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제전악 - 장미의 잔상>
제전(祭典)은 문화, 예술, 체육 따위와 관련하여 성대히 열리는 사회적인 행사라는 의미를 지닌다. 제전악(祭典樂)은 이러한 제전을 밝혀 주는 음악이다. 이번 <제전악-장미의 잔상>은 국립현대무용단의 시즌 공연을 넘어서 한국만의 컨템포러리 댄스(contemporary dance)를 보여주는 하나의 축제가 되었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제전악-장미의 잔상>은 안성수 예술감독 취임 후 처음으로 안무한 작품이다. 2009년 <장미(봄의 제전)>, 2016년 <혼합> 등의 작품을 선보인 바 있는 안성수 예술감독은 현대무용 안무가이지만 장르를 불문하고 국립무용단의 <단>, 국립발레단의 <포이즈> 등 현대무용과 발레 속에서 한국무용을 혼합하며 한국의 컨템포러리 댄스 무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연장선상에 있는 <제전악-장미의 잔상>에서 또한 한국의 다양한 춤과 전통 음악이 마주했다. 특히 태평무와 오고무의 움직임이 현대적 분위기에 혼합되어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한다.
이번 공연의 작곡 및 음악 감독은 신예 작곡가 라예송이 맡았다. 전통예술원을 졸업한 라예송작곡가는 공연을 위해 가야금, 거문고, 대금, 해금, 피리, 전통 타악기 등 10여 개 이상의 한국의 전통 악기로 구성된 음악을 작곡했다. 작업 초기에안성수 예술감독은 라예송 작곡가에게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봄의 제전>을 국악기로 편곡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라예송 작곡가는 서양곡을 전통 악기로 옮겨 연주하기 보다 <장미의 제전>에 들어맞을 새로운 음악을 만들 것을 역제안했다. 안성수 예술감독과 라예송 작곡가는 음악과 안무를 주고받는 소통 속에서 이번 작품을 구성했다. 안성수 예술감독은 “이렇게 써내려간 선율에 맞춰 오늘날 우리 무용수들이 펼치는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라고 밝혔다.
Ⓒ 국립현대무용단
오늘의 <제전악-장미의 잔상>이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안성수 예술감독과 라예송 작곡가의 관계 속 보이지 않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무용 안무가 안성수가 라예송에게 건네는 믿음이 없었다면 과연 누가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연주되는 한국 전통음악에 안무를 짜고 군무를 해낼 수 있었을까. 또한 어떤 작곡가가 음악 공연이 아닌 무용 공연을 위해 10개 이상의 악기와 5명의 악사로 구성된 라이브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업할 수 있었을까. 특히 이번 공연은 안성수의 개인 작품이 아닌 국립현대무용단의 작품이다. 거대하면서도 실험적인 도전이 지금 막 예술계에 입성한 라예송의 전통음악과 조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 덕분에 이 작품은 음악에 집중하지 않고 그 잔상 위에서 춤을 즐길 수 있고, 혹은 춤의 잔상 속에서 음악을 즐길 수 있다. 관객 개개인의 예술적 취향이 달라도 감성이 달라도 모두에게 다양한 방식으로써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현재와 과거가 한 무대에서 함께 했고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이 소통을 통해 무대를 지탱했다. 서로의 믿음에서 탄생한 이 작품이야말로 우리의 세포를 자극하는 본능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예술이고 제전이다.
무대의 막이 오른 동시에 태평춤이 제전을 알린다. 조금씩 변화하는 장면은 지나간 과거를 묘사하듯 조용히 흘러간다. 검은 의상의 무용수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지나간 일은 해결되었다는 것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움직임을 보이다가도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전쟁의 반복, 평화와 번성을 기리는 모습들. 그 중 곰과 호랑이의 장면은 우리에게 특별한 단군 신화를 온몸으로 표현한 장면이다. 시간 여행의 반복이 끝난 뒤 세계의 평화를 기리는 디베르티스망1)에 이어 시작을 알렸던 태평춤으로 다시 돌아와 작품은 마무리가 된다.
무대가 진행되는 60분은 그 자체로 역사가 되었다. 휴식 없이 달려온 나와 우리의 삶 속 모습을 돌아 볼 수 있는 축제였다. 검은 무용수들의 움직임 속에는 바쁜 현대인의 모습이 보인다. 과거의 인기척과 먼 옛날의 사건들, 그리고 태초의 조상들까지도 보인다. 그 모든 것들을 인도하고 무대 전체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한국 전통 악사의 제전악인 셈이다. 장미는 사계절 내내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짧은 순간 동안 화려하게 피어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제전의 순간이다. 무대의 막이 내리고 동시에 장미의 형상이 우리를 떠나갈지라도 그 잔상은 쉽사리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춤은 본능적인 움직임이기에 누구에게나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다. 음악 역시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그래왔듯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한다. 그렇기에 이번 무대는 우리 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한다. 세계 속 한국만의 컨템포러리 댄스가 필요한 지금 이 순간 안성수 예술감독과 라예송 작곡가의 이번 제전이 특별한 시작이 되리라 믿는다. 제전(祭典)의 또 다른 의미는 ‘제사의 의식’이다. 제전의 일종으로 과거 사람들은 굿을 했다. 굿은 길흉화복을 원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춤과 음악으로 표현하는 행사이다. 이번 <제전악- 장미의 잔상>은 한국 컨템포러리 댄스의 세계적 발전을 희망하는 우리 모두의 염원을 담은 또 다른 굿이다. 안성수와 라예송의 이 도전은 감동적인 무대를 넘어 모두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