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원 감독은 영상원 영화과 예술사 졸업작품 <매미>(2021)로 올해 7월 제74회 칸 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서 2등상을 수상했다. 칸 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은 전 세계 영화학도들의 경쟁 부문으로, 올해는 490개 영화학교에서 1835개 작품이 출품되었고 17편만이 본선에 올랐다. <매미>의 칸 시네파운데이션 2등상은 한국 영화사에서 최초의 기록이다.
조금은 의기양양할 테지 했던 짐작은 빗나갔다. 프랑스에서 한 달여 만에 돌아온 그를 영상원 지하 대스튜디오에서 만났을 때 시상식 영상에서 본 “오 마이 갓”을 연발하며 벙긋벙긋 웃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가끔 너무 신중하게 대답을 골랐다. “이렇게 말해도 되나”, “말을 잘해야 할 것 같은데”를 추임새처럼 붙이면서도 하려던 말은 다 하는 스타일이었다.
먼저 수상에 관해 물었다. <매미>의 만듦새를 보니 주변에서 수상을 예측하는 소리도 들려왔겠다고 운을 뗐다. “나도 영화학도다 보니까 칸의 영화들을 많이 본다. (출품하면서) 칸의 색깔이나 취향과 조금 맞는 부분이 있긴 하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런데 칸이다 보니까 내가 예측하는 건 좀 너무 그런 것 같고… 오히려 주변에서 그런 말들을 하면 너무 부담스러워서 계속 대답을 피했다.”
막상 상을 받았을 땐 잘 믿기지 않으면서도 짜릿했다. “그렇게 신나게 살고 있지 않았는데 하루 이틀 정도는 진짜 신나더라.” 카페에서 맥주를 한두 잔 마셨고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채 수상 소식을 들었다. 상금이 있다는 것은 수상 직후에 알았다고 한다. 칸 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 2등상 상금은 11,250 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약 1,554만 원이다. 상금은 어떻게 쓸 생각일까. “저축을 하지 않을까, <매미>에 돈도 많이 들었으니까.” 다음 영화에 쓰겠다는 등의 야심 찬 대답을 예상했는데 뜻밖이었다. “통장에 천오백만 원짜리 칸의 추억이 박혀 있는 게 기분이 좋아서….”
‘칸의 추억’을 안긴 영화 <매미>는 트랜스젠더 여성이 남산 소월길 매춘에 나선 하룻밤 사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3일간 촬영했고 분량도 그간 작업한 단편에 비해 짧아 감독이 직접 편집을 하기도 했다.
여러 매체 인터뷰에서 왜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다루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로선 사실 핵심을 비껴간 물음이다. “트랜스젠더 그 자체를 다루는 것에는 사실 그렇게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세계를 온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물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있는 단 하나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를 밀고 나갔다. 캐스팅도 이 이미지에 부합할 인물을 찾았다. 트랜스젠더 여성 ‘창현’ 역으로 남성이 아닌 여성 배우(김니나)를 선택한 것이다. 반대 의견도 많았고 레퍼런스 영화에서도 여성 배우가 트랜스젠더 역할로 나오는 것이 성공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마지막에 나올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영화적 기술들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캐스팅을 생각”하자면 여성 배우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트랜스젠더처럼 보여야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서는 온전한 여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상태도 필요했다.” <매미>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감독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한번에 납득되는 지점이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용한 CG에 대해서도 물었다. “실제적인 효과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레퍼런스 삼았던 몇몇 작품들에서도 그런 날것의 느낌이 있었고, 그 질감이 전해져야 사람들도 충격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더 더 스킨>(2014)과 <드라이브>(2011)의 무드가 주요 참고자료가 되어 주었다.
<매미>
아이디어로만 사전 제작지원을 받아 둔 상태에서 약 한 달간 시나리오를 썼다. 다시 한 달간 촬영 준비를 하고 3일간의 촬영을 마친 후, 후반 작업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 “후반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서 오히려 시간이 좀 넉넉하게 생겼다. 출품이나 이런 것에서 좀 자유로워져서 10월부터 다음 해 1~2월 정도까지는 한 2, 3주 그냥 둬 보기도 하고, 게으르게 작업을 한 것 같다.” 그가 이번 영화에서 직접 편집을 하기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조금 대충 하려고 할 때 내가 한다. 편집자와 작업하는 걸 되게 좋아한다. 좋아하는 편집자도 있고. 또 편집자와 소통할 때 디렉팅이 스스로 현장보다 오히려 좋을 때가 많다고 느낀다. 하지만 <매미>는 진짜 일관되게 좀 과감하게 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 과감성에 대해 편집자를 설득시키고 시행착오를 함께 경험하려면 더 책임감이 많이 필요하고 시간도 충분해야 가능할 것 같아 이번에는 내가 해 보자, 해서 시작을 하게 됐다.”
2020년에는 <매미>를 포함하여 영화를 두 편 찍었다. 다른 하나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러닝타임이 긴 <새장>(2020)이다.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해 어려움을 겪던 탭 댄서가, 휠체어를 탄 채 헤어 디자이너를 꿈꾸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네이버웹툰 원작으로 스튜디오N의 지원을 받아 작업했다. 백 편이 넘는 시나리오 중에서 단 한 편만 선정되어 제작지원을 받는 형식이었다. “원래는 <새장>으로 졸업을 하고 싶었는데 덩그러니 떨어져서 학교 밖에서 작업한 것이라 학교와 상관없는 작품이 되었다.” 그래도 영화를 찍을 찬스가 있는데 “굳이 내가 조금 지쳤다는 이유로 스킵하기보다는 보너스 찬스라고 생각하고 찍”은 작품이다. 이외에도 제18회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상영된 <봄밤>(2019)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테니스를 쳐 온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뤘다. “액션감 있는 것을 해 보고 싶었다. 학생 단편에 굉장히 정적인 영화가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 역동성이나 움직임에 초점을 뒀다.”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회들은 날리지 말고 충실히 다 찍어 보자 하는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해서일까. 13학번인 그는 올해 2월 졸업했다. 학교를 8년 다닌 셈이다. “학교생활이 길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안 길다고 느꼈던 게 내 주위 친구들 보면 다 학교 오래 다니더라. 평균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밖에서 보면 너무 오래 다녔다는 인식이 좀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는 재학 시절 코미카에 웹툰 <졸업영화>를 연재하고 비투비와 조권의 뮤직비디오를 감독했으며 CF 스토리보드 작업도 여러 번 했다. 왜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한 것일까. “영화과 특성상 나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현장 체험을 많이 하고 거기서 학교 이상의 좋은 공부들을 하는 것 같다. 엄청 중독되어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의미로. 굉장히 즐거웠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이 익숙”했던 그의 원래 출발 지점은 만화다. 경기예고 만화창작과를 졸업하고 졸업작품 <Where is the love>로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 중 하나인 오타와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학생 단편 경쟁 부문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그 덕에 미국 Academy of Art University에서 1년간 공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때 경험이 애니메이션에서 영화로 분야를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디즈니나 픽사 같은 스튜디오들이 모두 2D에서 3D로 전환을 하던 때였다. 관객으로서는 모든 애니메이션이 좋고 매력적이지만 창작자로서는 작업의 결이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그림을 그리고 종이를 만지고, 내가 직접 그려 내면서 움직임을 만드는 게 아니라 모든 게 너무 세분화되어서 내가 지금 미대에 온 건지 공대에 온 건지 헷갈리는 지경이 되었다. 근데 그때 받은 상이 그 당시에 한예종 특별전형 자격이 됐다. 애니메이션 상인데 영화과도 되더라. 영화에 대한 꿈과 동경은 늘 갖고 있었으니까 이번 기회에 해 보자 해서 전환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과에 들어오니 “완전 다른 세계여서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여긴 몸으로 하는구나. 어쨌든 내가 정말 성숙한 하나의 사람이 되어서 현장에서 끌고 나가야 되는 곳이구나. 도전적인 경험들이 많았다.” 예를 하나만 들어 달라고 했다. “일단 현장에서 트러블이 많다. 1, 2학년 때는 다들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태도 같은 것이 서툴고, 이 작업 환경 난이도가 아직은 어렵고 또 몸이 피곤하고 많은 약속들을 시간 안에 해결해 내야 하고. 이런 것들이 좀 많은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1학년 때 이 길이 맞는지 회의도 찾아왔다. “내가 착한 사람이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뭘 찍는지도 확실하게 잘 모르는 내가 20명 30명을 모아 모아 가지고 같이 밤을 새고 고생을 시키고…. 당연히 자격이 없었겠지. 누군가를 내가 지치게 한다는 것이 굉장히 큰 심적 부담이었던 것 같다.” 이런 고민을 수업 시간에 털어놓은 적도 있다. “이창동 선생님의 좀 큰 강의였는데, 너무 우연적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너희들 영화 왜 찍냐?’ 하고 물어보시는 거다. 아무도 대답을 안 했다. 누가 ‘저는 이래서 영화 찍습니다!’ 하고 얘기하겠나. 아무도 말이 없으니까 출석부를 이렇게 보시더니, ‘윤대원? 윤대원? 넌 영화 왜 찍냐?’ 하셨다.” 그때 아까 한 얘기를 그대로 했다. 생산적인 답변을 기대했는데 웬걸. 대가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아 그거. 다 나중에 노하우가 생겨.’ “진짜 그렇다. 어느 시점에 영화적 근육이 생겼는지 모르는 상태로 능숙하게 해내고 있고, 익숙해져 있고.”
그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영화 작업을 조각에 비유했다. “나중에 뒤에서는 좀 꼼꼼하게 하는 편인데 초반에는 과감하게 하려고 한다. 조각을 보면 처음에 큰 덩어리는 쳐내고 뒤에서 세밀하게 다듬지 않나. 중간중간 매력적인 상황이나 우연성을 만날 여지가 많은 것 같아서 일단 시작할 때는 좀 과감하게 하려고 하다 보니 소재에 대한 두려움도 좀 덜한 것 같다. 많은 장르를 시도해 보고 싶다.” 여세를 몰아 이제 다음 영화는 생애 첫 장편영화가 될 텐데 하고 운을 띄웠더니 뜻밖의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가요? 진짜 그랬으면 좋겠는데 잘 모르겠어요.” 막 첫걸음을 뗀 병아리 감독에게 졸업작품의 뜻하지 않은 성과를 들먹이며 그의 미래를 가늠해 보라 요구하는 것은 부담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니면 언제 물어보랴. 마지막으로 대가에게나 어울릴 법한 질문 두 가지를 그에게도 던져 봤다.
장편을 준비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표현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장편영화를 찍는 게 모든 영화과를 졸업했거나 영화를 공부했던 친구들의 꿈일 것이다. 나도 당연히 장편영화에 도전해 보고 싶고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학교 다니면서 틈틈이 글을 쓴 게 있긴 한데, 일단은 아직도 한참 쓰고 있는 상황이다.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아주 어떤 육체적인 경험을 하게 하는 그런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요즘(팬데믹 상황에서) 온라인이 전 세계적으로 확장이 되면서 사람들이 그런 감각을 더 느끼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좀 더 원초적이고 ‘몸’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글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앞으로 감독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거는 정말 모르겠다. 지금 알고 그렇게 느끼는 게 있다고 해도 그 생각이 완전히 변할 것 같다. 여전히 모르는 게 많고, 다 알아야 된다는 강박도 요즘엔 없다. 그래서 계속 공부해 나가면서 꾸준히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