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2024 SUMMER50
©팀서화

경계선 안의 회색지대 2024 공예주간
〈당신의 쓸모를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

지난 5월 17일부터 26일까지 팀서화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무계원에서 전시 〈당신의 쓸모를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를 열었다. 이는 2024 공예주간의 일환으로, 주체가 된 팀서화는 도연희, 김성우 두 사람이 공동운영하는 문화예술전시 기획사이다. 이들은 한국의 전통을 다음 세대로 잇는 방법을 고민하며, 이번 전시를 유서 깊은 도시한옥인 무계원에 마련했다. 무계원은 안평대군이 몽유도원도를 그린 인왕산 일대에 위치한 전통 한옥이다. 종로문화재단 아래의 전통문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전시를 이루는 2024 공예주간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주관으로 열린 공예행사로서 전국의 거점도시를 기반으로 각 지역의 공예를 활성화하고자 2018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다. 전시 〈당신의 쓸모를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는 서울 지역의 기획프로그램으로 여타 다양한 행사들과 함께 열흘 동안 열렸다.

야트막한 경사로를 오르면 커다란 한옥의 대문이 보인다. 전통적 구조의 건물답게 뜰이 나오고, 사방의 모든 문이 열려 있어 맞바람이 선선하게 들었다. 바람의 길을 가르듯 여러 조형물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산뜻한 나무 향기와 공예 작업들은 퍽 잘 어울린다.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문턱을 넘었다면, 〈당신의 쓸모를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의 공예적 세계에 발 디딘 것이다.

©팀서화

17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의 공간은 크게 마당, 안채, 사랑채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마당은 다시 안마당과 뒷마당으로 나뉘며, 안채는 4개의 전시 공간으로 분류되어 있다. 전통적인 양식의 한옥 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동시대의 한국 공예 작가의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전시를 이루는 작품들은 공예와 예술의 경계를 흐리는 듯 보이는데,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통용되어 온 ‘공예’의 정의를 되짚어 보는 것이 먼저다. 사전적 의미의 공예는 물건을 만드는 기술에 관한 재주를 뜻한다. 주로 전통적인 공예품을 떠올린다면 도자기, 칠기 등의 아름다운 실용품이 그려지곤 한다. 관습적인 공예품이란 미적 기능과 실용적 기능을 두루 갖춘 물건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전시 〈당신의 쓸모를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를 이루는 작가 17인의 공예품은 그 의미를 조금 벗어나 있다. 예를 들어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앞마당에 놓인 김동현 작가의 〈symmetry stool〉은 제목에서부터 작품은 스스로 ‘스툴’이라는 가구의 한 형태임을 알리고 있지만, 스테인리스 재질의 특성을 각각 살린 다면체와 구성은 실용적 기능보다 미적 기능을 수행할 것처럼 보인다. 건물의 안채로 들어가면 여주용 작가의 〈관념〉을 마주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성행했던 산수의 형식을 빌려 병풍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마치 안견의 〈몽유도원도〉처럼, 관념 속 풍경을 형상화한 병풍이다. 원래 웃풍을 막아주면서도 장식품 역할을 했던 병풍은 현재 쓰임이 거의 없는 물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용 작가의 〈관념〉은 레이저 컷팅으로 철판을 재단한 현대의 수단으로 과거의 사물과 작가의 관념을 이끌어낸 과정과 의도를 되새기게 한다. 한편 사랑채 복도에는 김동해 작가의 〈풍경〉이 시선을 흐트러뜨린다. 난을 친 간결한 회화를 연상시키는 황동색 버들가지 형상의 조형물은 공간의 중심을 잡는다. 사랑채 안에는 김동현 작가의 〈인지의 부정 #04〉가 자리 잡았다. 커다란 검은 원형 안의 푸른 빛과 황동 빛이 섞인 구형의 금속체는 도무지 실용적 의미를 가늠키 어렵다. 감상에 도움을 얻기 위해 전시 리플렛을 펼쳐본다. 전시를 기획한 팀서화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시각적 혼돈을 유도”하는 것을 통해 우리 존재의 기억이나 인지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불확실한지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뒤뜰에 위치한 이형준 작가의 야외 조형 작품은 통상적으로 알려진 공예품보다는 관념적인 조각상처럼 보인다. 조약돌로 쌓아 올린 돌탑과 같은 모양은 인간의 소망이나 존재 자체에 대한 사색을 드러낸다. 그 밖에, 전시되어 있는 다른 작품들 역시 실용적 의미와는 멀어진, 관념적 혹은 미학적 의미와 가까운 ‘작품’을 선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공예와 예술의 경계는 어떤 것일까? 나아가 그 경계의 전통적 의의와 현대적 의미는 또 어떻게 다른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예술품과 공예품, 이 두 영역에서 각각 탄생한 작품의 기대효과를 두고 비교해 보자. 예술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감각과 사유를 경험하게 한다. 전통적 의미의 공예품은 사용자에게 아름다운 실용품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팀서화와 17인의 작가가 〈당신의 쓸모를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를 통해 제시하는 공예는 이러한 결과적 가치와 다소 거리가 있다. 공예의 전통적 기법을 사용해 현대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은 전통적인 공예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과 현대를 구분 짓고, 나아가 예술과 공예의 정의를 흐린다고도 할 수 있겠다. 공예의 새로운 가치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실용품을 만들어내는 공예와 작가 개인의 사유가 담긴 예술품을 오랜 시간 구분해 왔다. 이러한 이분법을 만드는 경계를 확대하여 본다면 그 안에는 무수한 회색의 공간이 존재한다. 예술의 기능을 하는 공예, 공예의 기능을 하는 예술, 예술의 의미를 잃은 예술과 공예의 의미를 잃은 공예… 이 무수한 스펙트럼을 표하는 방식 역시 무궁무진하다. 〈당신의 쓸모를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는 그중에서 공예의 형식을 차용한 예술을 제시하는 듯하다.

©팀서화

예술과 공예 간의 경계가 둘의 제작과 감상의 과정을 떠올려 본다면, 과연 유의미하다 할 수 있을까? 예술은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과정이다. 이 전시가 제시하는 공예 또한 그렇다. 전통적 공예라는 표현 방식과 형식을 빌려 새로운 사유와 경험을 담는 과정은 지난하다. 지난한 과정을 겪는 이들은 외롭고, 우울하며, 자유롭고, 도취 되어있다. 예술과 공예는 각각 같은 과정을 거쳐 서로를 구분하기 어려운 융합의 의미를 도출해 낸다. 따라서 본 전시의 목적은 새로운 공예의 자세를 제시하는 데 있다. 그 지향은 우리가 아는 예술의 자세이기도 하다. 쓰임이라는 결과물이 아닌 과정에 충실하며, 새로움을 도출하고, 관습적인 경계를 타파하는 자세 말이다.

위 질문은 창작과 노동 간의 경계와도 맞닿아있다. 노동의 사전적 의미는 크게 보면 ‘몸을 움직여 일을 함’을 뜻한다. 이 ‘움직여 일’을 하는 것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것은 생계유지를 위한 반복적인 노력들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노동을 떠올려 보자. 예컨대 백여 년 전 유럽에서 오랜 시간 동안 공장에서 노동하고 집에 돌아와 글을 쓰는 이들을 말이다. 이들에게 글쓰기란 생계와는 유별되는 다른 노동이었다. 현실 이상의 가치, 새로운 태도를 도모하는 노동이었던 것이다. 결국 ‘다른 노동’이라는 스펙트럼 위에 창작이 놓인다. 창작과 노동의 이분법은 무의미하다. 둘을 가르는 선을 무수히 파헤쳤을 때, 비로소 새로운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팀서화의 말을 인용하도록 한다.

“이번 전시는, 스스로를 규정하는 ‘쓰임’ 이라는 절대적 규율에 맞서는 젊은 공예가들의 치열한 질문을 담아내려고 했다. 스스로를 규정하는 쓰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혼탁하게 만들어 되려 그 ‘쓰임’ 의 기준을 찾고 있는 오늘날의 젊은 공예가들은, 박제된 공예의 답습과 정량화된 기준에 의한 가치 판단을 거부하는 듯하다. 자신만의 쓰임을 직접 찾기 위해 계량화된 규칙과 규율의 세계에서 스스로 벗어난 그들의 여정, 오직 쓸모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평가받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그들의 여정이 작은 철학적 울림을 전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제목 〈당신의 쓸모를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의 방점은 ‘굳이’ 에 찍혀 있다. 그것은 쓸모를 찾지 말라는 선언이라기보다는 자신만의 쓸모를 찾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겠다는 자세에 가깝다. 그리하여 쓸모를 찾는 그들의 여정이 설령 외롭고 지치고 고달플지라도 멈추지 않기를 응원하는, 그런 마음을 전시에 담았다.” (전시 가이드 중 발췌)

©팀서화

이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공예는 과정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이 과정은 창작하는 예술과 닮아 있다. 전통과 현재, 예술과 공예, 창작과 노동 간의 경계를 파고 들어가면, 어떠한 미세한 틈이 보인다. 틈은 경계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수많은 경계들이 의미하는 바는 곧 무수한 회색지대이자 경계의 무의미함이다.

전시에 대한 아쉬움을 꼽자면 이들이 제시하는 ‘공예’라는 장르에서 주시되는 전통적인 공예가 새로움을 이야기하기 위한 수단에 그쳤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공예의 형식, 예를 들어 병풍의 형태나 도자 등은 미학적 가치를 그리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 여러 가능성들을 따져보았을 때, 공예주간의 일환으로 개최된 전시인 만큼 표현방식으로서의 공예가 아닌 의미론적 혹은 목적으로서의 공예는 불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당신의 쓸모를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가 이야기 하는 바에 따르면 공예와 예술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할 뿐더러 그 경계를 유희하는 자체로 새로운 종류의 공예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글 정지원
영상을 공부하고 있다. 울리는 소리는 청각에 그치지 않고 촉각까지 도모하는 것과 같이, 복합적인 감각의 경험을 찾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