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주의자들》 전시 전경 ©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우리는 멀어지는 것을 보고 충돌한다고 하지 않는다. 충돌하는 일은 서로 가까워지는 일이다. 설사 그 충돌의 반동으로 두 물체 사이에 거리가 조금 생긴다고 할지라도, 충돌의 순간은 거리의 감소를 불러온다. 우리는 현재 지각변동의 시기에 살고 있다. 생태계라는 판과 인류라는 판은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리고 이 충돌로 말미암아 두 판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이러한 충돌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는 인류세로 범주화되어 불린다. 인류세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인간과 자연환경 사이의 관계에 있어 보다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시대를 의미한다.1 인류세 담론들은 환경오염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다른 어떤 종도 아닌 인간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2 생태계의 모든 구성원과의 공생(共生)을 주장한다. 인간만을 비추던 스포트라이트는 기존의 시야에서는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한 구성원들에게로 그 범위를 넓혔다. 더불어 현재는 이러한 조명의 초기 단계이기에 인간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제외한 구성원들에게 조금 더 초점을 맞춘 논의들이 진행되는 듯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시 《낙관주의자들》(2021.7.8~9.4,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은 인간과 인간, 단 한 종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며 다소 용감하게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난다. 인류세 개념이 미래를 전망하는 과정에서 인류라는 거시적 단위에 집중해 나아간다면, 이 전시는 지극히 미시적인 단위에 집중하며 개개인들 간의 관계를 살핀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시 공간은 7명의 작가가 가진 관계에 관한 생각을 터놓는 자리가 된다.
전시는 출발 지점에서 SF작가 네 명의 인터뷰를 제시한다. 기계 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할 것이라는 올더스 헉슬리, 사이버스페이스의 장소성을 다루는 윌리엄 깁슨, 미래의 불균등성을 제시하는 테드 창, 그리고 인공지능을 바탕으로 인간성을 모색하는 가즈오 이시구로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 주시영이 구성한 이들의 가상 인터뷰는, 그 세부적인 맥락은 다를지라도 ‘기술로부터 생긴 인간의 변화’를 말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리고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 공통점에서부터 생각을 출발해 나간 듯 보인다.
특히나 김영글, 김유정, 장입규 작가의 작업이 그러한데, 이들은 기술의 여러 활용 방법 중 SNS 서비스에 주목한다. 김영글의 <LIKE>(2019)는 SNS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을 다룬다. 실제 SNS에서는 업로드된 게시글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토대로 소통이 이루어지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소통 이전, 개인이 업로드에 적합하게 게시글을 편집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를 통해 작품은 게시글 작성의 주체와 이를 보게 될 타인들 사이의 영향 관계를 탐색한다. 김유정은 <Floating Island>(2021)을 통해 SNS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양상을 틸란드시아(Tillandsia)라는 뿌리 없는 식물 위에 또다시 인조 식물을 덮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는 뿌리 없고 피상적인 현대인들의 SNS 속 관계에 대한 은유가 된다. 장입규의 작업 역시 흥미로운데, 관람객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두 개의 의자 중 한 의자에 앉으면 의자에 앉은 관람객의 전체 모습 중 절반만 의자 맞은편 모니터에 송출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편집과 재구성의 세계인 SNS 속 자아와 실제 자아 사이의 간극을 보여 준다.
문서진, 송지혜, 장성은 작가는 관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에 대해 발화한다. 문서진은 <살아있는 섬(Living Island)>(2020)을 통해 한 달간 미국 메인(Maine)주의 Lake Hebron 위에 얼음 섬을 만드는 수행적 과정을 거치며 타인과의 관계와 자기 자신을 반추해 나간다. 또한, 송지혜는 개인들에게 산재한 불안을 직면하는 작업을, 장성은 작가는 관계 속에서 역설적으로 발생하는 고독을 조명한다.
김영글, <LIKE>, 2019 ©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조희수 작가의 <The Divers>(2021)는 인간관계에 대한 가장 낙관적인 생각을 표명하고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퍼포머들은 강남역 한복판에서 바통 터치를 하며 달리기를 이어 나가고, 그 과정에서 연결을 향한 강력한 의지와 긍정이 드러난다. 이렇게 전시는 작품 각각이 지닌 낙관을 균형감 있게 모으고 있으며, 어느 한 낙관을 더 부각하거나 덜 부각함 없이 고르게 선보인다.
다만 전시장을 나오는 길에는 몇 가지 아쉬움을 품게 된다. 먼저, 전시 초반에 언급된 SF작가들의 역할에 대한 의아함이다. 전시 서문에서 다루어지는 이들의 비중에 비해 전시 공간에서는 작가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가 시각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 전시 참여 작가와 소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전시 기획 과정에서는 또 어떤 식으로 연관되었던 것인지 그 역할이 불분명하다. 더불어 미래를 전망하며 어째서 그토록 인간에 집중한 것인지 그 이유를 상당히 열린 결말로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이 전시가 시대의 흐름과 정반대의 방향을 택한 것에는 그에 대한 이유가 분명 있다고 생각되는데 전시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관객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것 역시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만, 적어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선택한 이유에 관한 근거 사항이 덧붙여졌다면 전시의 설득력이 더욱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필자는 본 글에서 상상력을 더해 이 두 가지 아쉬움에 나름의 설명을 덧붙여 보기로 한다. SF작가들과 전시의 관계성은 그들이 서술한 텍스트의 특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네 작가가 쓰는 소설은 필연적으로 미래를 전제한다. 글이 쓰인 당시의 시대 상황이 아닌 미래라는 또 다른 시간대를 전제한 텍스트들이다. 이 ‘미래’라는 개념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것인데, 바로 이것이 인간을 다른 구성원과 구분하게 하는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3 인간은 시간을 하나로 뭉치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을 현재보다 이전(과거), 현재, 그리고 현재 이후(미래)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렇게 뭉치지 않고 구분된 시간은 낙관, 비관, 의심, 기대 등 특정 시간대를 전제한 생각들을 만든다. 이를테면 낙관과 비관은 미래를 전제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생각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며, 네 작가의 소설은 모두 이 생각을 토대로 한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이다. 이 점에서 ‘낙관주의자들’이라는 전시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낙관’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기에, 미래를 전망해 보는 과정에서 미래를 느끼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련한 이야기는 불가결하다. 그렇게 미래를 전제하는 작가들의 텍스트는 낙관과 연결되며 인간과 미래의 관계를 더 부각한다.
또한, 인간 사이의 개인적 관계를 조명하는 이유는 미래 사회를 전망하는 데 있어 개인 간의 관계가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일 것이라 추측해 본다. 이는 개인과 사회의 접경지대로 개인들 간의 관계를 설정한 전시의 대전제와 연결된다. 전시 서문에 따르면, 사회를 탐구하는 과정의 출발점은 한 개인의 생각이며, 그 생각이 개인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최종적으로는 사회로 그 영향력이 뻗어 나간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을 살펴보았을 때, 인간 사이의 개별 관계를 모색하는 일은 결국 사회를 탐색하기 위한 시발점이 된다. 따라서 본 전시는 거시적 관점으로 미래를 전망하기에 앞서 미시적 관점으로 관계를 살펴보며 미래 사회를 사유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는 이렇게 다층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논의들을 균형감 있게 제시하며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김유정, <Floating Island>, 2021 ©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전시의 낙관은 영어의 접속사 ‘Although’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However’과 같은 역접의 접속사와는 차이가 있는데, 앞선 맥락이 뒤에 와서 정말 변화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낙관이 아니라 앞선 맥락은 계속해서 진행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맥락과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한 애쓰기. 인간의 책임이 큰 현 상황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인간을 조명해 보려는 시도. 앞선 맥락이 비관적임에도 인간에게서 한 줄기의 희망을 찾아 보려는 그런 마음이 아닌가 싶다. 끝으로 ‘아래의 이어질 인터뷰 마지막에, 당신의 인터뷰가 연결되는 상상을 해 본다’는 전시 서문 속 문구에 따라 필자가 이 전시에서 진행했을 법한 가상 인터뷰를 담으며 글을 마무리해 본다.
“인간은 인간을 책임질 수 있을까요? 인간은 전 지구는 고사하고, 인류를, 아니 단 한 명의 인간이라도 책임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경험담과 미래에서 주워 온 상처4들이 마음 앞에 버티고 서 있어 쉽사리 ‘책임질 수 있어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이러한 다소 불길해 보이는 전망 앞에서, 저는 그럼에도 사람은 사람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사람이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다치게 했다는 것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일 테고, 그렇기에 다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치료도 가능하게 합니다. 애석하게도요. 이 믿음은, 한 존재는 다른 존재를 낫게 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믿음까지 낳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같은 전제를 공유하면서요.
우리는 또 누구를 다치게 했을까요? 또 누구를 병들게 했을까요? 또 무엇이 우리를 피 흘리게 할까요? 그런 우리는 또 무엇을 통해 낫게 될까요? 이런 믿음과 질문들 사이를 유영하며 우리는, 영영 ‘우리’인 채로 이 지구에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 이것이 제가 가진 유일의 반듯함입니다. 절묘하게 뒤섞인 비관과 낙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