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기대했던 만큼 기쁜 소식을 들고 온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 세계적인 콩쿠르 무대에서도, 삶의 고민들 앞에서도 차분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그를 만났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어디에서 온 걸까. 그 마음은 무엇을 향해 가고 있을까.

ⓒ 김경수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3위 수상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는 지금까지 도전했던 콩쿠르들과는 다른 차원의 콩쿠르여서 큰 기대는 안했어요. 구체적인 목표는 ‘파이널만 가자’.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는 크게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다만 작은 에피소드는 있었어요. 파이널에서 두 번째 곡인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연주하는데 제가 시작한 동시에 관중석에서 한 분이 고함을 지르셨어요. 많이 놀랐겠다고 주변 분들이 걱정해주셨지만 너무 긴장하고 있었던 건지 별 문제 없이 지나갔고, 제가 특별히 피해를 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파이널에 올라간 러시아 연주자 두 명 모두 정말 잘했고 저도 그들의 연주를 너무 잘 들었거든요. 마지막 레슨 때 김남윤 선생님께서 잘 다녀오라고 안아주시면서 편하게 하고 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대로 하고 온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요. 그래서 세 번의 연주가 다 기억에 남아요. 특별히 무슨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러시아 관객들이 집중을 잘해주시는 게 느껴졌어요. 다시 한번 이곳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이번 콩쿠르에서의 경험이나 순간들 하나하나가 앞으로 큰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9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 파이널 연주 장면 ©Tchaikovsky Competition

바이올리니스트로의 발걸음
시작은 7살에 했지만 사실 초등학교 4학년 전까지는 특별히 연습을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당시 저는 김포에 살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는데 11살에 처음으로 콩쿠르를 나가게 됐죠. 생각보다 큰 대회였고 예선에서 탈락했어요. 그 순간 부정적인 생각보다 좀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조금씩 연습량을 늘렸어요. 거기서부터 시작했던 것 같아요. 2011년에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 처음 들어갔어요. 저는 예비학교에 다니던 친구들보다 못 미치는 실력이라서 영재교육원 입학시험 자체가 도전이었죠. 운 좋게 들어가게 되었는데, 들어가서 보니 너무나 무섭게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 친구들과 매주 토요일에 생활하고 이야기하고 오케스트라를 하면서 많은 걸 흡수했던 것 같아요. 영재교육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고마운 존재죠.

과다니니 파르마와의 만남
음악원에 입학한 해인 2016년에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오디션을 거쳐 지금의 악기인 1763년에 제작된 과다니니 파르마와 만났어요. 2015년 말 공고가 나서 준비를 했는데 당시 저는 제 악기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응시를 했죠. 오디션에 합격하고 나서 다른 합격자들과 함께 악기를 고르기 전에 모든 악기를 연주해볼 수 있었는데 처음부터 이 악기가 마음에 들었어요. 일단 색이 제일 예뻤어요.(웃음) 원래 연주하던 악기와는 차원이 달라서 튜닝할 때 소리부터 귀에 꽂혔던 것 같아요. 소리도 되게 맑고요. 악기는 몸과 잘 맞아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도 별 문제가 없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간을 함께했죠.

2016 루마니아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연주 모습 ©George Enescu International Competition

배움의 시공간 속에서
제가 음악을 하면서 가져야 할 어떤 자세, 같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인생을 살아갈 때 필요한 많은 것들을 학교에서 배운 것 같아요. 김남윤 선생님과도 오랜 시간 함께 지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웠어요. 특별히 어떤 말 한마디가 아니라 선생님이 평소 생활하시는 것과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마인드, 중요한 연주가 끝나거나 힘든 상황일 때도 절대 느슨해지지 않으시는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또 학교에서는 바이올린이나 음악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고, 다른 환경에서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함께할 때 나오는 시너지를 느꼈어요. 사실 다른 전공 분야에 있는 학생들과 친해지기가 쉽지는 않더라고요. 그런데 저번 학기 교양수업 때 조별 과제를 하면서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이야기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평소에 서로의 분야에 대해 궁금했던 점들을 조심스럽게 물어보기도 하고, 전혀 몰랐던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되기도 했어요. 인간적으로 여러모로 배운 것 같아요.

어둠 속을 헤쳐나가는 법
전에는 저한테 슬럼프가 있는 건가 싶었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2017년에는 제가 하려고 했던 모든 게 잘 안 됐더라고요. 전반적으로 무엇이든 제가 원하는 만큼 하지 못했던 해였는데 그때가 슬럼프이지 않았나 싶어요.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걸 하는 것보다도 하던 걸 계속하는 게 제일 효과적인 것 같아요. 사실 슬럼프를 겪게 되면 별 생각이 다 들잖아요. ‘지금 연습하는 게 도움이 되는 건가’, ‘이렇게 살면 되긴 하는 건가’ 등 여러가지 많은 생각이 드는데 큰 의미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제가 하던 걸 더 묵묵히 하면 언젠가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렇게 극복이 됐어요. ‘악기를 안 했으면 뭘 했을까’ 하는 생각은 심심할 때 한두 번 해본 게 다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바이올리니스트로 살아가고 싶은 이유는 일단 제가 악기를 좋아해서죠. 이걸 뒷받침하는 이유가 있다면, 제가 스스로를 소개할 때 바이올린을 빼고는 할 수 없어서예요. 어느덧 제가 살아온 시간 중 반 이상을 함께했기 때문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어요. 제 삶에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바이올린을 그만두는 일은 없을 거예요.

행복을 주는 것들
독일의 브람스나 베토벤 곡들을 엄청나게 좋아하고, 색깔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드뷔시, 라벨, 프랑크 등 프랑스 음악들도 잘하고 싶어 하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연주자를 꼽자면 옛날부터 즐겨 들었던 니콜라이 즈나이더예요. 어릴 때 한 번 듣고는 소리가 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남들과 다른 분위기를 내는 능력이 멋있어서 영감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그런데 보통은 곡마다 인상 깊게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있어서 제가 하는 곡에 따라서 좋아하는 연주자들이 바뀌는 것 같아요. 음악 외에는 사람들 만나는 거 좋아해요. 저는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인데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땐 그런 생각이 별로 안 들어요. 말동무라는 존재가 저한테는 개인적으로 큰 작용을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종종 혼자 시원한 날씨에 걸으면서 음악도 듣고 게임도 해요. 그럴 때 음악은 클래식 안 들어요.(웃음) 옛날에 처음으로 듣게 된 팝이 제이슨 므라즈와 마룬파이브 곡들이었는데 거의 외우다시피 들었어요.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가수들이에요. 요새는 어떤 가수의 노래보다는 뮤직 앱 자체에서 분위기에 따라 세팅해 놓은 플레이리스트들이 좋아서 즐겨 듣고 있어요.

2019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 파이널 연주 장면 ©Tchaikovsky Competition

끝없는 음악적 여정
섬세하고 진지한 연주를 한다는 말을 몇 번 들었는데, 저도 그렇게 되고 싶기 때문에 동의해요. 바이올린을 잘하는 사람이야 워낙 많으니까 단순히 악기 잘하는 것 말고 음악을 대하는 자세나 다가가는 방향에서는 저만의 색깔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연주할 때는 최대한 제가 들려드리고 싶은 노래, 하고 싶은 얘기를 하려고 해요. 그거 말고는 ‘이렇게 해야 조금 더 진실한 연주가 나오겠다’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어디까지 갈 것이다’라는 목표도 정해놓지 않았어요. 가본 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 가면 되겠지’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콩쿠르든 연주든 어떤 성과가 날 때마다 그때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적인 목표는 ‘다시 찾고 싶은 연주자’, ‘다른 곡에서는 어떤 모습일까’하는 흥미를 주는 연주자가 되는 거예요. 다채로운 연주를 하고 싶어요. 특별히 도전해보고 싶은 건 바르톡이나 쇼스타코비치 등 근현대에 가까운 작품들이에요. 아직 많이 공부하지 못해서 많이 연습해야 할 것 같아요.

내일을 위한 준비
학교를 한 학기만 남겨둔 상황이어서 이후에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지 고민이에요. 단순히 ‘무엇을 할지, 어디에서 살지’ 같은 것보다는 최근에는 ‘어떻게 살아야 좀 더 나은 사람이 될지’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아무래도 졸업 후에는 환경이 바뀔 것이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도 조금씩 바뀔 수밖에 없을 텐데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고 적응하고 살아가야 할지 그런 고민들이 있어요.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고민이죠. 아마 어느 학교에서든 석사를 하게 될 것 같긴 해요. 유럽으로 갈 것 같은데 가서 지낼 준비도 나름대로 조금씩 하고 있고요. 앞으로도 계속 성장하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넓은 세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 그에게는 매 순간 최선의 연주를 들려주고자 하는 노력과 인간으로서 진실하기 위한 고민이 있다. 이런 그를 지지해주는 스승과 친구들도 있다. 지금까지의 성장을 운 좋게 이루어왔다고 거듭 말하던 그가 터뜨린 불꽃은 예상할 수 없는 결과도, 우연도 아니었다. 묵묵한 열정이 만들어낸 이 불꽃은 꺼지지 않고 점점 더 찬란한 빛을 발할 것만 같다.

글 황은율 | 사진 김경수 | 영상 조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