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존재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게 흘러가는 마음이 있다. 비니셔스의 음악은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넘실거리는 그 감정들을 닮았다.
그간 힙합 뮤지션들의 앨범에 프로듀서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참여하며 음악 작업을 이어가던 비니셔스가 첫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7년이라는 긴 공백만큼이나 치밀하게 세공된, 그만의 색채로 가득 찬 10곡이 담겼다. 어떤 감정도 섣불리 강요하지 않는 음악을 통해 모호하고 내밀한 ‘사이’의 순간으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뮤지션 비니셔스를 만났다.
비니셔스(Vinicius)라는 이름
2009년에 지은 이름인데요, 브라질의 시인이자 뮤지션인 비니셔스 지 모라이스의 이름에서 따왔어요. 당시엔 힙합 음악을 하고 있었는데 음악적으로 조금 더 열어주고, 가볍지만은 않은 느낌을 주는 이름이라서 마음에 들었어요. 저에겐 이 이름이 자줏빛의 느낌으로 다가왔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그 어원이 ‘와인’이더라고요. 그래서 더 흥미로웠어요.
첫 정규앨범 <사이(Sai)>
우리는 늘 한 가지 감정만을 느끼지 않고, 흐르는 여러 감정들 사이에 놓여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늘 혼란스럽고 괴리도 많이 느끼고요. 감정과 감정 사이의 순간들, 그리고 그 안에서 중심을 찾아갈 수 있는 여유로서의 사이를 앨범 제목으로 짓게 됐어요. 앨범을 만들 당시에 쓴 글을 돌이켜보니 가장 많이 나온 단어도 ‘사이’였고요.
한 장의 앨범, 그 사이의 고민들
좋아하는 앨범들을 동경하며 음악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이번 앨범을 처음 구상할 때부터 각 트랙의 역할과 흐름에 대해 생각했어요. 곡의 순서도 바꿔보고 다른 곡으로 대체하기도 하면서 구성을 치밀하게 채워나가는 식으로 작업했어요. 이게 과연 같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인지, 감정에 대해 일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도 중요했고요. 다만 그 인격체가 입체적이고 다채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양한 역할을 지닌 곡을 만들고 싶었어요. 또 다른 하나는, 어딘가에 푹 빠지는 것을 경계했어요. 사이의 감정들, 사이의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거든요. 기분이 살짝 차올랐다가 가라앉은 채로 끝내면서 듣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쉬거나 생각하거나, 그렇게 가볍게 받아들이길 바랐어요. 그래서 너무 달콤한 곡, 너무 슬픈 곡, 너무 어두운 곡, 너무 무거운 곡들은 다 뺐어요.
프로듀싱부터 마스터링까지1)
원래 프로듀서로 시작했기 때문에 악기 연주나 보컬을 배운 적은 없어요. 도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프로듀싱에 쓰려고 전부 독학으로 배운 거죠. 곡의 모든 부분에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하나 스스로 쌓아 올렸어요. 드럼 위주로 작업하다가 그다음엔 악기도 올려보고, 기타도 쳐보고, 노래도 올려보고. 하나씩 올리다 보면 나중엔 그걸 제가 다 제어할 수 있잖아요. 선택이었다기보다는 불가피했던 것 같아요. 혼자서 할 수밖에 없었던.
규정짓기 어려운 장르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장르를 좋아하게 됐어요. 힙합, R&B, 재즈, 보사노바를 특히 좋아하는데 어느 한 장르만으로는 표현이 안 되는 거죠. 그 사이에 뭔가 있겠구나, 그것들을 섞어가며 작업해보자 싶었어요. 제 이야기를 중심으로 음악을 이끌어가다 보니 여러 장르의 수단을 응용하게 됐고요. 어떤 경우에는 치밀하게 디자인해서 장르를 섞었고 어떤 경우에는 있는 그대로 나오기도 했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작업할 것 같아요.
비니셔스의 팔레트
저에게 색채라는 건 음악을 파악하고 만드는 데 많은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연상할 때 악기의 소리나 색이 같이 떠오르기도 하고, 음악적인 상상력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요. <사이(Sai)>의 1번부터 10번 트랙을 구성할 때도 아침부터 새벽까지의 색채를 생각했어요. 앨범 커버를 맡아주신 모임 별의 디자이너 분께도 곡이 가진 색채에 대한 생각을 전달했고, 그게 싱글 커버에도 많이 반영됐어요.
흑과 백, <Holiday> 뮤직비디오2)
처음엔 <Holiday>라는 곡의 색채가 노을과 같은 오렌지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해 곡을 다시 거꾸로 분석해보니 화자가 있는 곳이 밝은 곳이 아니더라고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꿈꾸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면 차라리 빛과 어둠으로만 이야기해보자 싶었어요. 물체들에서 색을 지워 시공간을 없애고, 빛과 어둠이 만들어내는 모양을 대비시켜서 이미지를 구성해봤어요. 시각적인 아이디어의 시작은 몸을 풍경이나 무한한 공간처럼 표현하는 것이었어요. 그만큼 편안한 어떤 관계, 그리고 그곳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편안한 마음을 원했던 사람이 꾸는 ‘관계에 대한 꿈’을 담았어요.
뮤직비디오를 직접 연출한다는 것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곡의 표면적인 인상에 머물지 않고 그 안으로 파고들어서 이야기를 끝까지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죠. 한편으로는 두 분야의 전문성을 부지런히 갈고 닦지 않는 한 기술력이나 여러 방면에서 자기 콘텐츠의 길을 막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대담해지지 못할 수도 있고요. 뮤직비디오는 결국 하나의 인상을 중심으로 작업해야 하는데, 제 음악은 다방면으로 고민했기 때문에 모든 요소가 중요하게 느껴지잖아요. 저번에 나온 <쉽게(Easy)> 뮤직비디오는 어거스트 프록스의 김세희 감독님과 함께 작업했어요. 곡을 만든 사람으로서 저는 상상력을 많이 발휘하고, 감독님은 훨씬 대담하고 큰 그림을 만들고 연출해주셔서 시원하고 좋았어요. 앞으로는 이렇게 제 곡을 가운데에 놓고 소통하며 작업하고 싶어요. 더 대담하게요.
SM STATION3), 대중 앞에 서다
어느 날 ‘안녕하세요. SM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이렇게 섭외 메일이 왔어요.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미팅을 했는데 정해진 일정이 정말 급했어요. 마침 <쉽게(Easy)>라는 곡이 있었고, 그 곡이 앨범 다음의 행보나 음악의 흐름에 맞닿아 있어서 적절하다고 생각했어요.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건, 그 곡에는 주인공이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곡의 결론은 어떤 사람이 설렁설렁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이었고, 처음 그 곡의 데모를 고를 때도 ‘이건 내가 나와야 하는데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퍼포먼스를 한 거잖아요. 언젠가는 해야 하는 부분이었는데 그 창구를 시원하게 틀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저 역시 앞으로 만들어갈 음악들은 조금 더 가깝게, 생동감 있게, 재미있게 작업하고 활동하고 싶으니까요.
음악 작업의 시작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음악 듣는 걸 좋아했는데 음악을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길래 막 만들기 시작했어요.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는 그렇게 만든 CD를 친구들에게 1달러씩에 팔기도 하고, 랩이나 노래를 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같이 녹음하고, 재미있는 놀이처럼 음악을 했어요. 놀이치고는 열심히 했지만요. 그러다가 2010년, 재지 아이비(Jazzy Ivy)의 앨범을 프로듀싱하고 솔로 앨범4)을 내고 군대에 갔을 때 한 음악 웹진에서 저를 인터뷰하러 군대로 찾아오셨어요.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그때 인정받고 칭찬받은 부분도 있었지만 소통하는 범위가 생각보다 깊구나 싶고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음악이 그렇게 깊게 얘기할 수 있는 거라면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최선을 다해서 해볼 만하고 모든 과정이 흥미롭다, 그렇게 생각한 이후부터는 모든 경험이나 생각이 음악 만드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살이 붙더라고요. 그때부터 음악을 본격적으로 대하게 됐어요.
영상원 멀티미디어영상과에서
처음엔 막연하게, 음악도 좋아하고 드로잉도 좋아하고 시각적인 작업도 좋아하니까 모든 걸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뮤직비디오를 찍자, 해서 들어왔어요. 그렇게 1학년 때부터 뮤직비디오를 찍었어요. 남의 곡을 가지고 힙합 뮤직비디오를 찍기도 하고, 제 곡들의 뮤직비디오를 찍고 직접 출연하기도 했고요. 기획 관련 수업들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음악이라는 건 기분으로 시작해서 기분으로 끝나기도 하는 작업이지만 제가 그 흐름을 제어하고 그 안에 있는 이야기를 정리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창작의 재료가 되는 것
보통 세 가지가 연결됐을 때 곡이 되는 것 같아요. 하나는 음악, 하나는 글, 마지막 하나는 태도에요. 음악은 항상 무의식적으로, 스케치처럼 계속 만들어요. 곡에 대한 아이디어든 일기든, 어떤 감정이 들 때 그걸 풀어내는 형식의 글도 많이 써서 한곳에 모아두고요. 그런데 그 두 가지가 연결되어도 곡이 안 돼요. 나머지 하나는 어떤 태도로 이것들이 묶일지,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의 문제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진짜 있는 것인지, 그런 생각들이 항상 바뀌고 진화하잖아요. 내가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들이 모두 연결됐을 때 어떤 프레임 안에서 곡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창작의 접근방식이나 공정은 정해두지 않으려 해요. 계속 연구하고 다르게도 해보고, 그렇게 작업해가고 싶어요.
앞으로의 활동 계획
이번 앨범에 실리지 않은 미수록 곡과 앨범 전체를 리믹스한 곡들을 각각 묶어서 내고 싶어요. 이후엔 그다음의 음악들을 낼 생각인데요, 앨범 단위가 아니라 한 곡씩 싱글 프로젝트로 작업하고 싶어요. 라이브 공연과 디제잉도 차근차근 해보려 하고 조금 더 생동감 있게, 더 자주 소통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