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시작될 무렵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는 최초의 총장 직선제가 시행되었다. 올해 여름만큼 뜨거웠던 공개 토론회와 선거 끝에 “제대로 예술하는 예술학교”라는 슬로건과 함께 김대진 교수가 제9대 총장으로 당선되었다. 개교 직후부터 음악원의 교수로서 학교의 역사와 함께해 온 김대진 총장의 온라인 취임식에 많은 이들의 축하 메시지가 쏟아졌다. 취임 첫날, 석관동 교사에서 김대진 총장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무대에서 우연의 순간을 만나기 위해 차분하고 지난한 연습을 지속하듯, 김대진 총장은 인터뷰 내내 학교의 발전을 위한 여러 시도와 차분한 열정을 전달했다. 앞으로 4년간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만나게 될 반짝이는 순간들을 기대하며 그날의 인터뷰를 전한다.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30년을 바라보다
사실 최근 몇 달 동안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서 과거를 굉장히 많이 돌아봤거든요. 학교 초창기에 교수님과 학생들끼리 모여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자는 토론이나 간담회를 한 적은 없었어요. 그러나 무언으로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동력, 예술적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에 한예종의 위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때는 처음 시작하는 학교이다 보니 우리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한예종의 위상은 설명할 필요가 없게 높아졌잖아요. 앞으로는 어떤 공동의 목표를 갖고, 어떤 의식을 갖고 작업을 해 나가야 하는지 잘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이제 학교의 책임을 지닌 총장으로서 그 비전을 잘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대로 예술하는 예술학교”
예술교육은 체험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연습실과 연구실에서 연습하는 건 완성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 공연을 통해서 배우거든요.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많은 것을 경험하는 단계가 바로 발전을 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이때까지 그런 체험을 할 수 있는 단계와 무대가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많은 연구를 하고, 많은 연습을 하는 단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무대에서 체험하는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예술가는 그 체험을 통해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고, 그 시행착오가 허용되는 곳이 바로 학교이기 때문에 무대를 많이 만들어 내서 스스로 발전하는 것이 제대로 예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앞으로 그런 과정을 겪을 수 있는 무대와 기회를 많이 만들고 싶습니다.
창의적 예술가: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자기화하기
공연예술을 하는 분들이 무대 위에서 창작 활동을 하거나 연주 활동을 하는 그 순간이 의식의 세계일까 무의식의 세계일까 생각해 보면 거기에 많은 해답이 있어요. 저는 그 순간이 무의식의 세계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무의식의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고민해 봐야 하는 거죠. 또 무의식의 세계에서 나도 모르게 발현되는 습관 같은 것은 어떻게 고쳐 나갈 것인지가 중요할 것 같아요.
무대에 나갔을 때 자신도 모르게 하는 습관들을 선생님들이 잘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입장에서는 학생들의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고, 학생들에게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서 자꾸 돌아보게 해 주는 일종의 거울 같은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서 급해지는 학생들을 보면 사실은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어요. 같이 식사할 때도 식사를 하는 템포가 점점 빨라진다거나 걸어가는 템포가 점점 빨라진다거나, 말이 점점 빨라지죠. 의식의 세계를 통해서 무의식의 세계를 고치는 그 과정이 요즘 필요한 지도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학생 성향을 파악해야 하고, 학생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고, 학생의 입장에서는 선생님에 대한 벽이나 이질감, 두려움 없이 자신의 것을 보여 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학생과 선생님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학내 구성원 간의 신뢰, 안전한 창작/수업 환경 조성
돌이켜 보면 대화가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서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소통을 하는 것과 외면하는 것의 결과는 너무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소통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소통에도 구심점이 있어야 가능하므로 제가 그 소통의 중심에 서서 모든 분과 대화하고자 합니다. 생각이 다른 분들과도 소통을 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 지금 시점으로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시스템적으로 봤을 때 학교 인권센터가 가장 효율적으로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예술 실천과 예술교류를 통한 6개원의 협력
6개원 간의 소통 채널이 없었던 것 같아요. 본부 차원에서 크고 작은 무대의 기회를 통해 서로를 알아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봐요. 각자 하고 있는 예술을 통해서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것이 우리가 깊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두 개가 만나서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두 개의 정체성이 굉장히 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정체성이 강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두 개가 합쳐지는 단계에서 멈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융합예술을 하나의 예술적 장르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기 예술에 대한 가치관과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고 봅니다. “Show Your Forte”라고 할까요? 특히 융합예술은 여러 가지 시도가 있어야 해요. “같이 놀아 보자”라는 표현처럼 서로 많은 교류가 있어야 하는 거죠. 학교 본부의 기획을 통해 여러 가지 다양한 체험을 하고, 예술적 시행착오를 통해서 오리지널한 것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겁니다.
음악원 개원 25주년 크누아 피아노 오케스트라 콘서트 (2018)
캠퍼스 이전에 관하여
이미 구성원들의 의견은 합의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가 중요하죠. 따져 봐야 하는 여러 가지 측면 중에서도 어느 시기에 이 일을 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즉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모멘텀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고요. 그 모멘텀이 왔을 때 적극적으로 움직이려고 준비 하고 있고, 그 단계나 절차에 관해서는 진행 정보를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이해관계를 쌓기 위해서 학교 외부의 관계자들과 교류가 필요하며, 우리 학교 구성원의 뜻을 더 이해하게 만드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는 관계자들과 적극적인 대화와 소통을 시작하고 있고, 적절한 모멘텀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구성원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면서 진행 상황에 대해 적당한 시기에 정확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예종의 국제적인 위치와 위상
우리 학교의 위상이 높다는 것을 너무 애써서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그런 위치에 있는 학교이고, 이제는 음악 선진국으로서 다른 주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살펴야 한다고 봐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를 하러 갔을 때 마틸드 왕비가 먼저 우리 학교에 관심을 표하셨어요. 학교에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할 수 있는 비결을 질문하셔서 우리 학교를 방문하면 알 수 있지 않겠냐고 대답했었거든요. 그 후에 실제로 2019년에 방문하셨고요. 우린 이미 국제적인 위상을 가진 학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증명할 필요 없이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얼마 전 올림픽을 보면서는 금메달을 따기를 염원했지만 예술은 어떤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학생들이 예술 세계를 증명받기 위해서 너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어요. 그런 것을 떨쳐 버리고 더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지휘자와 어떤 총장
오케스트라의 변화를 보면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거든요. 모두가 잘 아시는 유명한 지휘자 카라얀 시대에 리더십은 제왕적인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카리스마를 갖고 자신의 해석을 단원들한테 제시하고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어요. 그렇지만 사이먼 래틀이라는 지휘자는 조금 달랐죠. 운동화를 신고 청바지를 입고 연습하면서 단원들과 재밌게 이야기해요. 쉬는 시간에는 단원들과 커피를 마시는, 말 그대로 소통하는 사람이었어요. 단원들과의 친화력을 발휘한 거죠. 그게 어떻게 보면 요즘 시대에 필요로 하는 지휘자의 역할이라고 생각을 해요. 같은 맥락에서 생각했을 때 권위적인 총장의 역할보다는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소통할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과 예술의 역할
예술의 역할과 예술가의 역할은 본인이 정하는 것입니다. 다만 학교에서 해야 하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 설정하든지 간에 단단한 프레임과 단단한 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뿌리가 정확하게 자리 잡지 못하면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깊이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단단한 뿌리를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개인적으로는 많은 분들에게 위안이 되어 주는 것이 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예술가가 추구하는 예술 세계가 본인의 나이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텐데, 제가 60대를 바라보면서 우리 사회에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내가 생각하고 내가 그리는 베토벤은 어떤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슈베르트는 어떤 것일까?”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작곡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까?”라는 사회적인 의식이 담겨 있다고 보고요. 우리가 추구하는 여러 가지 예술 세계 중에서 사회와 같이 호흡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기쁨을 함께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통과 상호 이해의 구심점
우리가 이렇게 오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위상을 만들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서로 칭찬해 주는 캠페인을 벌이고 싶을 정도로 서로의 칭찬과 격려가 필요하다고 봐요.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대화를 하다 보면 그 다름이 오리지널하게 다가올 때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최근에 다름을 수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는데, 그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는 것 같아요. 대화하고, 서로 이해하고, 상대방 입장에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서로 이해하고 대화하고 친하게 지내고 격려해 주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 점에 대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김대진 총장이 말하는 “제대로 예술하는 예술학교”는 학내 구성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체험과 경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창의적인 예술을 발전시키고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것, 김대진 총장은 그 사소한 시작이 상호 간의 소통이라고 말했다. 이제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새로운 30년을 바라보며 중요한 가치를 다시금 살피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존중될 수 있도록 학교의 건강한 발전을 위한 준비를 한다. 우리가 차근히 함께 나아갈 한 걸음에는 격려와 소통과 신뢰가 함께할 것이다. 김대진 총장을 비롯한 학내 구성원들의 건강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변화하고 발전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