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갈 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 데 있나.” 가장 좋아하는 판소리 구절을 묻자 소리꾼 이소연이 구성진 소리 한 구절을 뽑아 주었다. 이유는 흘러가는 자연이 마치 우리삶을 투영하는 것 같아서란다. 소리꾼 이소연에게 지금은 풍성한 가을이 아닐까. 뮤지컬 <아리랑> 재공연과 <서편제>에 연이은 출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소리꾼 이소연을 만나보았다.
뮤지컬 <아리랑> 재연과 3년 만에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온 <서편제>에 연이어 출연하게 되셨습니다.
두 작품에서 모두 소리꾼 역할을 맡았어요. <아리랑>에서는 소리를 통해 시대의 아픔을 위로하는 소녀 ‘옥비’ 역을 맡았고 <서편제>에서는 소리꾼으로서 예인의 삶을 사는 여인 ‘송화’ 역으로 출연하지요. 소리꾼으로서 소리꾼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 영광이에요. 소리를 시작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2년 만에 돌아온 <아리랑>에서 ‘옥비’ 역을 다시 맡으셨는데, 어떤 마음으로 재공연에 임하셨나요?
저는 새롭게 변화를 주려고 하기보다 초연 때 가져갔던 감정을 꾸준히 지켜가려고 노력했어요. <아리랑>은 많은 것을 표현하려고 하면 오히려 균형이 깨지는 것 같아요. 각각의 민초들을 맡고 있는 주·조연, 앙상블이 모두 주인공이거든요. 저도 옥비로서 그 안에서 묵묵히 삶을 지켜내려고 했어요.
<아리랑>을 꼭 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리랑>은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하는 뮤지컬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관객들의 내면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 ‘아리랑’이기도 하고, 우리의 삶이 곧 ‘아리랑’이기도 해요.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아픔을 이겨내려고 할 때, 감정이 승화되어서 나오는 것이 ‘아리랑’이잖아요. 그래서일까요, 공연 중 아무 반주 없이 목소리로만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감동이 더 크게 느껴졌어요.
<서편제>의 ‘송화’는 어떤 인물인가요? <아리랑>의 ‘옥비’와 비교해 본다면?
옥비는 소리가 뛰어나긴 하지만 직업으로 소리를 하는 소리꾼이라기보다는 민초들 중 하나의 삶을 살았어요. 옥비가 들려주는 소리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소리예요. 반면 송화는 소리판에서 소리하는 소리꾼이죠. 지금 제 삶과도 많이 닮아있어요.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게 자기 길이 되는 점도 그렇고. 그만 두고 싶다가도 다시 이겨내고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들이 제 삶하고 많이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현재 국립창극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등 창극의 새로운 시도의 주역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통 음악을 기본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선배와 선생님들을 보면서 저도 판소리를 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어요. 덕분에 국립창극단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거부감 없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새로운 시도들이 많아야 판소리를 접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전통 음악을 새롭게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그 사람들이 결국 전통 음악의 관객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많은 새로운 시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해온 작업들 중 새로운 시도로 특별히 기억나는 작업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김태용 감독님이랑 영상 작업을 한 적이 있어요. 신상옥 감독님의 영화 <춘향전>에 소리를 없애고, 제가 변사가 되어서 아니리를 이끌어가는 역할이었어요. 영화 <춘향전>과 판소리 <춘향전>이 만나는 새로운 작업이었죠. 색소폰, 드럼 등을 연주하는 밴드도 같이 들어와서 연주만 할 때도 있고 판소리 반주가 되어주기도 했는데,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영화와 판소리와 현대음악 세 가지가 만난 거죠.
대학에 들어와서야 소리의 참 매력을 알게 되셨다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소리가 너무 싫었어요. 촌스럽고 지루한 옛날 음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사람들도 실제로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고요. 그러다 우연히 연극 무대에 서게 됐는데, 그때 소리에도 연극적인 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설집을 보면 시처럼 좋은 가사들, 재밌는 재담들이 많거든요. 연극을 접하면서 소리 안에 있는 연극적인 대사들, 말의 맛을 살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판소리에 대한 애정이 생겼고, 제가 느끼는 매력을 관객들에게도 느끼게 하고 싶어졌어요.
소리꾼이 되기까지 힘들었던 점이나 고민했던 부분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늘 힘들고 고민스럽고, 그런데 즐겁고 행복해요. 소리꾼들은 타고난 목이 있어야 해요. 소리꾼 중에서는 제 목소리가 맑은 편이라 소리를 다양하게 내고 싶은데 잘 안 나올 때 힘들고 고민스러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하나씩 얻어질 때, 관객들이 좋아해줄 때 힘이나죠. 관객들이 “판소리가 이런 거였어요?” 한 마디 해주시면, ‘아 내가 소리를 하기 잘했구나’ 생각이 들어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시험을 다시 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소리에 매력을 느끼면서 소리 공부를 새롭게 다시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퇴를 하고 한예종 시험을 봤죠. 한예종에 들어가면 다양한 예술을 접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도 합격하고 전통예술원뿐만 아니라 연극원, 미술원, 영상원 등 다양한 원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수업을 들어보면 다른 얘기가 아니라 서로 연결이 되는 거예요. 방금 전에 연기 수업에서 호흡 얘기를 했는데, 무용 수업에서도 똑같은 얘기를 하는 거죠. 단지 소리만 배우는 게 아니라 모든 예술의 기본기를 다진다는 생각에 굉장히 벅차고 뿌듯했어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연극원에 <인형과 대안 공간>이라는 수업이 있어요. 마지막 발표를 무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해야 했는데, 그때 번뜩 심청이가 떠올랐어요. 심청이가 죽으려고 물에 빠졌는데 물거품만 남고 사라져버리잖아요. 그 장면을 변기에서 하면 너무 재밌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심청이를 휴지로 만들어서 화장실을 무대로 발표를 했어요. 무대가 아닌 공간에서도 다른 표현을 할 수 있고, 사람들이 집중할 수 있다는 걸 배운 시간이었어요.
다양한 색상으로 물드는 리트머스 종이처럼 판소리, 창극과 뮤지컬을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데요. 각 장르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판소리는 혼자서 많은 역할을 소화해야 해서 다양하게 하는 재미가 있어요. 심청이었다가, 심봉사가 됐다가, 아니리 하나로 금세 뺑덕이가 되기도 하지요. 창극은 판소리를 뿌리로 하지만 각각의 역할이 나누어져 있다는 점이 달라요. 판소리가 여러 인물로 변화하는 맛이 있다면 창극은 한 인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끌고 가는 묘미가 있죠. 뮤지컬은 창법이 변화해요. 그런데 저는 뮤지컬도 소리의 확장판이라고 생각해요. 소리꾼은 판소리 안에서 자연의 소리, 사람의 소리, 인물의 소리를 다양하게 표현해야 하거든요. 뮤지컬을 하면서도 ‘내가 또 다른 소리를 찾아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어요.
판소리가 바탕이라는 것이 다양한 가능성을 갖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소리가 갖고 있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소리꾼은 여러 가지 소리를 내보면서 다양한 소리를 얻기 위해 노력해요. 흔히 ‘득음’이라고 하죠. 사람의 소리뿐만 아니라 새 소리, 바람 소리 등 자연의 소리들을 판소리 다섯 바탕 안에서 많이 연구하고 연습해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내는 방법을 자기도 모르게 터득하게 되는 거죠. 이것이 다른 장르의 음악을 만나거나 다른 소리를 표현해야 할 때 큰 자산이 되는 것 같아요.
어떤 색깔의 소리꾼이 되고 싶으신가요?
아무 색깔도 아닌 소리꾼. 어떤 색깔을 입혀도 다른 색깔이 나오는 무색무취의 소리꾼이자 배우가 되고 싶어요. 뺑덕이나 월매처럼 사람들이 저를 보고 상상하지 않았던 역할을 해보고 싶기도 해요. 역할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들을 해보고 싶어요. 나중에는 소리가 들어가면서도 극성이 두드러지는 1인 창작 판소리나 모노드라마도 해보고 싶고요.
세계에서도 판소리가 많이 인정받고 있는데요. 세계를 무대로 포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근에 국립창극단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을 각색한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로 싱가포르예술축제에 다녀왔어요. 외국 극본임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의 소리가 탄탄하게 이어지는 작품이었죠.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의 소리의 멋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외국에 나가 한국 판소리를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매거진의 독자들과 공연의 관객들, 소리꾼 꿈나무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소리꾼과 전통 음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음악을 응원해 주실수록 그 힘을 받아 우리 음악이 더욱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소리꾼 꿈나무들에게는 많은 고된 일들이 있겠지만 소리를 지켜나간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끝까지 잘 해나갔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제가 응원하는 길입니다.
소리로 다져진 탄탄한 기본기로 판소리, 창극,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고 있는 이소연 소리꾼. 낯선 장르도 새로운 소리를 찾아가는 소리 길로 여기며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그녀에게서 진정한 소리꾼의 면모가 엿보였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투명한 소리꾼 이소연이 앞으로 어떤 다양한 빛깔로 물들지 기대가 된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봄이 오든, 여름이 오든, 가을이 오든, 앞으로 이소연 소리꾼에게 다가올 모든 계절들이 그녀의 소리를 더욱 다채롭게 하리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