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깥은 여름>

이야기를 읽을 때 갖게 되는 어떤 편견들이 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아이는 선할 것이다, 홀로 어린 손자를 거두어 먹이는 할머니는 쓸쓸함을 자아낼 것이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는 시선에 지쳐 풀 죽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애란의 단편집 <바깥은 여름>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초기작에서 스카이 콩콩을 타며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통통 튀어오르던 아이들은 보다 영악해졌고, 할머니는 ‘잘 자라서 나를 호강시켜줘야 한다’며 아이를 쓰다듬는가 하면 아이가 데려온 강아지가 시름시름 앓건 말건 털이나 안 날렸으면 싶다.

Ⓒ 문학동네

콩가루 같은 세계 ━ <가리는 손>

등장인물들을 한 가정에 비유하면 콩가루가 따로 없다. CCTV속에서 중학생들은 담배를 대신 사달라는 듯 오천 원을 내밀고, 노인은 훈계와 더불어 침을 탁 뱉는다. 이에 한 아이가 ‘틀딱’이라는 말과 함께 발길질을 하고, 노인은 목숨을 잃는다. 한편 인형기계 앞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재이는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현장에서 사라진다. 그러다 곧 돌아와서는 노인 옆에 있던 라이언 인형을 집어 들고 다시 사라진다. 여기에 칼이 되는 말들도 가세한다. 재이의 학교 친구들은 동남아계 혼혈아인 재이가 노래를 잘 부르자 ‘역시 너는 특별한 것 같다’고 말하는가 하면 급식실 아주머니들은 감사를 앞두고 특별히 주방 상태를 더 꼼꼼히 점검하던 재이 어머니를 두고 ‘저리 예민하니 이혼을 당한 것 아니냐’며 쑥덕거린다. 그런 언행들만큼이나 당황스러운 사고방식도 이어진다. 재이 어머니는 쓰러진 노인을 두고 인형만 챙기던 아들을 보고 ‘우리 아이는 무고해서 다행’이라는 정도를 넘어 ‘그 일을 목격한 아이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걱정하기까지 한다. 때로는 전쟁 당사자보다 목격자의 충격이 더 클 수도 있지 않겠냐며. 그러나 어머니는 생일 케이크 앞에서 미소를 짓는 재이를 보며 돌연 섬뜩함을 느낀다. 어쩌면 아이의 ‘가리는 손’ 너머에 감추어져 있던 표정은 폭행에 대한 충격이 아니라 고꾸라지는 노인에 대한 웃음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러나 만일 그 섬뜩함에 어머니도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면, 그 너머에 감추어진 건 아들에 대한 충격일까 아니면 쓰러진 노인보다 목격한 아들의 정신건강이 더 중요한 현대인의 비정함일까? <가리는 손>에 나오는 이들 중 무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것이 과장된 비관주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인 것만 같아 더욱 서늘해진다.

“그래서, 찬성한다는 거야 안 한다는 거야?” ━ <노찬성과 에반>

노찬성은 어린 아이고 에반은 나이 든 유기견이다. 강아지에 별 관심이 없던 찬성은 자기 손바닥 위에 올린 얼음을 에반이 핥는 순간, 간지럽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자신을 관통하는 것을 느끼고 집으로 데려온다. 하지만 에반은 다리에 종양이 생겨 목숨이 위태롭다. 에반을 데려올 때부터 내쫓으려고 하던 할머니가 수술비를 지원해줄 리는 없고, 나이 든 에반에겐 수술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는 까닭에 찬성은 강아지를 안락사해주기로 마음먹는다. 선의로 시작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알바를 뛰던 중학생 형은 이렇게 말한다. “이 새끼 완전 또라이 아냐?”
안락사를 ‘아픈 강아지를 편안하게 해준다’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던 찬성은 막상 당일이 되자 마음이 거북해지는데, 병원이 사정상 휴진한다는 공고가 붙자 안도하게 된다. ‘그래서 찬성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한 ‘노찬성’의 갈등은 윤리 의식이나 강아지에 대한 마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휴대폰에 의해 촉발된다. 안락사 비용 십만 원을 들고 동물병원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저렴한 가격으로 휴대폰을 개통할 수 있다는 대리점 광고에 혹해 돈을 써버린 것이다. 찬성이 휴대폰을 개통하고 장난감을 구입하며 자기 욕망에 충실해질수록 그는 본의 아니게 안락사에 ‘No찬성’ 하게 된다. 그러나 에반은 자기 목숨이 찬반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성가신 듯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떠나버린다. 가보지 않은 세계와 자신의 탄생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던 작가의 아이들은 이렇듯 욕망 앞에 흔들리는 한 명의 현실적인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

아직 쓸쓸한 겨울 ━ <입동>,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건너편>, <풍경의 쓸모>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도 있다. <입동>의 어린 아들은 버스에 치여 목숨을 잃고,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아이는 계곡 물 아래로 가라앉는다. <입동>의 부부는 아이의 서툰 글씨를 보고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고,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여자는 남편을 데려간 남의 집 아이를 원망하다 유족의 편지를 받은 뒤, 그 아이도 한 명의 마음 따뜻한 누군가의 가족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죽은’ 아이가 반신이 마비된 자기 누나의 꿈에 나타나 그녀를 ‘걱정’하더라는 것이다. 기나긴 겨울의 하루가 그처럼 간신히 지나간다.
작가의 전작 <성탄 특선>에서처럼 한번도 찬란했던 적 없는 한 커플의 연애는 이번에도 쓸쓸한 성탄절을 맞이한다. 반지하 커플은 지상으로 진출했지만 여전히 노량진의 고시 지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경찰청 교통정보센터에 합격한 여자 도화와 달리 남자 이수는 고시생 연차만 쌓여간다. 고시를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구한 이수는 그러나, 도화 몰래 또 한 번 고시를 준비한다. 동거하던 집의 전세금까지 빼돌려가면서 말이다. 이를 알게 된 도화는 이수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이수는 반드시 다 갚겠다고 말하지만 도화는 네 처지나 돈 때문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설렘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헤어진 뒤 교통 방송을 하던 중 도화는 ‘노량진’이란 단어를 읽다 울컥하게 된다. 그리고 재빨리 다시 방송을 이어간다. ‘건너편’에 선 두 사람 사이로 그렇게 사람과 시간이 쏟아져 지나간다.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집을 나갔다. <풍경의 쓸모>에서 시간 강사인 정우는 음주운전을 한 교수를 대신해 교통사고까지 덮어쓰며 교수 임용에 사활을 건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태국 여행을 떠나지만 임용 결과를 기다리느라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그럴싸한 사진도 한 장 건지지 못한 채 귀국길에 오른다. 그날 아버지는 애인을 암으로 떠나보냈다. 그러나 아버지에겐 그 여자와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들' 같았다고 정우는 생각한다. 그는 아버지를 질투한다. 바깥은 여름, 그러나 스노볼 속에서 보내는 사내의 계절은 정말이지 겨울이 따로 없다.

어느 계절에 서 있어도 언제나 건강해보이는 작가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순수한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던 시절에 다시 속아줄 순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소매가 짧고 햇볕이 쨍쨍한 계절엔 또 겨울이 꿈인 듯 느껴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글 | 성민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