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적으로 이미지는 고정되어 있는 어떤 상(象)으로 여겨졌다. 지금껏 우리가 어떤 대상을 기리는 방식이란 언제나 그림이나 조각처럼 ‘움직이지 않는 매체’를 통해서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멈춰있는 이미지로써 무언가를 바라봤고 상상했으며 제작해 기억했다. 20세기에 활동한 세계적인 언론인 월터 리프먼이 이미지를 “우리들 인간이 어떤 대상에 대해 갖는 머릿속의 그림”으로 말한 건 자연스러운 비유였다. 이때까지 움직이는 그림은 해리포터 예언자 일보에나 나올 법한 상상력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미지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영상기술 발전으로 말미암아 연속되는 이미지가 등장한 것이다. ‘멈춰있는 상’으로서 아무런 변색작용 없어 보이던 오래된 종이가, 움직임이라는 정반대되는 성질이 결합되기만 한다면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리트머스 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게 바로 21세기에 들어서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는 ‘무빙 이미지’ 개념이다. 사진의 연장선으로서 등장한 영상과 필름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 기술은 이제까지 당연하게 개념화하고 있던 이미지 개념을 다시금 고려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각자의 매체 영역을 확실히 하려던 모더니즘 이론은 여러 이유에서 반박 받았고, 기존의 예술이론에는 등장한 적 없었던 영화이론과 미디어이론 등이 새로운 논의영역을 촉발해 이 논의를 도왔다.

오민, <관객>

지금까지 ‘그림’으로 이야기되던(그래도 상관없던) 이미지를 교묘하게 ‘픽처’로 바꾸어 말하며 기획한 1977년 더글라스 크림프의 <픽처들> 전시는 무빙 이미지 논의의 신호탄으로서 중요한 화두를 제기하는 사건이었다.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들은 매체 특정성으로 구분되던 이미지들이 공존하고 교환되는 것을 넘어, 그사이의 관습적 경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구태여 동적 이미지와 정적 이미지의 원천이나 기원을 찾기보다는 이를 부정하고 전유했고, 크럼프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각각의 픽처 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픽처”를 찾아 나서는 모험과 같았다.

사실 새로운 게 등장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보다 새로운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새롭지 못한 편견일 터. 이 일대기를 요약한 아서 단토의 말은 무빙 이미지를 바라보는, 바라보게 될 사람들의 전통적인 편견과 상상력을 지적하고 있다. “단순히 움직이는 사물들의 픽처들이 아니라 움직이는 픽처(moving picture).”이는 무빙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점 차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적하면서 앞으로 이어지는 논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시사한다. 아직까지 무빙 이미지가 제대로 자리 잡히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관련 논의는 언제나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기 바쁘지만(무엇이 무빙이미지인가?),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인식론적인 물음으로서(어떻게 무빙이미지인가?) 이뤄져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김동희, <엔트런스>

아르코미술관에서 9월 3일까지 진행된 김해주 기획의 <무빙/이미지> 전시는 후자의 물음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이 전시가 오늘날 영상작업을 가리키는 ‘핫한 단어’를 전시 제목으로 가져왔을 뿐 실제 그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지적이야말로 이미 익숙해진 존재론적 물음에 도리어 고착화 되어버린 탓이다. 필름, 비디오, 디지털 기술 등 여러 가지 맥락에서 논의되던 무빙 이미지가 결국 정적인 이미지로 소비되어버릴 것 같은 이 시점에, 오히려 이 전시는 움직임이라는 리트머스 용액이 과연 이미지라는 오래된 종이에 변용을 줄 수 있을 것이냐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무빙/이미지>는 시각예술에서 발생하는 이미지라는 키워드를 움직임으로서 이해해보겠다는 기획에서 출발한다. 시간성을 가진 영상은물론 퍼포먼스뿐 아니라 움직임이 없는 조각, 설치와 같은 고정된 사물로부터 움직임을 읽어내는 노력, 나아가 전시 전반을 움직이는 이미지로 작동시켜 보겠다는 의도가 내포되어있다. 어떤 기술사적, 예술사적 변천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존의 방식대로 이미지를 이해해버리고 마는 우리에게 아예 인식론적 차원에서 이미지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는 관람을 요구한다.

이미래, <스크리블 캐리어즈>

인식론적 물음에서 출발한 전시답게 일반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전시 이미지를 다시 말하기 위해 김동희의 <엔트런스>는 또 다른 출입구를 제작하여 내외부 동선을 조정했다. 이로써 공간은 좀처럼 고정되지 않고 저마다의 인상을 계속해서 달라지게 만든다. 이에 이어 각자 다른 내용을 가지고 통상적인 이미지를 되돌아볼 수 있는 작업들에 역할을 나누어 배치해두었다. 평면의 고정된 악보와 움직이는 퍼포먼스를 시간성 있는 영상으로 기록하는 오민의 작업은 ‘무빙’과 ‘이미지’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실제 움직임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움직임을 가지고자 하는 노력과 효과를 띠고 있는 이미래의 설치 작업은 ‘무빙/이미지’라는 화두가 존재론뿐 아니라 조각과 같은 이전 시대 작업 매체를 통해서도 생각해볼 만한 인식론적 문제임을 주장하게 한다.

마논 드 보어, <고요한 마음>

이들이 움직이는 이미지라는 의미로 통상적인 무빙 이미지를 확장했다면, 세 명의 해외 작가는 실제 무빙 이미지라는 형식의 작업을 내놓음으로써 이 개념을 안정화한다. 막연히 영상작업, 비디오 설치작업, 사진 결합작업이라서 무빙이미지 전시에 들어온 게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도 그들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예컨대 지미 로버트의 작업에서 인물은 삼차원 형상을 잘라 만든 이차원 드로잉에 자신의 얼굴을 맞대어 또 다른 이차원, 삼차원의 형상을 구축하며 종이와 신체를 지속적으로 변형하는 조각이자 안무로 만들어낸다. 어떤 재료든지 간에 움직임을 불어넣는 순간 어떻게 동적 변화가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논 드 보어의 작업은 움직임이 없어 보이나 3년이라는 시간성을 가짐으로써 움직임의 흔적, 사건의 이후를 기록하고 있다. 움직임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숙고해보게 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시타미치 모토유키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의 일출, 일몰 이미지를 찍어 병렬시킴으로써 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어차피 해가 뜨고 진다는 같은 이미지가 실제로는 그 사이에서 시차가 있다는 운동성을 지적한다.

시타미치 모토유키, <일몰/일출>

눈에 띄는 건 다른 설치작품 <플로팅 모뉴먼트>다. 어디서 흘러왔는지(혹은 흘러온 건지) 모르는 수많은 유리병을 뒤섞어 새로운 유리병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유리병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라는 이미지를 한데 뒤섞어버리는 내용적인 의미와 더불어 여러 유리를 결합시켜 유리병을 쉽사리 깨질 수 있게 만듦으로써(서로 다른 유리병에서 나온 유리가루는 서로를 불순물로 여기어 파괴되기 십상이다) 이미지의 역동성이라는 형식상의 의미를 일러준다.

전시를 보고 난 뒤 관람객의 마음에는 어떤 상(象)이 맺힐 것인가. 그 이미지는 다른 여느 전시처럼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 평면 이미지일 수도 있을 테고, 거기에 조금 프레임이 덧붙은 gif식 이미지, 아니면 한 액자로 담기에는 너무도 많은 상이 뒤죽박죽 뒤섞여 움직이고 있는 모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전시는 당연하리만큼 범람하는 무빙이미지시대에서 맨 처음으로 돌아가 무빙과 이미지를 재고찰하게 한다.

지미 로버트, <매개변수>

<무빙/이미지>는 오늘날 무빙이미지 논의가 빠져버린 형식적 권태를 내용적으로 환기함으로써 이 주제를 다시 형식적으로 고찰하게끔 한다. 그동안 ‘무빙/이미지’와 관련된 논의를 잠깐 끊고 있지만 결국 그 안에서(혹은 그 안의) 부호를 빼고 읽는 관람객들은 앞으로도 수없이 지속될 무빙이미지 담론으로 나아갈 근육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푸른 리트머스지와 붉은 리트머스지가 변해버린 다음에는 변화를 파악할 수 없지만 리트머스 용액이 떨어지던 순간 만큼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글 | 이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