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좀 어떤가요? 저는 늘 당신이 힘들지 않기를 바랐어요. 제게 가장 중요한 건 당신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에요. 계속 그러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당신도 나도 알지만요. 작년부터 쭉 죽거나 미치지 않는 법을 연구하고 싶었어요. 저한테는 아주 중요한 과제였어요. 언젠가부터 제가 죽거나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거든요. 최근 몇 년간 죽거나 미치고 만 예술가들의 행간 혹은 궤적에서 찾고 싶었던 것은 죽음이나 우울, 광기의 징후가 아니라 삶에 대한 애착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려놓기 전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 그들이 작업도, 세상도 사랑해 마지않았다는 확신 같은 거요. 요새는 죽지 않으려면 미치는 방법밖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죽는 것, 정확히 말해 죽음을 부러 앞당기는 일은 부자연스러운 행위라고들 하잖아요. 생명체에 내재해 있는 자기보존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라고요. 광증 역시 정상을 벗어난 것으로 취급되어오곤 했어요. 정말 그럴까요? 미친다는 건 내 마음이 더 이상 상시적인 상태를 붙들고 살아갈 수 없을 때 일어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인데요.

당신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죠. 그런 당신도 작업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때가 있을 거예요. 절망의 주기를 맞닥뜨릴 때마다 저는 늘 파도가 연상돼요. 파도는 어째서 늘 당연하다는 듯이 밀려오고 또 물러나는 건지. 우리에게는 일상인 그 파도를 무엇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슬럼프? 광기? 광기나 죽음을 불러오는 현실의 장벽? 무한의 고리로서의 절망이 있다면 그 절망에 스스로를 휩쓸려 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이들이 있어요. 혹은 그 파고를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린 이들. 저는 종종 니진스키를 생각해요. 무대 바닥에서 뒹굴고 구르며 발레의 지평을 넓혀보이고자 했던 이가 일상으로 향하는 문을 닫아버리고 수면 깊숙이, 다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의식의 아랫바닥에 머무르기로 결정했어요. 황실 발레학교 시절부터 니진스키의 도약은 유명했지요. 그의 도약이 어찌나 높고 착지는 또 얼마나 완벽했던지, 뛰어오르면 한동안은 공중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착시효과를 자아낼 정도였대요. 발레 뤼스를 떠난 니진스키는 늘 그랬듯이 도약했지만 무대 한가운데가 아닌 현실의 벽에 계속해서 내던져져야만 했어요. 몇 번이고 내동댕이쳐진 뒤 니진스키는 자신을 절대 다치게 하지 않을 안전한 세계를 찾아 떠난 걸 거예요. 분열이 시작되던 시기에 니진스키가 쓴 일기에는 미치고 싶지 않고 죽음을 원치 않는다고, 삶을,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토해내는 분절된 언어들이 가득해요. 마찬가지로 무용인인 안은미를 떠올려 봐요. 안은미는 대중문화와 예술 춤, 전문 무용수와 비전문 무용수의 경계를, 시간 축과 공간 틀의 설계를, 설화적 인물에게 부여된 전형성을 깨는 걸 주저하지 않아요. 안은미의 무대에서 춘향은 민머리의 마흔 살 노처녀이고 바리데기는 남자가 되기도 해요. 안은미가 분출하는 에너지는 분명 광기로 보여요. 그 광기는 보는 이의 숨통을 틔우죠. 데뷔 30주년을 기념해 지금까지의 작업을 결집한 ‹안은미래› 전에서 관객은 보통의 전시 관람과는 다른 형태의 신체적 경험을 하게 돼요. 바닥에 한가득 깔린 비치 볼을 발에 걸리는 대로 걷어차면서 원을 그리며 안은미의 활동 궤적을 따라 가는 거예요. 고백건대 저, 그때만큼은 어린아이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어떠한 그물도 내 발목을 붙들지 않았던 그 시절처럼 뛰고 차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끝에 균형을 잡는 특유의 감각을 환기할 수 있었죠. 어쩌면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마음껏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실제 생활에서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시적 언어를, 분열의 언어를 떠올려요.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했던 주장과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떠올려요. 실재계라는 미지의 영역으로 헤엄쳐가기 위해, 그러나 그 파도에 떠내려가지는 않기 위해 내리는 닻 같은 언어들. 버지니아 울프와 실비아 플라스를 떠올려요. 저는 미치고 싶지 않아요. 잘 살고 싶어요. 좋은 작업을 해내고 싶고 그걸로 명성을, 내 방을, 돈을 얻고 싶어요. 하지만 미치지 않으면 외려 삶의 항상성에서 떨어져 나오게 될 거예요. 우리는 빠져나와야 해요. 상징계의 그물을 뚫고 가르지 않으면 안돼요. 줄을 타야 해요. 뜯어낸 그물로 새끼를 꼬아 상상계와 상징계와 실재계를 타고 내리며 오갈 수 있어야 해요. 줄을 타는 데는 대범함과 침착함이 동시에 필요하니까 내가 가장 잘 다루는 것, 내가 주력하는 매체를 가지고 줄타기를 시도할 밖에요. 제겐 활자밖에 없잖아요. 그렇다 하더라도 뉘앙스를 활자화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뉘앙스는 늘 비껴가거든요. 어째서 그것들은 손바닥 안에 머물지 않는 걸까요? 때로는 언어가 뉘앙스를 앞질러 마구 내달려가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어요. 나는 어디까지 건너가도 되는 걸까요?


어떤 예술가들은 눈에 보이도록 뚜렷한 분기점을 가져요. 어떤 작품은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고요.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시절의 단짝이었던 막시밀리언 슈미트호프에게 헌정했어요. 시신의 신원 확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해요. 막스는 핀란드의 외딴 숲에서 자기 머리를 총으로 쏘기 전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가장 최근의 소식을 전할게. 나, 나를 쐈어. 너무 화내지는 말았으면 해.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잘 있어.” 시대를 앞서간다는 이유로 큰 야유를 받았던 원본은 볼셰비키 혁명 기간 동안 불타 없어졌어요. 작곡가 본인조차 처음 썼던 악보를 완전하게 기억해 내지는 못했대요. 지금 우리가 듣는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많은 부분이 손질된 채 다시 태어난 거예요. 이유는 설명하지 않은 채 작별 인사만을 남겼던 막스처럼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 2번 또한 영영 닿지 못할 구역으로 건너가 버렸어요.

후세대 예술가들에 의해 계속해서 불려 나오는 작품도 있어요. 1960년에 제작된 김기영의 ‹하녀›는 ‹화녀›와 ‹충녀›, ‹화녀'82›로 이어지는 연작의 시작점이 되었어요. 동명의 작품인 임상수의 ‹하녀›와 봉준호의 ‹기생충›도 김기영의 ‹하녀›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들이죠. 중산층 가정집의 계단을 통해 나타낸 계급의 첨예한 분리와 내파(內裂)는 후에 계단의 미학으로 명명되는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했어요. 저는 ‹하녀›의 지적이 옳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계급이 무작정 다른 계급으로 도약할 순 없어요. 계단은 인위로 만들어진 연결고리이자 안전장치인 동시에 추락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도 해요. 층과 층을 잇는 듯 보이는 계단의 존재는 허위의 욕망을 품게 만들어요. 욕망을 감당하고 그 대가를 치르는 건 너무나 두려운 일이에요. 모두가 니진스키처럼 운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모두가 안은미처럼 마음껏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우로보로스를 기억해요? 입으로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은 정말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래요. 끊이지 않는 원의 고리를 맴돌다 주저앉고 마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렇더라도 당신과 나, 허공에 몸을 던지지는 말기로 해요. 계단을 밟지 않고서 뛰어내리는 행위를 지양하는 일은 죽거나 미치지 않고 예술인으로 살아남는 일의 필수적인 조건일 거예요. 죽거나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술작품이 사장되거나 이해받지 못할 영역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계단의 역할이 중요해요. 후세대 예술가들이 정전을 재해석하고 재현해 보이는 것 또한 계단이고 작업과 일상의 경계를 조율하는 일도 계단이에요. 줄을 탈 힘도, 용기도 없이 몸만 커져버린 우리더라도 계단을 딛고 잠깐은 허공에 머물 수 있는걸요. 끊임없이 계단을 놓고 오르내리고 건너다니면서 무한의 영역을 뛰어다니는 그 무엇을 유한한 다리로 쫓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 바로 예술인걸요. 지치더라도, 미치더라도 죽지는 말아요. 계단도 허공도 완전히 믿지는 말아요.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은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말지만, 그렇더라도 그게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그 모든 시도가 무위인 것도 아니잖아요.

당신이라는 텍스트를 읽어내면 당신을 설명할 수 있는 활자들도 읽히기 시작할 거예요. 당신 얘기를 대신할 수 있는 무수한 목소리들의 결합으로 내 회랑은 시끌벅적할 테죠. 한시도 그칠 일 없는 무한의 대화. 한편으로는 이해한다고 믿는 순간부터 지옥이 시작된다는 걸 알아요. 지옥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해가 있다는 것도. 그렇죠, 나는 당신을 몰라요. 당신이란 세계에서 내가 오를 수 없는 산도 있겠지요. 그렇더라도 당신은 제게 늘 위안이 되어주었어요.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깨끗한 것, 아름다운 것, 늘 자라고 있는 것을 떠올렸어요. 당신에게는 깨끗한 것과 아름다운 것만 들려주고 싶었고, 그런 당신에게 기대어 나 또한 변치 않게 깨끗한 것과 아름다운 것들, 그러면서도 계속 자라서 변화하는 것들을 믿어보고 싶었어요. 당신 등을 가만가만 두드려주고 싶어요.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모든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약속해요, 내 마음의 한 부분은 변함없이 당신을 위해 펴 놓은 자리일 거라고. 작은 공간일지라도 그곳은 늘 깨끗하고 아름다울 거예요.

글 이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