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라는 말에서부터 시작해본다. 사실 이 문장은 내가 글을 쓸 때마다 쓰곤 하는 고리타분한 수사 중에 하나이지만 분명 가장 솔직한 진심이기도 하다. 어떤 말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다소 막막하게만 보이는 이 문장은 결코 이 글의 방향성을 묻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현재의 나는 자주 아니 종종, 아니 거의 매 순간 ‘어떻게 말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한다. 내 이 고민은 2015년1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바로 이 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에게는 호환마마보다도, 홍콩할매 귀신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가 나타났으니 이름하야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을 말하기 위해서는 여성혐오를 말해야 할 텐데, 처음 여성혐오라는 말이 나타났을 때 온 세상이 들썩거렸다. “여성혐오라니 말도 안 된다, 내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같은 골 때리는 소리들이 즐비했다. 애초에 ‘미소지니2’를 여성혐오로 번역한 것에서부터 잘못되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미 늦어버렸고 여성혐오의 등장과 함께 페미니즘은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를 맞이했다. 사실 페미니즘은 격동하는 그 성격 때문에 간단하게 정의를 내리는 일이 매우 어려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원하는 대로, 원하는 쪽에서 마음대로 의미를 왜곡해 취하는 것이 다반사였지만 공통적으로 언제나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페미니즘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 이유는 간단하다. 불편을 제기하니까.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너’만 조용히 하면 될 텐데.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존재들, 그들이 바로 페미니스트인 것이고 페미니즘은 그렇게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너 페미하냐”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믿을 수 없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이 질문은 기존의 “왜 이렇게 기가 세냐”는 질문과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 같다. 기 센 여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아온 나는 “너 페미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되묻곤 했다. “페미하는 게 뭔데?” 페미가 뭔지도 모르는 페미니스트. 그게 지금 이곳 여성들의 현주소인 셈이다. 이처럼 페미니즘은 이제 다양하게 언급되면서 학문 일상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에게 꽤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예술의 경우 많은 진통을 겪으며 그 논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류를 반영해 관련 도서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중견의 소설가도, 신인 소설가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이야기할 만 한 소설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중 두 편, 『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과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를 통해 최근 문학작품과 페미니즘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 해보려 한다.

먼저 김경욱의 『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은 총 아홉 편의 단편소설들로 이루어진 단편소설집이다. 그런데 이 소설집은 어딘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연작소설집으로 읽어도 무리가 없다. 특히 「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과 「경마학 개론」 그리고 「매우 그렇습니다」 세 편이 매우 그러하다. 이 세 편의 소설은 말하자면 어떠한 혐오에 대한 소설이다. 여성혐오와 외국인혐오 같은 것들. 그중 「매우 그렇습니다」는 꽤나 노골적으로 여성혐오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글이 진행되는 내내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마치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처럼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이 설정은 지금 현재 대한민국 여성들이 노출되어 있는 일상적 공포를 떠올리게 한다. 여성들은 언제고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노출되어 있지만 많은 이들은 그것이 과대망상이며 피해의식이라고 지적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친구가 영화 ‹샤이닝›의 주인공처럼 빈 화면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적는 행위를 통해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려는 시도가 마침내 마지막에 다다라 그녀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그렇습니다”는 서술로 끝나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또,언급한세소설에서중요한것은이작품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분모다. 그것은 바로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시선에 있다. 이들은 모두 화자는 모르지만 작가인 서술자는 아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이 명백히 여성혐오적 발언을 한다거나 외국인을 혐오하는 시선이 내재되어 있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서술자가 그 모름을 비틀어 보여주면서 화자와 서술자 사이에는 어떠한 틈이 생겨난다. 이 틈을 통해 독자는 스스로의 무지에 대해 무지한 화자를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틈’은 민지형의 장편소설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에서도 엿볼 수 있다. 화자인 ‘나’는 스스로가 꽤 괜찮다고 믿는 한(국)남(자)이다. 죽도록 사랑했던 옛 애인이 ‘메갈’이 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지만 그녀를 포기할 수도 없기에 그녀를 개화시키겠노라 다짐한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나 화자는 스스로가 얼마나 무지몽매한지 모르지만 서술자는 알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특유의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뿐만 아니라 두 소설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건 두 소설이 전형적인 ‘한남’의 시점에서 쓰였다는 것이다.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 시선들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라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시점의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김경욱의 소설들은 전반적으로 비슷한 구조로 진행되고 있으며 독자가 스스로 어떤 틈을 찾아 파고들기 전까지는 그저 중년의 남성 문인이 반복해왔던 여성-외국인 혐오 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 민지형의 소설은 진짜 심각한 문제를 파고드는 대신 ‘메갈’ 여친과 ‘한남’ 남친의 연애사를 에둘러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이 소설이 더욱 아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소설 곳곳에 담겨있는 문제의식이 증발해버린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 승준은 스스로가 꽤 괜찮다고 믿는 한남이지만 그가 진짜 괜찮아질 수 있는 가능성은 자신이 얼마나 가부장적인 집안의 산물인가를 인지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이내 사라지고야 만다. 또 승준과 여자친구의 대화를 통해서는 오늘날 여성혐오가 담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의 앞머리만을 읽어낼 수 있을 뿐이다. 금세 김이 빠져버린다. 마치 한창 사랑하던 때에 미국으로 떠나버렸던 승준이나 아일랜드로 떠나는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처럼. 이 소설이 조금만 더 과감했더라면, 처음의 재기와 패기를 잃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사실 이 두 작품을 가지고 페미니즘에 대해 깊고 심오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나의 오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페미’가 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져 왔던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말하는 사람이 페미니스트라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존재가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기꺼이 페미니스트가 될 것이라고. 세상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서 더 이상 페미니스트라는 호칭이필요없는세상을원한다고나는말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많이 가렵기 때문에 계속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것이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간지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가려움을 알려주고 싶다. 이것이 두 소설을 읽으며 내가 남기고 싶은 말이다.

글 전하림
1 이른바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불렸던 여성혐오 범죄를 함축하고 있다.
2 우리나라에서 ‘여성혐오’로 번역되고 있는 ‘미소지니(Misogyny)’는 단순히 여성을 ‘싫어하다’ 혹은 ‘경멸하다’라는 의미에서의 혐오를 넘어 여성을 없는 존재처럼 취급했던 배제의 역사부터를 그 기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혐오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로 느껴진다. 이에 따라 여성혐오라는 표현 대신 미소지니를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지만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혐오라는 표현이 대표적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이 글에서는 여성혐오라는 표현을 사용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