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후 1시가 되었다. 7월 2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캠퍼스 영화전용관 케이시네에서 열린 ‘인더스트리 매칭 데이’는 영상원 영화과 연출전공 학생과 영화 제작자가 만나는 자리였다. 자신의 장편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12명의 영화감독이 극장 단상에 오르는 모습에서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투수가 공을 던지기 직전의 긴장감 어린 표정을 감지했다.

4년 전, 무더운 여름을 지나 상암동 건물이 내려다보이는 회의실에서 20명 가량의 대학생 기획 인턴이 피칭2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번 기회로 삶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획팀장과 부서 사람들, 멘토가 스크린을 두고 우리 앞에 모여 있었다. 나는 투수가 포수를 향해 공을 던지듯 내 작품을 그들에게 내보였다.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살피며 그들의 눈을 마주치면서 이야기하려 노력했다. 정규직 전환을 꿈꾸는 나는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메이저리그로 스카우트되길 바라는 선수와 같았다. 야구 스카우트가 선수의 투구율과 신체조건, 잠재적인 가능성을 점치듯 그들은 내가 가진 이야기의 발전 가능성을 보았다.

공을 던진다는 야구 용어인 ‘피칭’이 산업 전반에 쓰이는 발표 방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청중의 시각과 청각을 사로잡는 발표자의 능력이 요구되기 시작한다. 이제 영화는 제작사로 감독이 직접 찾아가 자신의 작품을 제안하는 일대일 미팅을 넘어 많은 사람 앞에서 작품을 홍보하는 방법으로 변화한다. 피칭은 1984년 캐나다의 반프페스티벌에서 기획안 작성 방법과 발표를 교육하는 공개 포럼에서 유래했다. 포럼은 점차 감독이 영화 관계자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투자, 제작을 받는 자리로 발전했다. 창작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무대가 필요하듯 피칭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관문이자 출발점이 됐다. 한국 영화사가 100년을 지나 거대해진 영화 시장에서 방식의 변화는 감독이 생존할 수 있는 전략적 수단이 됐다.

올해 상반기 전체 극장 관객수는 1억 932만 명이며, 그중 한국 영화 점유율은 52%로 우리나라 관객들은 여전히 한국 영화를 선호한다.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은 제작·투자사가 잠재적인 인재를 가진 교육 기관의 재학생 또는 졸업생에게 이어진다. 2012년부터 산학협력을 추진해온 영상원은 개발과 공모, 제작사의 의뢰를 통해 학생 제작사를 설립하거나 외부 제작사와 협업하는 방법을 통해 장편 영화를 제작·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그러한 결과로 <돌연변이>(2012)와 <도희야>(2012)의 해외 영화제 진출을 시작으로 <우리들>(2013), <싱글라이더>(2013), <영주>(2016), <선희와 슬기>(2016)를 통하여 매년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평일 오후에 열리는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60명 정도의 영화 제작사 관련 인사가 극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든 리허설을 마친 감독들은 이제 무대에 오를 준비를 마쳤다.

이번 행사는 70편의 시나리오 중 제작사와 투자사, 학교 관계자 심사로 12편을 선정한 뒤 4개월간의 준비 기간을 거쳤다. 순서는 한 섹션마다 네 작품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총 세 섹션으로 나눠 진행되었다. 한 감독에게 주어진 시간은 8분. 발표가 끝난 뒤 피드백을 의뢰받은 영화 관계자가 발표하고, 감독에게 질의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영화 <제인>으로 행사에 참여한 정혜원 감독은 “일반 영화제에서 15~30분으로 진행되는 방식과는 달리 매우 빠르게 피칭이 진행되었다”고 전했다.

첫 번째 섹션의 장편 영화 피칭으로는 최신춘의 <밤도망>과 박샛별의 <완벽한 소설>, 이준섭의 <양의 창자>, 그리고 황호윤의 <디어 마이 제뉴어리>로 시작했다. 긴장한 표정과 달리 유머가 적절히 섞인 말솜씨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감독들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첫 번째 섹션을 듣고 나자 이번 행사가 비슷한 장르나 소재로 작품을 묶는 것이 아닌, 다양한 색채를 자유자재로 보여줄 수 있는 순서로 배치하여 각각의 작품이 두드러질 방법을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두 번째 섹션은 명세진의 <하녀>로 시작해 김정인의 <아마도 럭키스타>, 김수정의 <마고소양>, 전승표의 <저수지인어>로 이어졌다. 리메이크와 음악, 법정, 판타지로 이어지는 장르는 첫 번째 섹션보다 영화적인 구현에 초점을 맞춘 질문이 주를 이뤘다. 감독은 고민의 시간만큼 단단하면서도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제작사가 시나리오 전체를 읽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내면서 행사의 의도와 제작사의 만족도가 일치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다.

마지막 섹션이 시작되었다. 정혜원의 <제인>, 류동길의 <셋을 위한 Dance>, 김혜영의 <버디>, 심현석의 <레스큐>의 발표였다. 다양한 소재와 경력을 가진 감독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자신의 작품에 담아내어 관심을 끌어낸 발표였다. 특히 특별한 소재를 설득시키기 위해 컨셉 스케치와 영상을 보여주면서 영화 관계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미디어콘텐츠센터장인 영상원 이승무 교수는 행사가 끝난 후 “선정된 작품들로 영화 제작·투자사에게 선호 작품들을 뽑아달라고 했다. 결과는 놀랍게도 모두 다른 영화를 손에 꼽았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이번 행사에서 특이하고 다양한 소재가 고르게 주목을 받았으며, 충분히 영화적 구현이 가능하겠다는 제작사의 의중으로도 읽혔다. 무대는 막을 내리고 주인공들이 마운드에서 내려오면서 자리는 극장 밖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네트워킹 리셉션은 행사의 만족도가 어떠했는지를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행사장에서 영화 관계자는 관심 있는 작품의 감독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지고, 이번 작품에 대한 열띤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건 입구옆에 마련되어있는 감독의 명함꽂이였다. 제작사가 관심 있는 작품의 명함꽂이에 자신의 명함을 넣어, 감독과 영화사가 미팅을 마련할 수 있는 통로를 기획한 것이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행사가 아닌 지속적인 만남을 만들어주기 위한 주최자의 아이디어였다. 미인픽쳐스 곽중훈 대표는 이번 행사에 높은 만족감을 드러내면서 5~6편의 작품에 명함을 넣어놨다고 밝혔다. 그는1~2년안에본피칭행사중가장실속 있었으며, 변화하는 한국 영화의 최전선에 있는 참신한 작품을 본 것 같다는 소회를 전했다. 메리크리스마스 영화사 김동현 본부장은 영화제가 아닌 학교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너무 짧은 시간에 이야기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피칭 형식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서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영화사 아토의 제정주 PD는 이 행사의 멘토로 참여했다. 그는 “확장될 수 있는 이야기와 개발이 어느 정도 진행된 작품을 연결해주는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말하며, “학교에서 사회로 시선을 넓혀 제작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영화 제작·투자 관계자가 자리를 떠나고, 이승무 교수는 단체 사진을 찍는 감독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너희가 다가갈 차례야. 연락해서 밥 사달라고 하고, 차도 마시자고 해. 이제부터 노력해야 할 중요한 네트워킹이야.” 그의 말처럼 영화는 혼자서 만들 수 없다. 누군가의 손을 빌려 꿈을 현실화하고, 관객에게 보여줄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촬영하며, 녹음하고 편집한 결과물을 극장에 개봉하기까지는 수많은 인연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영화는 감독의 손에서 벗어나 제작사의 눈과 귀, 머리와 가슴에 꿈의 부스러기로 남아 주변을 떠돌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흘러나간 극장에서 투자·제작사, 감독은 자리를 옮겨 상상을 안착시킬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에서 들리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도, 학교 안과 밖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재학생과 졸업생의 기획도 수많은 무대, 공간에 자주 흘러넘치길 바란다. 모든 선발 투수는 경기 시작 전까지는 잠재적인 대기록의 주인공이다. 퍼펙트게임이 아닐지라도 승리 투수로 당신의 꿈이 유지될 수 있는 전략이 성공하길. 완벽했던 당신의 꿈이 불완전해지더라도 용기를 가지고, 그 용기로 나의 주변에 떠돌던 수많은 별의 이야기가 카메라에 담겨 스크린 앞에 비치길 소망한다. 그러니 당신, 한번 올라간 마운드는 쉽게 남한테 넘기지 말고, 끝까지 완투합시다.

글 송원재
1 아다치 미츠루, ‹H2›, 쿠니미 히로의 대사 중에서
2 콘텐츠 산업에서 사용할 때 자신의 프로젝트 기획 의도와 콘셉트, 제작 가능성을 잠재적 투자자에게 소개하고 설득함으로써 제작과 투자를 받게 되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