게 표현을 했어요. ‘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면서 그때 봤던 교수님의 실제 작업물과 뒷이야기가 깊은 인상으로 남았죠.”

홍 감독은 유치원 때부터 스케치북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대학에 와서야 애니메이션 만드는 법을 처음 배웠다고 한다. 예고가 아니라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다. “반에 꼭 한 명씩 있는 그림 잘 그리는 애였거든요. 맨날 교과서나 연습장에 낙서하고. 그림 그리면 친구들이 돌려 보고. 제가 10반이라면 어느 순간 노트가 2반까지 가 있어서 회수하러 가고 그랬어요.”

애니메이션의 어떤 점에 끌렸을까. “자유로운 것 같아요. 표현 할 수 있는 공간, 아트웍, 빛도 자유롭고요. 특히 제가 디자인한 캐릭터가 움직이고 있을 때 상당한 희열이 있어요. 또 애니메이션은 동시 녹음이라는 게 없잖아요. 백 퍼센트 후시 녹음이에요.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창작의 아이디어가 들어갈 수 도 있더라고요. 그리고 화면에 어떤 오브젝트가 있을때 우연히 카메라에 찍혀서 들어간 게 없어요. ‘그렸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거든요. 그런 부분도 다 컨트롤해야 되는 게 까다롭긴 하지만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그의 졸업 작품 <바람을 가르는>은 2013년 제9회 인디애니페스트에서 새벽비행상을 수상했다. 만화가가 되려는 청년과 디자인 회사를 다니는 청년의 갈등을 오토바이 사고 이후 펼쳐지는 슬로우모션과 주마등 형식으로 풀어낸 단편이다. “언제까지 꿈을 접고 돈만 벌 순 없는 거잖아.” 애니메이션 속 인물의 대사는 졸업 이후 한동안 감독 자신의 형편을 표현하는 것 같다. 졸업 후 꽤 오랜 기간 의뢰 받은 콘텐츠 위주의 작업을 하며 ‘내 것을 하고 싶다’는 갈증이 누적되고 있었다. 그러던 2016년 봄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관하는 사업에 “내 맘대로 오랜만에 하고 싶은거 작업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신청했다. 약 8개월의 단비 같았던 창작의 시간. 혼자 웹 애니메이션 <요일마다>를 만들었다. 초저녁 비 내리는 골목길 푸드 트럭의 조명을 켠 사장은 단무지와 채소를 썰고 달걀을 부치며 오늘의 메뉴 멸치국수를 준비한다. 보글보글보글... 억눌린 창작열로 끓여낸 육수의 깊은 맛. “작업 분량이나 퀄리티를 적정 수준에서 맞춰야 되는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싶어서”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탓에 5화 기획이 2화로 줄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곧 첫 장편 작업으로 이어진다.

“다행이라면 어쨌든 결정적으로 <요일마다>를 보시고 <태일이> 제작하지 않을래? 하고 연락이 왔다는 거예요. 난관은 많았지만 주변에 같이 작업하는 대단한 아티스트분들이 힘을 합치니까 해결되는 지점들이 있었죠. 정말 당연한 것이지만 작품이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라는 것도 몸소 느꼈습니다.” 기술 시사회 때 처음으로 엔딩 크레딧에 가득 적힌 후원자 명단을 보면서 압도 되기도했다. “후원을 해준 분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때 처음 본거였거든요. 진짜 이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도와줬구나, 응원하고 있구나 체감하니까 되게 벅찼습니다.”

하루하루 쌓아간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의 일부를 충당하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개봉이 밀리면서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제가 생각보다 멘탈이 강한가 봐요. 힘들긴 하지만 불안에 사로잡혀서 ‘멘탈이 털리는’ 건 아니라서. 그냥 한숨 자고 일어나면 바로 회복하는 것 같아요. <태일이> 개봉이 밀렸지만 창작자로서 지지부진하다는 느낌이 없었던 건, 밖에서 보는 것과 다르게 안에서는 작업을 하루하루 쌓아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을 들여서 작업했다는 느낌이에요.”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관객으로 뽑은 이는 부산국제영화제 GV에서 만난 어머니뻘 되는 관객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청년 세대들이 여전히 힘들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하시면서 살짝 울먹이셨는데, 별말씀 안 하셨지만 되게 와닿았습니다. 전태일이 살던 시대가 있었고 그 다음 세대가 또 그다음 세대의 청년들을 걱정하는 흐름이 이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의 다음 계획을 물었다. "<태일이>를 하면서 서울이 상당히 매력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음 작품을 하게 된다면 시대가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국내의 매력적인 장소들을 계속 등장시키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서울이 또 무대가 되지 않을까요?"

글 김주은 사진 박정우 영상 최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