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처럼 등장해 대중음악의 ‘판’을 뒤집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시대’에 ‘유감’을 부치며 《시대유감》(時代遺憾)을 발매했다. 당시 사전심의제로 과격한 가사의 수정이 요청된 결과 보컬을 빼 버리고 연주만 남은 곡엔 큰 파문이 일었고, 오늘날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시대유감》은 외치고 있다.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네”
오늘도 사회는 이 시대의 골칫거리를 진단하고 예방하느라 바쁘다. 뉴스와 여론 곳곳에서 출몰하는 세대론은 불순한 청년들을 구분 짓기 위함인 것만 같다. 사회학적 관점은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디지털, 트렌드, 소비에 능하다는 수사 아래 무책임하리만큼 훌쩍 MZ세대를 묶어 놓았다. <성적표의 김민영>, <액션히어로>, <십개월의 미래> 세 편의 영화를 언뜻 MZ세대적인 것으로 규정함은 공감되면서도 유감스럽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각각 이십 대 초반, 중반, 후반을 지나며 생의 병증과도 같은 통과의례를 겪고 있다. 실컷 헤매고 고민하는 그들과 같은 세대로서 ‘공감’을 부친다. 이와 동시에 그토록 상이한 시간과 경험을 통과하는 그들을 하나의 세대로 퉁쳐 묶는 것에 ‘유감’을 부친다. 그리하여 세대론이라는 경직된 판을 공감으로, 때론 유감으로 예측 불가능하게 뒤집는 세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앓는점℃- <성적표의 김민영>
나이만 한 살 더 먹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바뀌었던 때를 기억하는가. 열아홉에서 스물, 바로 그 순간. 상의는 교복, 아래는 추리닝을 입은 채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오프닝 시퀀스가 보여 주는 <성적표의 김민영>의 장르는 어렵지 않다. 사춘기 아이들의 성장담일까. 또래들 사이에 흔히 발생하는, 성적에 대한 견제나 다툼일까. 예측 가능한 수순을 지나치고 도착한 결말이 미쁘게 화해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이 동했다면 악랄한 말일까. 영화가 응시한 것은 겹겹이 층진 밀도의 외로움이었으니까. 늦은 의문이 뒤따른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어째서 ‘김민영의 성적표’가 아닌 걸까. 어째서 ‘성적표 (위)의 김민영’이라는 제목으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연상시키는 것일까. 그리고 이건 기우가 아니다. 수능 D-DAY 100. 이를 기점으로 세 사람의 삼행시 클럽은 일시 해체를 선포하고 민영의 우수 삼행시, ‘김민영’ 삼행시 낭독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김, 김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김 씨들이 모여 가장
효용 없는 한 사람을 추방하자 회의를 했다.
민, 민영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변호하고 싶었다.
영, 영원히 제가 이대로 살아가진 않을 거예요.
<성적표의 김민영> ©엣나인필름
지극히 평범한 김 씨 ‘김민영’의 목소리와 벽에 붙은 지극히 특별한 김 씨 ‘김연아’의 포스터가 한 프레임에 겹쳐지는 것은 이상하리만치 멜랑콜리함을 배가시킨다.
지극히 평범한 김 씨, 지극히 특별한 김 씨
수능 D-DAY 이후 아이들의 시공간은 다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고향 청주를 떠나 타지에 진학한 민영, 정반대 시차의 유학길에 오른 수산나, 그리고 대학에 가지 않고 청주에 남아 알바를 하는 정희. 화상통화로 삼행시 모임을 지속하려 하지만 열의는 이전 같지 않다. 아이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알고 있다. 더 넓은 세계에서 이제 삼행시는 시시한 것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의 관계가 소원해진 찰나, 민영이 무심결에 한 초대로 정희가 상경하며 그 둘은 열아홉 이후의 서로를 마주한다. 추리닝에 머리를 질끈 묶은 정희는 여전하지만 화장을 하고 멋을 부린 민영은 예전처럼 추리닝에 교복 상의를 입고 깔깔거리던 친구가 더는 아닌 것만 같다. 그 거리감은 대학이라는 커뮤니티와도 서울이라는 도시와도 동떨어진 정희의 시선을 통해 예리하게 전달된다.
상황은 더욱 그들을 도와주지 않는다. 정희와 동시에 도착한 성적 통지서. 편입을 꿈꾸는 민영은 성적 정정 메일을 보내느라 잔뜩 날이 선다. 뚜렷한 목표 없이 동네 테니스장 알바에 눌러앉은 정희도 못마땅하다. 공을 줍고, 계절 메뉴인 팥빙수를 만들고, 손수 홍보 전단지를 만들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정희의 첫 일자리, 재수하는 아들과의 친분을 거리낀 사장이 “등을 돌리고 들으라”고 지시하며 인건비를 핑계로 뚝 잘라 버린 그 일자리도. 겹겹이 쌓인 사연을 모르는 민영은 정희를 그렇게 꼬집고 만다. 섭섭함에 민영의 방을 헤집던 정희는 남몰래 특별함을 꿈꿔 온 민영의 기록을 발견한다.
영화가 각자 다른 온도로 치열하게 앓는 스무 살의 외로움을 때론 날것으로, 때론 마법 같은 장면으로 조용히 응시할 때 관객은 그 목격자가 된다. 예고 없는 해고 통보를 마주하던 정희의 등. 무반주로 울리던 민영의 노랫소리와 엉성한 춤. 수능을 망치고 교실이 텅 빌 때까지 고개를 파묻고 울던 소년. 그가 정희가 남긴 크리스마스 전구를 몽땅 켜 두고 홀로 문제집을 풀던 시간. 그 억겁 같던 순간들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그 시절 앓았던 열정은 병증과 같았고 그 밀도는 분명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 열정을 이제는 가늠조차 할 수 없을지언정 이를 아무도 한심하다고, 덜 절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삼행시 클럽의 온전한 화해는 요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의 기다림 이후 그들이 다시 만날 자리 한 칸을 영화는 비워 둔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각종 성적표 위에 서 있던 당신의 소년기를 무사히 소환해 내고 위로한다. 열아홉에서 스물, 여전히 벅차고 외로운 그 시기를.
끓는점℃- <액션히어로>
천연덕스럽다. K-주차장을 배경으로 과감하게 떠오르는 새빨간 무협 영화적 타이포그래피. 박박 민 삭발머리에 도복, 혈혈단신으로 나쁜 놈들을 해치우는 남자의 등장. 허공에 날아오르는 발차기, 슬로우모션, 바람을 가르는 사운드, 광둥어까지. 이 모든 비범한 것들이 K-배경에서 K-배우의 얼굴로 펼쳐지는 혼종 액션은 뻔뻔하다 못해 천연덕스럽다. 80년대 홍콩 무협 영화 전성기의 노스탤지어를 요란하게 버무려 낸 이 소동에 금방이라도 <황비홍>(1991)의 주제가 ‘남아당자강’이 흘러나올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영웅도 난세에 처하는 법. 절체절명의 순간 그에게 주어진 문제는 9급 공무원 시험 K-기출 문제. 용사는 단박에 잠에서 깨어난다.
이 뻔뻔한 꿈은 여운이 길다. 대책 없이 액션 배우의 꿈이 열린다. 그리하여 사회복지학과 학생이자 9급 공시생, 무술 동아리 회장이자 이소룡의 팬인 주성(이석형 분)은 영화과 수업에 입문한다. 비슷한 시각, 단편 영화 ‘액션히어로’로 몸을 불사른, 남에게 보이긴 조금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선아(이주영 분)는 연기과 조교가 되어 차 교수의 지시에 따라 입시생의 성적을 조작하고 있다. 무거운 죄책감 따위를 갖기엔 조교 시급 8천 원이 너무 가볍다. 선아는 투잡으로 카페 알바를 뛴다.
<액션히어로> © (주)트리플픽쳐스
한편 강호는 멀고도 험하니, 대망의 액션 영화를 찍기 위해 모인 조별 과제는 인력난이요 자금난이다. 주성은 찬열(이세준 분)과 콤비를 이뤄 가성비 핸드 헬드 촬영으로 복도를 헤집던 중 교수실 앞의 건의함을 박살 내고 만다. 건의함 속의 편지는 무려 연기과 차 교수의 입시 비리를 함구하는 조건으로 3천만 원을 요구하는 협박 편지. 어라? 이건 돈 주고 사야 하는 진짜 악당, 진짜 사건이다. 주성은 불현듯 답을 찾는다. 그들의 영화가 영화다워지는 길은, 이 리얼리티를 훔치는 것이다. 리얼리티는 공짜니까!
30%와 0.3%, 3천만 원과 30만 원
협박범이 요구한 3천만 원. 이 애매함은 대체 뭘까. 출처는 차 교수가 부정 입학 1건당 받아 챙기는 금액이 1억이라는 소문에 있다. 이를 놓고 보면 3천만 원은 1억의 30%니, 꽤나 양심적인 마진인 셈이다. 더구나 이 3천만 원에는 보다 구체적인 근거가 있다. 3천만 원, 그 돈이 있으면 조그마한 치킨집 하나를 개업할 수 있다. 그것은 차 교수의 협박범이자 조교인 재우의 염원이다. 불투명한 미래, 주종관계의 계약직, 시급 8천 원의 부당함, 그 온당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대학원생의 울분이 알차게 담긴 30%인 것이다. 그러나 재우가 욕심낸 이 30%는 엉뚱한 이에게 엉뚱한 액수로 돌아간다. 차 교수가 선심 쓰듯 봉투에 넣어 던진 액수는 30만 원. 치킨집이라는 포부는 얼렁뚱땅 한 달치 방세로 등가 된다. 이다지도 변변찮은 지분, 30%가 0.3%로 돌아오는 과정을 비참할 새 없이 호탕한 속도와 탄력으로 쥐락펴락하는 것은 <액션히어로>만의 경지다.
현실의 악당과 싸우는 영화를 찍고 싶었던 그들의 꿈은 허무하게 끝난다. 그럼에도 불구, 차 교수가 머리를 후려치며 일갈하는 “늬들 다 영화 찍고 앉았네!"와 주성이 말하는 “액션히어로 같은 거(영화) 찍고 싶어요”의 ‘영화’는 분명 다른 온도로 들끓는다. 오염되어 버린 사회, 오염되어 버린 등가, 오염되어 버린 영화. 그 대척점에 주성의 영화가 반짝인다. 문자 그대로 꿈에서 시작된 만큼 허무맹랑할 수도 농담일 수도 있다. 선아는 말한다. “누구나 변해, (그러니까) 니들도 빨리 졸업이나 해.” 이 들끓는 열정을 멈출 수 있는 건 졸업일까. 체크무늬 셔츠의 어수룩한 찬열, 도복을 동여맨 주성의 뒷모습은 여전히 영웅도, 영화도 되지 못한 채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대자보가 붙은 풍경과 나란히 그들이 퇴장할 때, 참으로 천연덕스러운 이 작전의 공모자가 된 기분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액션히어로>는 모든 것이 바쁘게 등가 되는 사회에서 청년들이 돌려받는 몫이 30%조차 되지 못하는 0.3%라는 현실을 아는 것만 같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말한다. 싸워라, 혼자가 아니니까.
<십개월의 미래> © 그린나래미디어
식는점℃ - <십개월의 미래>
“언제까지 그렇게 햇병아리처럼 하고 다닐래?”
숏컷, 백팩, 운동화, 청바지. 열아홉에겐 그토록 권장되는 차림새가 스물아홉 미래(최성은 분)에겐 해명이라도 필요한 걸까. 미래의 아버지는 스물아홉에 다니던 회사를 뛰쳐나와 스타트업에 뛰어든 딸이 탐탁지 않다. 아버지는 미래에게 ‘조직’의 중요성을 엄숙하게 설파한다. 이 시퀀스는 왜인지 목에 탁 걸린 가시처럼 잊히지 않는다. 이후 <십개월의 미래>는 갑작스러운 임신에 갈팡질팡하는 여성의 임신부터 출산까지의 십 개월을 쫓는다. 태명부터가 카오스인 아기를 품은 미래에게 임신을 기점으로 결혼, 독립, 커리어를 둘러싼 총체적 난국이 펼쳐진다. ‘조직’과 ‘탈조직 햇병아리’로 대변되는 부녀간의 굳건한 신념 차이와 같은 대립쌍은 K-사회 리얼리티의 얼굴로 곳곳에서 출몰한다. 큼지막한 차를 끌고 이곳저곳 쏘다니는 미래의 생동감과 여름으로 출발하는 쨍한 날씨 너머 <십개월의 미래>는 서늘하다.
미래와 가장 먼저 부딪치는 사람은 남자친구 윤호(서영주 분)다. 같은 세대, 같은 또래이자 스타트업 개발직 미래와 프리랜서 디자이너 윤호. 이러한 코드는 그 둘을 공감으로 결속시켜 준다. 미래와 윤호는 다르고도 닮았다. 미래는 윤호가 불합리한 외주 계약 조건에 쩔쩔매도, 바보 같은 사업 아이템에 혹해 덤터기를 뒤집어써도 그를 사랑했다. 완벽하지 않고 듬직하지 않아도 미래의 눈에 윤호는 분명 아름다운 생명체였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건데, 왜 아무도 그걸 모르냐?”는 말에 “우리? 나는 빼줘ㅎ”로 응수하던 윤호의 유약함을 미래는 사랑했다. 그러나 윤호가 가부장이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을 때 둘 사이는 어긋난다. 윤호는 커리어를 욕심내는 미래를 이기적인 엄마로 규정하고 성급하게 결혼을 추진하며 아버지의 돼지 농장을 이어받는다. 채식주의자인 그가 생계를 위해 돼지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은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과 병치된다. 윤호는 망하지는 않지만 불행해지는 길을 택했다. 그 길에 두 사람이 사랑했던 윤호는 사라지고 더는 없다.
사라지는 것, 태어나는 것
‘사라진다’는 두려움이 미래를 엄습한다. 임신 중절을 고민하던 미래에게 “생각을 하면 시간이 사라져요”라고 조언했던 산부인과 의사의 말이 예언이었을까. 몇 달 전만 해도 성공한 커리어우먼 그 자체였던 강미(권아름 분)는 육아에 지친 모습으로 미래를 맞이한다. 강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해 내지 못한다. 미래는 달리는 차 안에서 영혼이 사라져 죽어 가는 강미의 환상을 본다. 스타트업 초기 멤버로 제안받은 중국 진출이 무산되며 커리어도 사라진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임신과 부딪치면 사라진다. 십 개월은 뱃속의 아기와 공생하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미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자신을 재정립해 나가는 기간이기도 하다. 이때 미래라는 이름의 의미심장함은 고유명사 인간 ‘미래’와 미래(future)를 모두 지시한다. 우리였던 것, 너였던 것, 나였던 것. 미래는 무수히 ‘사라지는’ 것들 가운데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영화의 마지막 장에 가서야 미래를 괴롭혀 온 대립쌍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임신, 출산, 결혼을 둘러싼 사회적 규범성 앞에 윤호가 잃은 것, 강미가 잃은 것, 그리고 미래가 잃은 것들에 대해. 기꺼이 가부장이 된 아버지 세대가 설파하던 조직과 생산의 원리에 대해. 도무지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성별과 세대를 가로지르는 축은 생존하기 위한 저마다의 법칙이었다. 산모의 뼈와 살을 부수고 아기가 나오는 출산의 아이러니가 아기의 탄생을 앞둔 미래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는 생의 아이러니와도 닮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이해 끝에 영화가 보여 주기로 택한 것은 미래 아버지가 설파하는 조직, 윤호 아버지의 돼지 농장, 그리고 “생각을 하면 시간이 사라진다”는 법칙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궤도를 찾아가는 미래의 모습이다. 미래가 살아갈 세계는 여전히 카오스이며 영화의 자막이 지시하듯 새로운 세계조차 지극히 낡은 세계와 타협하며 공존해야 할 the new (old) world일 것이다. 그 미적지근한 명제와 괄호 사이를 헤매는 미래와 그와 같은 여성들이 부단히 살아남길 바란다. 십 개월. 세계가 변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