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4월 건축가 김수근은 공간사옥 지하에 ‘공간사랑’이라는 소극장을 만들었다. 이 작은 공연장은 무용을 포함한 여러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다. 실험적이고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대거 등장시켜서 무용계가 안무가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이때부터일까? 안무는 움직임을 다루는 것 이상의 다른 재능이 필요하다는 소문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

당시 무용계에 작가의식을 가진 안무가들이 드물었다. 그 이유를 무용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 추측해보자. 스승은 몸을 직접 움직이며 가르치고 제자는 그를 살피고, 관찰하고, 따라하며 배운다. 악보나 설계도면이 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이 반드시 동반 된다. 이 과정을 거치는데 시간이 오래 흐르거나 전통춤 같은 경우는 평생이 걸리기도 하다. 그 시간들 속에서 기준이 되는 몸을 따라가고, 부대끼며 많은 정보와 느낌들을 주고 받다보면 개인의 의식과 스승의 의식이 혼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Art Project BORA & Guests› 중 ‹꼬리언어학›, 사진: Elise

작가로서 안무를 실험한다는 것은 이 흐름을 거슬러 나름의 관점으로 질문을 던지며 방향성을 구축해 나아가는 것이다. 나도 안무를 공부하면서 나의 신체를 이해하고 습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전통춤을 모방하는 대신 신체가 가진 신경조직 그리고 근육 체계 등을 공부하고 그것에 나의 마음과 정신을 연결시키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리고 지난 7월 대학로 예술극장에서 ‹Art Project BORA & Guests› 공연에 오른 무용수들에게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일지를 목격했다. 키가 작고 다리가 짧은 남자 무용수의 아랫배에서 보이는 굴곡이 진동한다. 고양이의 꼬리처럼 휘어지는 여자 무용수는 조용히 부드럽게 움직이다가 갑자기 전갈의 꼬리로 찌르듯이 공격적으로 변한다. 단체의 대표 레퍼토리이기도 한 ‹꼬리언어학›은 고양이의 꼬리언어와 제스처를 모티브로 한 움직임들이다. 그 움직임들은 마치 여성의 몸이 가진 곡선과도 닮아있다. 이스라엘 출신 안무가 샤하르 빈야미니의 작품 ‹실리콘밸리›에서의 몸은 같은 무용수임에도 불구하고 좀 더 당당한 여장부처럼 느껴진다. 아트 프로젝트 보라의 색깔이라 해야 할까? 몸뿐 아니라 동작, 의상, 무대 소품에서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함이 단어로만 표현되기에는 더 섬세하게 느껴진다. 또한 샤론 프리드먼의 작품인 ‹낙원›에는 2명의 남성무용수가 등장한다. 남성 무용수들의 땀 범벅된 몸으로 우정을 위트있게 연출하여 여성성이 강한 화법을 가진 단체의 특성을 다양한 언어로 확장시킨다. 무용수는 자신의 근육과 함께 생각하고 말하며 표현한다. 몸짓은 춤의 본질이자 언어이자 육체와 함께 표현된 카타르시스이다. 그 카타르시스는 곧 육체의 기운이 뻗어나는 것이다.

‹포스트 아파트› ©두산아트센터

육체의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되는 피부 밖으로 몸을 바라보면 한 채의 집 같기도 하다. 그곳에 무엇이 거주할까? 안무가 정영두는 지난 6월 두산아트센터에서 ‹포스트 아파트›를 총 연출하고 안무했다. 건축가 정이삭, 작곡가 카입 그리고 영화감독 백종관이 함께했다. 다른 장르의 예술이 서로를 이해하고 협업하여 만들어진 무대에서 퍼포머들과 달리 관객은 지정석을 부여받지 못한 채 떠돌아다닌다. 아파트가 상징하는 집을 돌아다니다 보니 퍼포머들의 행위가 마치 집이란 공간에서의 나의 모습 같다. 작곡가가 들려주는 소음과 건축가의 강연을 통해 어릴 적 지냈던 곳이 떠오르고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주거 공간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금 나는 왜 이곳에 거주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딜 향해 가야 하지?’ 그의 스코어는 이렇게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것을 대답하는 과정에서 불변하는 이치를 깨달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음악과 건축에서 악보와 설계도가 있다는 건 확실한 구조를 가진다는 것인데, 그 구조들은 어떻게 안무 작업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정영두는 실험을 통해 무언가 발견하면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어 관객과 향유한다. 작가가 발견할 때 느낀 카타르시스가 작품에 담기고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나는 이번 작품에서 주거공간에 대해 갖는 불안감을 마주하며 그 카타르시스를 슬프게 경험했다. 이런 실험이 그에게 처음은 아니다. 이미 다른 예술 장르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무용을 번역해 온 바 있다. 그는 항상 탐구하고, 그래서 작품마다 새로운 춤을 만날 수 있다. 어쩌면 현시대 무용이 가져야 할 방향성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안무가 정영두의 방향일 뿐이다. 참고할 수는 있지만 모두의 목적지는 아닐 것이다.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 ©국립오페라단

음악을 시각화하는 것은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인 안성수의 것이다. 점점 다양한 음악을 시각화하는 것에 도전하는 그는 자신의 작업에 관해 강한 장인 정신과 긍지를 품는다. 정영두 안무가의 움직임에서는 작은 동작이나 디테일들이 보이는데 그것을 수행하는 무용수들의 몸에서 또한 아주 엷은 호흡이라든가 손가락의 미세한 놀림이 느껴진다. 반면 안성수 감독이 연출한 쿠르트 바일의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에서 무용수들의 손가락은 뻗거나 버리는 동작이 많이 보인다. 그들의 팔과 손끝은 선율을, 발은 리듬을, 그것을 매혹적으로 연결하는 허리 움직임이 어우러져 음악을 몸짓으로 표현한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으로 안무를 하는 그에게 쿠르트 바일의 음악은 흥미로운 것처럼 느껴졌다. 일반 오케스트라에 들어있지 않은 악기들이 사용되고 래그타임, 카바레 등 여러 가지 분위기가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성수 감독은 고전음악뿐 아니라 국악, 전자음악 등 장르를 불문하고 자신의 음악 그릇을 점점 넓히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같이 맹수 같기도 하고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같이 절제하고 단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매번 그의 작품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과 귀가 지치곤 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과 경쾌한 스윙 리듬으로 현대적 움직임을 표현한 ‹스윙›에서는 끝까지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그가 안무를 할 때 대칭과 반복 같은 쉬운 선택을 피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동작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이를 의식하면서 그 호흡을 따라가다 보니 많은 변화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며 움직임을 만들어가는 그처럼 안무하고 싶다.

지금의 공간사랑은 어디일까? 한 곳만은 아닐 것 같다.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대에서 수많은 실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때로는 실수도 하며 교훈과 지침을 얻는 단체들이 있다. 그 경험의 흔적들이 쌓여 제법 성숙해져 있다. 또 아직은 방향성이 너무 다양해서 어디로 갈지 정하기 위해 고민하며 천천히 움직이는 단체도 있다. 이들이 실험하는 몸짓과 그 무대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까지 펼쳐 보이기를. 함께 지켜보며 기쁨을 향유할 수 있기를.

글 서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