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 어찌 보면 전혀 새롭지 않은 단어다. 그러나 창조, 혹은 예술과 관계된 것이라면 숙명적으로 따라붙는 단어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은 오랜 역사에 걸쳐 새로움을 추구해왔다. 크게 보면 하나의 사조가 다른 사조로 전환될 때, 우리는 이전에 없던 경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누가 그 새로움의 중심에 있었는가에 대해 탐구한다. 작게 보자면 한 명의 예술가가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만들어낸 작품들에서 어떤 경향이 나타나고, 그에게서 어떤 변화가 목격되고, 그가 남들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술가는 주체적인 것이든 암묵적인 강요에 의한 것이든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절대적이고 완전한 새로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언제나 예술의 영향을 받고, 그 이전의 시대와 무관할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천재가 내려와 이것이 이 시대의 새로운 음악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양음악사에서 바로크와 고전주의를 가르는 건 바흐의 죽음이 아니다. 그 당시에 존재하던 음악가들 역시 주변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으며, 기술적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 일종의 음악적 어법은 공유하나 또 그 안에서 각자의 새로움을 찾아나서고, 이런 작은 움직임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이 되고, 후대에서는 그 움직임에 이름을 붙인다. (물론 영향력 있는 개개인들이 분명하게 존재하며, 이들의 역할이 작았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함은 아니다.) 즉 예술에서 새로움이라는 건 명확하게 선을 긋듯이 만들어진다기보다 조금씩 무한히 확장되는 것에 가깝다. 나선형의 계단이 무한하게 늘어나듯, 뫼비우스의 띠가 만나지 않지만 제자리를 계속해서 돌듯이 말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과거를 재현하기도 하고, 이미 익숙한 것을 새롭게 포장하기도 하며, 다른 분야와의 경계선을 넘나들기도 한다.

한예종 역시 시도, 도전,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한다. 심지어 학교 출신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새로운 얼굴이라는 것을 담보하는 경우도 생긴다. 때로는 역으로 그 출신만이 강조되거나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다음의 뮤지션들은 학교 출신임이 강조되지도 않았으며, 일부는 그들의 전공에서 정통적인 방법으로 이름이 난 사람들이 아니다. 대중음악 씬에서 활동하는 다음의 뮤지션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나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는 난데없는 경매가 펼쳐졌다. 최우수 포크 노래 부문에서 상을 받은 ‘이랑’이 자신이 받은 상패를 즉석에서 경매에 부쳤고, 50만 원에 낙찰되었다. 어찌 보면 하나의 퍼포먼스로 인식될 수 있는 이 경매는 여러 시사점을 불러온다. 과연 음악 시상식이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그 시상의 권위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말이다. 나는 이 행위가 그가 상을 받은 앨범인 ‹신의 놀이›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의 놀이›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음반임을 자처하며 노래가 주는 힘이 무엇인가 되짚게 만든다. 이랑의 가사들은 살아가는 삶을 깊게 관통한다. 그의 노래는 듣는 이로 하여금 편히 들을 수 없게 만들며, 끊임없이 가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동시에 사람들과 음악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그것이 삶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작용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때로 누가 던진 한 두 마디가 오랜 시간 맴돌 듯이 그가 던지는 한 줄 한 줄의 가사들은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삶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또한 전통적 앨범의 판매방식에서 벗어나 앨범 대신 책과 음원의 주소를 공유하는 방식을 선택하거나, 음원사이트의 가사를 제공하지 않는 방식 등 음악을 판매하고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근래 이랑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시도 중 하나인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와 같은 글 구독 서비스는 공동체와 글이 지닐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까지 보여주고 있다.

잠비나이 연주 모습

한편으로 새로움이란 어떤 경계선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음악과 포스트록이 결합된 밴드 ‘잠비나이’의 경우 전통예술원의 학생들이 모여 만든 밴드였다. 이들이 처음 모일 때만 하더라도, 누군가는 ‘퓨전’국악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이 보여준 음악은 전혀 다른 제3의 것에 가깝다. 대체적으로 연주 음악이 주가 되며, 즉흥성이 주요한 요소가 되고 대중음악 안에서도 예술성이 극도에 다다른 포스트록은 미묘하게도 한국의 전통음악과 맞닿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그 때문에 이들의 음악은 단순히 서양음악 음계나 코드에 국악기를 그저 얹기만 한 음악이 아니라 대체될 수 없는 잠비나이의 음악을 탄생시킨다. 이들이 계약한 벨라 유니언이 실제로 소위 말하는 인디밴드들과 계약하는 레이블이라는 점 역시 이들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전통음악의 입장에서 이들은 이단아일 수도 있고, 동시에 전통음악의 새로운 성공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반면 인디록의 팬들이나 대중 음악 평론가들은 잠비나이를 사실상 포스트록 밴드로 인식한다. 이런 여러 해석의 여지가 나오는 것 역시 잠비나이가 모호한 경계 선상에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자리를 개척했기 때문이 아닐까.

미미시스터즈, ‹우리 자연사하자›

때로는 과거의 것이나 가장 기본으로 돌아감으로써 새로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미미시스터즈’는 과거에서 새로움을 발견한 그룹이다. ‘시스터즈’로 상징되는 과거 걸그룹의 계승을 표방하는 이들은 음악부터 시작해 외적인 스타일링, 제스쳐까지 하나하나 철저하게 컨셉을 유지한다. 물론 복고의 귀환은 음악이나 여러 대중산업에서 자주 활용되는 어법이다. 복고는 그저 과거의 것에 머물기만 할 때에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재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미시스터즈의 가사들은 과거형이 아니다. “너무 열심히 일하지는 마, 일단 오래 살고 볼 일이야”라는 가사처럼 이들은 현대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복고 컨셉과 지독히도 현실적인 가사들은 묘한 아이러니를 일으키며 다시 한번 눈길이 쏠리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어떤 순간에는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큰 울림을 만들기도 한다. ‘정밀아’의 음악은 복잡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목소리와 가사, 그리고 기타의 선율이 중심이 되는 음악은 어찌 보면 정통적인 대중음악의 줄기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름다움이 되는 순간들을 우리는 목도한다. 가장 익숙한 것에서 발견하는 새로움. 그것이 음악이 갖는, 노래가 갖는 가장 큰 힘이기도 하다. 정밀아의 음악은 그렇게 조용하고 간결하지만 묵직하게 맴돈다.

무키무키만만수, ‹2012›

정반대로 ‘무키무키만만수’처럼 당시 거의 없던 소리를 들고 나온 팀도 있었다. 괴성에 가까운 목소리로 노래하던 이들은 인류에겐 아직 이른 노래로 아직까지 회자되기도 한다. 이들은 때로는 유머처럼 소비되기도 하나, 동시에 단순한 유머만으로 남은 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무키무키만만수는 대중들로 하여금 과연 음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재고해볼 수 있게 만들며, 앨범 ‹2012›가 발매되었던 당시 엇갈리는 평가를 받았으나 그 엇갈림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지점을 선사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무키무키만만수의 멤버였던 만수는 ‘이민휘’라는 이름으로 ‹빌린 입›이라는 앨범을 내기도 했다. 사람들이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를 원해 LP로 냈던 이 음반은 하나의 주제와 흐름으로 얽혀 있다. 퍼포먼스의 의미 또한 가졌던 무키무키만만수 때의 음악과는 다르게 감상에 더 의미를 두는 전통적 앨범의 재미를 엿볼 수 있다.

이민휘, ‹빌린 입›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을 통해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이들도 있다. 전문사의 뮤직테크놀로지 전공의 경우 소리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다채로운 접근을 보여주는 시도를 하고 있다. 또한 영상 매체와의 결합 역시 자주 이뤄지는 분야이기도 하다. 밴드 ‘못’과 ‘나이트오프’라는 팀에 속한 ‘이이언’은 색채는 분명한 뮤지션임에도 속한 팀에 따라 그 음악을 감싸는 방식이 달라진다. 전반적으로 밴드 사운드에 기초를 둔 못과 나이트오프의 음악과 다르게 이이언의 솔로 앨범에서는 철저하게 프로그래밍을 기반으로 한 사운드만을 사용하며 ‘5 in 4’처럼 가사와 노래가 구조적으로 얽혀 들어가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 섬세하게 조각된 전자음악 사운드는 세상에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던 소리들을 만들어내며 일종의 가상 세계를 청자에게 보여준다. ‘GRAYCODE, Jiiiiin’의 작업물 역시 테크놀로지가 음악에 어떻게 활용되고 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들은 소리를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긴 시간의 음악을 한순간으로 압축하여 소위 시간예술이라고도 불리는 음악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거나 시각적 영역을 청각적으로 접근하는 작업 등을 통해, 음악을 듣는다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대중음악과 예술 작품의 경계선에서 음악이 무엇인지, 우리가 듣는 것은 무엇인지 반문하는 셈이다.

GRAYCODE, Jiiiiin, ‹10^-33cm›

현대의 음악은 그 경계를 나누기 모호하다. 예술성과 대중성, 작품과 상품은 더 이상 절대적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이제는 한 분야를 가르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경계는 희미해지고, 다채로운 작업들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때로는 역사가 반복되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한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아주 작은 다름을 찾고자 하고, 세계는 그 다름들이 모여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

글 윤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