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돌아왔다”, “레전드의 귀환”. 요즘 포털과 텔레비전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이 멘트들의 시작은 2014년 연말 방영된 MBC의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토토가)’ 특집 이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한도전〉은 ‘토토가’ 특집을 통해 과거 9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당시의 추억과 향수에 흠뻑 젖은 가수들과 많은 사람들이 ‘토토가’ 특집에 열광했고 이후 “언니(혹은 오빠)가 돌아왔다” 내지는 “레전드의 귀환” 등을 내걸며 톱스타들이 컴백을 시도했다. 어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꽤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그것은 대중들의 기대에 부응하기가 어렵다는 점 때문인데, 연륜으로 탄탄해진 내면과 변함없는 겉모습을 동시에 기대하는 대중들의 바람과는 달리 실상은 정 반대인 경우가 부지기수인 것도 한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들이 과감히 ‘컴백’을 시도하는 이유는 “잊혀지는 게 두려워서”1) 일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열망한다. 우스갯소리처럼 많은 이들이 “우리 오래오래 해 먹어요.”라고 말한다. 오래오래 해 먹어요. 대체 어떻게?
잊히지 않고 계속 기억된다는 것. 이것은 비단 톱스타들에게만 국한되는 소망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예술인들 역시 자신의 작품이, 혹은 작가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 혹은 우리의 예술이 오래도록 생명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 것일까? 이 글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한다. 물론 이는 정답이 없는 물음이며 또한 예술에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다만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작은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출발했음을 미리 밝힌다. 〈무한도전〉, 그 중에서도 특히 534~535편 ‘효리와 함께 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예술에 대한 이야기의 예시로 과연 적합한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대중음악을 ‘예술’ 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들을 ‘대중 예술’이라고 분류하는 경우도 있지만 앞에 대중이라는 말을 붙여 일반적인 예술과는 선을 긋는 것이 통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예시들을 통한 접근에도 분명 어떠한 의의가 있으리라 믿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이효리 <Monocurome>, <BLACK>
그렇다면 왜 ‘이효리’이며 왜 ‘무한도전’인가? 먼저 이 둘은 ‘대체 불가능’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핑클’을 비롯한 1세대 아이돌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효리를 바라보아야 함을 제안하고 싶다. 그들이 보여주는 활동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근래 다시 활동을 시작한 많은 1세대 아이돌들의 경우 앞서 언급한 토토가 특집이 그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컴백과 이후 활동이 팬들을 위한 짧은 이벤트에 가깝다면 이효리의 컴백에는 보다 음악적 커리어를 쌓는 측면에 방점이 찍혀있다. 이효리는2003년 솔로활동을 시작한 뒤 다방면에서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고 특히 2013년 결혼 이후 발매한 앨범 〈Bad Girl〉을 기점으로 더욱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효리는 자신의 음악을 위해 음악활동만을 고집하는 대신 전보다 더 거침없고 솔직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2017년의 이효리는 분명 핑클 시절과도, 솔로 앨범 초창기와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달라진 이효리는 이른바 요정이라고 불리던 그 시절의 자신을 부정하지도 혹은 더 미화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과거의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여러 음악적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해 어떤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는 대신 “솔직히 노래만으로는 안 되니까”2)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단점을 감추는 대신 인정하고 극복하려는 그녀의 시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이효리는 계속해서 변신하고 새로워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가장 내밀한 자신의 중심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이효리에게 대체 불가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가 아닐까?
현대무용가 김설진 Ⓒ국립현대무용단
또한 ‘토토가’ 열풍을 만들어낸 〈무한도전〉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을 모토로 하고 있는 예능프로그램이다. 2006년 5월 6일 첫방송을 시작으로 10년 이상 장수하고 있다는 점, 아이돌 못지않은 두터운 팬층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다양하고 파격적인 시도들을 통해 대한민국 예능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무한도전〉이 순탄한 길만을 걸어온 것은 결코 아니다. 폐지의 고비를 넘기고 멤버들의 잇따른 하차를 겪으며 쉼 없이 위기설을 마주하고 있는 〈무한도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도전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내려 노력한다. 그렇다면 이효리와 무한도전의 만남이라는 것만으로도 방영 전부터 큰 기대를 불러 일으켰던 〈무한도전〉 534~535편 ‘효리와 함께 춤을’로 시선을 좁혀보자. 먼저, ‘효리와 함께 춤을’은 각각 서로의 한계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요정은 어느새 불혹을 바라보고 있고, 그녀의 춤은 이제 철 지난 섹시댄스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한도전 멤버들 역시 매번 똑같은 춤을 추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그들이 고민하는 것은 비단 늘 똑같은 ‘춤’만은 아닐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춤의 기술을 배우기를 기대했던 그들은 현대무용가 김설진과의 만남을 통해 “틀을 깨는 것보다 넓히는 것”3)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을 배운다. ‘효리와 함께 춤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틀을 깨는 것보다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서 김설진의 춤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고 낯설게 여겼던 현대무용이라는 장르를 친숙하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이 그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김설진은 이를 위해 현대무용을 거부하거나 그 틀을 깨 부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의 말처럼 “틀을 깨는 것보다 넓혀”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진입장벽이 높았던 예술적 춤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 이것이야말로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예술을 증명해낸 김설진의 비결이 아닐까?
무한도전 534편 <효리와 함께 춤을> ⒸMBC
예능프로그램과 김설진의 만남이었고 그저 새로운 춤을 연마하기 위한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보였던 〈무한도전〉- ‘효리와 함께 춤을’ 은 사실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만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무한도전과 이효리가 새로운 춤을 통해 대중(혹은 관객)과 소통하려는 시도의 종착역은 김설진이 〈댄싱9〉 우승을 통해 증명했던 바와 다르지 않다.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이라는 이분법적 분류의 틀을 깨부수는 대신 넓혀나가는 것만으로도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음을 증명해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일종의 뒤섞임은 이효리가 자신의 음악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여기에 ‘효리와 함께 춤을’이 지니는 또 다른 의의가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틀에 갇혀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기존의 것에 갇혀있지 않기 위해, 안주하지 않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틀’이나 ‘한계’라는 말은 늘 부정적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어떤 한계를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곤 한다. 그래서 때로 한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 즉 나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것을 뜻한다.
무한도전 534편 <효리와 함께 춤을> ⒸMBC
다시 처음의 질문을 떠올려본다. 오래오래 해 먹어요. 대체 어떻게? 저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다르겠지만 내 대답은 “나와 만나는 대상의 성질이 산성이든 알칼리성이든 혹은 중성이든 그에 맞는 반응을 보이는 리트머스처럼 우리 역시 ‘예술적 리트머스’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또 무엇을 만나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갇혀있지 않고 열려있되, 그 정도와 한계를 분명히 아는 태도’, 즉 “틀을 깨는 것보다 넓혀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예술이 누군가와 만나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인가는 스스로의 속성을 명확히 할 때 결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참 먼 길을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질문하고 그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는 고루한 문장으로 이 긴 글의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