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민

이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몇 번의 망설임과 좌절을 경험했다. 스스로 ‘옛날 사람’이며 ‘부적응자’라는 감각이 극대화되었고, 가상 세계와 데이터로서의 미술 작품이 기능하는 오늘날의 방식에 대해 고찰하려 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버리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메타버스(metaverse)’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메타버스의 구체적 정의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김상균 교수는 메타버스를 설명할 때 ‘아바타’를 통해 접속하는 가상 세계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지만, 혹자는 메타버스를 ‘가상 현실’, ‘증강 현실’, ‘라이프로깅’, ‘거울세계’라는 네 가지 분류 기준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SNS나 모바일 내비게이션 앱을 메타버스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어찌 됐든 메타버스라는 용어는 가상 세계에 현실을 ‘초월(meta)’한 세계라는 맥락을 더한다. 주변의 기성세대들이 ‘초월’의 가능성에 열광하는 모습이 필자의 눈에는 기이하게 보였다. “이것이 미래 산업”이며, “다가오는 세대에게는 메타버스가 곧 유니버스”1라는 식의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반면, 주변 20~30대들의 반응은 대체로 그리 뜨겁지는 않았다. 메타버스의 예로 제시되는 ‘제페토’ 같은 플랫폼들은 우리에겐 아직 ‘세계’의 감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오히려 이제는 더 이상 ‘미래 세대’가 아닌 존재가 되었다는 이상한 소외감 같은 것을 안겨 주었다. 다만, 개미들은 ‘메타버스 주’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초록 검색창에 메타버스를 치면 첫 번째 연관 검색어는 당연하게도 ‘메타버스 관련주’라는 점을 떠올릴 때, 이것은 일차적으로 투자 용어라고 이해된다.

가상 세계의 플랫폼이 블록체인(Block Chain) 기술과 결합할 때, 가상 화폐와 NFT(Non-Fungible Token)를 통하여 그 투기적 가치는 극대화된다. 하나의 예로, 해외 플랫폼 디센트럴랜드(Decentraland)에서는 가상 공간의 땅을 900조각의 유닛으로 나누어 ‘한정 판매’함으로써 땅값을 상승시켰다. 실물 세계에서처럼 부동산 거래와 투자가 가능한 이 공간에서는 구입한 땅 위에 원하는 건물을 세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데, 소더비(Sotheby's) 또한 디센트럴랜드의 땅을 점유하여 자사의 런던 갤러리를 복제한 가상 공간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지난 6월 진행된 미술품 경매는 NFT 디지털 작품들을 판매했고, 작품 결제에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 경매는 27명 작가의 작품을 1700만 달러(189억 원)에 낙찰시키며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고 알려진다.2

디지털 데이터가 경매의 대상이 된다는 점은 분명히 낯설고 기이한 현상이다. 필자는 이전부터 ‘데이터 파일이 미술의 완성된 형태가 될 때 미술 생산과 소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질문하면서도, ‘데이터 파일이 어떻게 돈이 될 것인가’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에서 가장 먼저 대두된 것은 이 부분이었다. ‘대체 불가능 토큰’인 NFT와 결합된 미술은 데이터의 세계를 대체 불가능한 ‘희소성’의 세계로, 따라서 사유 재산화할 수 있는 세계로 이행하게 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NFT를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들은 대부분 비트코인과의 비교를 통해 NFT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가상 화폐인 비트코인의 경우, 나의 1비트코인과 타인의 1비트코인은 상호 교환 가능한 데이터다. 그러나 블록체인에 특정 코드값을 부여하여 기록하는 방식인 NFT는 다른 데이터로 대체 불가능한 데이터다. 즉 NFT는 가상 자산이자 ‘원본성’을 갖는 데이터로서 예술 작품의 특성과 결합된다. 디지털 이미지에 ‘소유권’이라는 이질적인 개념이 접목되고 그 소유권을 사고팔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소유권 개념이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소유자만이 ‘원본을 볼’ 수 있는 물리적 작품과는 달리, 디지털 이미지는 소유하지 않아도 누구나 그것을 ‘원본성의 손상 없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데이터의 소유가 ‘저작권’의 소유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NFT 작품을 누군가 구매하여 소유하더라도 저작권은 여전히 이미지의 원 저작자에게 있다.3

그렇다면 NFT의 소유자는 특정 이미지의 ‘투자 가치’를 소유하는 것으로, 그것을 되팔아 수익을 얻을 때 진정한 가치가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투자자가 아닌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미래의 미술’이라는 이야기가 기이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NFT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금고다. NFT는 미술을 감상의 대상이기보다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것은 미술이 걸어온 길이라기보다는 미술이 처한 상황이며, 어떻게든 대처해야 할 혼란한 상황임은 분명해 보인다.

NFT로 거래되는 이미지는 ‘복제 가능성’과 ‘희소성’을 동시에 갖는 존재가 되었는데, 이 이상한 공존 때문에 과거의 미술사나 매체 이론을 대입하여 생각하기도 어렵다고 느꼈다(물론 필자의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다).4 본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두 항이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매커니즘을 만들어 내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대체 불가능한 코드가 부여되더라도 여전히 무한히 복제되어 배포·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으로 인해 이미지가 획득하는 영향력은 누군가의 자산 가치와 직결될 것이다. 투자의 장이 극대화된 메타버스에서, 온라인 세계는 더 이상 누구에게나 열린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무한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한계를 만드는 방식을 고안함으로써 자산 가치를 획득하는 세계가 되어 가고 있다.

가상 세계와 미술의 교차점에 대하여 생각할 때, NFT로 인한 사유(私有) 방식의 변화는 하나의 중요한 쟁점이다. 비록 버겁더라도 이 지점을 사유(思惟)해 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처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생각에, 예술가들이 또 다른 길을 만들어 내기를 기대하게 된다. 따라서 NFT 영역 바깥으로 질문의 범위를 넓혀 보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가상 세계에서 ‘미술’의 위상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미술은 가상 세계 내부의 ‘아이템’인가, 혹은 가상 세계 ‘그 자체’인가? 그것도 아니면 가상 세계에 대한 사유(思惟)인가?

글 김명진
1 “엄청난 돈이 메타버스로 향하고 있다! 왜? 과학자의 메타버스 총정리!”, 유튜브 채널 ‘장동선의 궁금한 뇌’
2 “이제는 아트테크도 메타버스에서! 소더비의 NFT 온라인 경매 전략”, 유튜브 채널 ‘아트엔테크 커뮤니케이터 민지’
3 단, 플랫폼마다 계약 조건이 달라 소유권과 저작권을 함께 팔거나 NFT 거래 플랫폼에 양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출처: “폭발 성장 NFT 디지털 자산! 풀어야 할 저작권 문제”, 유튜브 채널 ‘아트엔테크 커뮤니케이터 민지’ 
4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미술사에서는 ‘복제 가능성’과 ‘희소성’을 뒤섞어 놓은 것이 (아방가르드) 예술가 자신의 의도적인 전략이었다면, 최근에는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 예술가가 아닌 세계의 (자본) 매커니즘이라는 점에서 더 이상 ‘미술사적’ 서술이 불가능하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