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살과 금 Flesh and Fissure》

<Alps No.10> 120x100cm, Oil on linen, 2019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떼어 놓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시야를 어느 정도 비인간화해야 하며,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를 이루는 바위와 대양처럼.

Robinson Jeffers, Carmel Point 중에서

이번 알프스 연작은 이전 전시 <Big Year>에서의 일정한 주기의 소멸과 생성이라는 시간에 대한 순환적 사고, 그리고 산(山)-풍경을 통해 감각하게 되는 반복되는 전형성이나 재현 구조를 통합해 보고자 시작되었다. 알프스는 유라시아판과 아프리카판의 경계선 충돌로 생긴 산맥으로, 암반이 바다에서 한꺼번에 떼를 지어 솟아오른 듯한 특수지형이다. 전시는 주로 이탈리아 북동쪽 돌로미티(Dolomiti) 지역의 돌산들을 그린 그림들로 구성된다.

1788년 프랑스의 지질학자 데오다 드 돌로미외(Deodat de Dolomieu)가 마그네슘이 들어 있는 석회암을 발견한 후 그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된 돌로미티의 바위들은 암석에 마그네슘, 칼슘, 철 등이 함유되어 있어 일출이나 일몰에 특히 붉게 보이곤 한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뾰족한 봉우리들이 거대한 산군(山群)을 이루는 가운데 암봉(岩峰)과 빙하가 어우러진 일대를 2006년 답사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의 사진자료들을 기반으로 2018년부터 연작으로 그려 나가고 있다. 지각변동과 침식작용 끝에 생겨난 봉우리와 바위의 유기적이며 역동적인 형상은, 풍경과 얼굴, 정신과 몸에 빗대 그간 산 그림들을 그려 왔던 생각의 궤적과 닮아 있다고 보았다.

산과 바위에 인간이 투사하는 형상들은 결국 자신과의 연관 속에서 그 형태들을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비인간, 나아가 반인간을 통해 사물의 아름다움을 중시했던 로빈슨 제퍼스의 시가 새삼스러운 시기에, 이 알프스 그림들로 풍경 혹은 풍경화에 투영되는 이미지와 의미를 질문하고자 하였다.

- 전시 《살과 금 Flesh and Fissure》 소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