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부천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돈구 감독의 ‹팡파레›와 10월 방영 예정인 드라마 ‹방법›의 배우로서, 영화 ‹초미의 관심사›의 감독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남연우를 만났다. 사회와 사람들에게 의문을 던지는 영화감독이자 캐릭터의 행동 원리를 이해하는 연기로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배우. 영화는 함께 떠나는 여행이고 인생은 모험이라고 말하는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 김경수

비보이에서 배우로, 배우에서 감독으로
초등학생 때는 소극적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조용한 아이였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집에서 TV를 보다가 당시에 유행하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춤을 봤는데 “한 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교실에서 혼자 춤을 추고 있던 친구들을 만나 학예회에서 공연을 했다. 그때 받은 호응에 처음으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학생 때는 한국 최고의 비보이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하루에 6시간씩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매일 춤을 연습했다. 아버지를 통해 신문에서 비보잉 단편영화의 배우를 구한다는 기사를 봤고 그때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정작 촬영 때는 영화 작업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후 결과물을 보니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결과를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영화에 매력을 느꼈다. 구성원들이 공동 작업을 한다는 것이 가족이 생긴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군대를 제대한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배우로 일하던 어느 날 무대 위에서 관객들이 무섭게 느껴지더라. 이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이전 연극을 함께했던 조진웅 선배에게 자문을 구했을 때, 대학에 가서 연기 공부를 해보라는 조언을 받았다. 마침 그때 한예종 연기과 입시 기간이었는데 연습실도 없어 여관에서 진웅이 형이 입시 연기를 봐줬다. 연극원 연기과 입시를 볼 때는 절실함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나중에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단편 영화를 찍고 연출하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내 머릿속에만 있던 세계가 화면으로 완성되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가시꽃›, 2012

들꽃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가시꽃›
‹가시꽃›은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관한 이야기다 보니 부담감이 컸다. 이돈구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감독의 확신을 믿고 시작하게 되었다. 극을 힘 있게 이끌어나가는 주인공 성공이라는 캐릭터는 매사에 수동적이라 나 자신의 적극적인 성격과는 많이 다르다. 배우로서 행복할 때가 실제 나와 반대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다. 가장 집중했던 지점은 성공의 행동 원리를 찾아서 나열하는 것이었다. 성공은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고 어떻게 걷고 앉을 것인가 등등을 계획하고 반복적으로 연습했다. ‹가시꽃›은 총 제작비가 300만 원인 영화다. 감독, 배우, 제작팀 모두가 영화를 절실히 하고 싶었기 때문에 완성할 수 있었다. 카메라 한 대, 붐 마이크 한 대가 전부였던 현장은 열악했지만 모든 구성원들이 이 영화를 찍고 있다는 것을 행복해했다. 함께 열흘간의 캠핑을 한 기분이었다. 제1회 들꽃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이기도 해서 더 애착이 간다.

‹분장›, 2016

첫 연출작 ‹분장›과 성 소수자들의 목소리
‹분장›은 타인에게서 우연히 들은 “성 소수자를 이해한다”는 말에서 시작한 영화다. 이 문장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했고, 이해한다는 말이 단지 말뿐이 아니라 실제 본인의 생각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과장이 없고 누구에게나 폭력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적 접근을 위해 성 소수자인 친구에게 시나리오 초고부터 검수를 받았다. 시나리오를 완성했을 때도 직접 연출을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민감한 내용이기 때문인지 주변의 감독들이 고민을 많이 하더라.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말이 진정한 생각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확신이 있었다. 배우로서의 이미지에 대해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단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고, 여러 방면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과감하게 연출을 맡게 되었다. ‹분장›에 트랜스젠더 역할이 있어서 소개받은 분과 동고동락하며 자문을 많이 받았다. 촬영 현장에서도 과장된 것은 없는지, 배우가 사용하는 말투나 단어는 어색하지 않은지 세세하게 도와줬다. 원래 연기를 마치면 배우는 감독에게 확인을 받는데, 극 중 트랜스젠더인 이나 역을 연기했던 홍정호 배우와 함께 트랜스젠더분에게 검사를 받기도 했다.

연극원에서의 연기훈련과 은사님들과의 조우
원래 연기과의 ‹연기실습› 수업은 한 학기마다 담당 교수가 바뀌는 시스템이지만 우리 06학번만이 담임제로 시행되었다. 이때 최용진 은사님을 만났다. 입학 후 2년 동안 인간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행동 원리에 대한 훈련을 중점적으로 했다. 인물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는 개연성에 대해 고민하는 수업이었는데 이것이 후에 이야기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떤 상황에 인물이 맞닥뜨렸을 때 이 인물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서 시작해 인물만을 쫓아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연기에 푹 빠져들게 된 계기와 계속해서 이야기를 쓰는 힘은 모두 최용진 선생님의 수업에서 비롯되었다. 최지연 선생님의 ‹움직임› 수업은 틀을 깨고 자유로워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생각한 것을 바로 실천하게 하는 실행력은 여기서 온 것 같다. 강혜연 선생님의 ‹카메라 연기› 수업은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가 그 이상으로 카메라의 위치나 촬영에 따라 같은 연기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배웠고 콘티를 짜야 하는 이유와 방식 또한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후 과감하게 연출을 하게 된 계기가 되어 은사님들께 무척 감사하고 있다.

‹팡파레›, 2019

공동 작업은 여행과도 같다
합이 잘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행복한 이유는 영화의 공동 작업이 함께하는 여행과 같기 때문이다. 일단은 모두의 목적지가 같아야 한다. 처음에는 안 맞는 부분이 있어도 서서히 맞춰가는 것과 다 같이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앞서 말했던 최용진 선생님과의 수업에서 사물에서 시작해 생각, 사람, 관찰로 이어지는 단계가 있었다. 재학 시절에 동기들과 작품에서 한번 실행해보자며 뭉쳤다. 수업에서 배운 연기를 바탕으로 ‹1호 터널›이라는 창작 연극을 했는데, 장인섭 배우와 함께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연기도 했다. 그때 동기들과 “10년 후에 이 연극을 다시 하자”는 얘기를 했었는데 내년이 바로 10년째 되는 해다. 부모 없이 자란 일호라는 소년이 처음으로 사회에 발을 내딛게 된 곳이 터널 공사 현장이고 그곳에서 부모와 같은 인부들과 교감하는 이야기인데 내년에 대학로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현장에서의 남연우
상업 영화나 장편 영화에 단역으로 캐스팅되었을 때는 장치로서만 작동하는 연기를 해야 했는데, 직접 영화를 연출하며 연기를 할 때는 직접 꾸린 팀과 함께 작업하는 것과 극을 스스로 이끌어 나간다는 것에 매 순간 쾌감이 있다. 다만 독립 영화의 경우 제작비가 적고 여건이 어렵기 때문에 마음에 차지 않는 장면이 나와도 넘어가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배우일 때와 감독일 때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배우로 현장에 있을 때는 현장을 더 즐기고 여유가 있는 반면 연출을 할 때는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고 내재해 있는 잠재력까지 끌어내려고 노력한다. 그 때문에 감정과 체력 소모가 많아도 더 생생히 살아있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감독을 해 본 뒤로는 감독의 어려움에 백분 공감하게 되어 배우로 일할 때 감독을 최대한 배려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곧 공개될 차기작 ‹초미의 관심사›에서는 연출만을 맡았다. 엄마와 서먹서먹했던 딸이 동생의 실종 소식에 엄마와 함께 동생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다. 이수광, 박세중, 허정도 배우 등 연극원 출신의 배우들과 함께했다.

인생의 모험가
인생은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첫 모험은 ‹가시꽃›이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초청받았을 때, 제작사에 부탁해 귀국편 비행기 표를 미루고 40일간 무계획으로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이때 내 안에 있던 틀이 많이 깨졌다.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졌고, 개성을 표현하고 존중하는 것이 자신을 계속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는 꼭 먼 곳이 아니더라도 적극적으로 여행하고 있다. 이 모험 이후로 낯선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에도 두려움이 없어졌다. 궁극적으로는 나라는 사람을 찾는 것이 모험의 목표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파악하고 정확한 말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의식적으로 말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으로 늙고 싶다.

인터뷰 막바지에 그는 “마음이 뭘 말하는지를 듣고 과감하게 실행하셨으면 좋겠다. 이미 있는 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없이 시작했을 때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말 뒤에 “인터뷰를 하면서 감사한 사람들이 많이 떠올랐고, 스스로를 찾고 싶어하는 나에게 인터뷰가 많은 도움이 되어 또 감사하다. 모두 행복하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초미의 관심사›뿐 아니라 앞으로 그가 펼쳐 보일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많은 이들에게 닿기를 바란다.

글 김수림 | 사진 김경수 | 영상 김건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