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2024 SUMMER50
사진 김경수

소용돌이의 운동성
이한범

비평을 하는 이가 책을 만들고 책을 만드는 이가 도서관을 운영한다. 이한범 비평가는 이 연쇄작용의 위에 있는 사람이다. 인쇄소가 즐비한 을지로 골목 가운데 자리 잡은 나선도서관에 발을 디딘다. 창문이 많고 볕이 잘 드는 따뜻한 공간에서 비평과 출판과 도서관을 운영하는 마음에 관해 묻는다.

이한범의 비평과 경계

이한범은 한예종 미술원 미술이론과를 졸업했다. 영상 전문 비평 매거진 『오큘로』(미디어버스)에서 필진이자 편집자로 활동한 바 있는데, 미술을 전공했음에도 영상 비평을 시작한 계기가 그의 가치관을 설명해 주는 듯하다. 영상이 갖는 매체적 특성과 예술 실천들의 즐거움을 우연히 접한 그는, 미술사학이나 미학과 같은 학문적 제도가 생산하는 지식보다 더 자유로운 비평의 언어가 생산하는 지식에 더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이것이 그를 비평의 길로 이끌었다.

“제가 생각하는 비평은 전문화된 장르가 아니에요. 평론가 등의 특수한 누군가의 직업적 활동이 아니고,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행동이거든요. 조르조 아감벤의 『행간』의 어떤 문장들을 보고 비평의 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고대 사람들에게 비평이란 지금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것, 앎의 경계를 탐색하는 작업이었다는 이야기였어요. 비평을 한다는 것은 내가 알고 모르는 것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몰아붙이는 행위에서 시작하죠. 모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사물의 의미에 관해 질문하는 것이 비평이라는 거예요.”

이처럼 이한범은 비평에 대해 ‘앎의 경계를 탐색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아는 것의 영역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모르는 것의 경계와 마주하고, 그 사이에서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신비주의자가 아닌 비평가는 없다. 앎 바깥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은 상상력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신비의 불꽃을 남겨놓는 것이 비평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말한다.

당연하게도 행동으로서의 비평은 글이 아닌 다른 매체로도 가능하다.

“그래서 비평은 어떻게 보면 제도화될 수 없는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 비평이 다른 학문에서의 제도적 지식 생산과는 다른 지식 생산 활동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모든 창작 행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굳이 비평을 글쓰기로만 하지 않아도 가능한 거예요. 비평을 특수한 행위나 운동으로 정의했을 때 그런 유연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무척 좋은 것 같아요. 글을 쓰지 않더라도, 혹은 글쓰기가 불가능할 때 다른 작업 방식으로도 비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한범은 디자인의 경험에 비추어 비평의 유용함을 말하기도 한다. 그는 비교적 최근에 강문식 디자이너와 협력하여 부산현대미술관의 정체성 아이덴티티를 재구축하는 디자인 공모전에 참여한 바 있다. 디자이너가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참여를 망설였으나, 막상 해보니 ‘디자인하는’ 과정 안에서 조형화하는 기술적 측면이 아닌, 방향성을 ‘생각하는’ 단계에 충분히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술 영역에서의 전문성을 활용하여 새로운 움직임과 변형을 도모하는 과정은 비평과 맞닿아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글쓰기의 또 다른 확장 가능성을 맛본 그는 최근 나선프레스 안에 ‘텍스트 디파트먼트’ 부서를 만들고 동료들과 여러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비평을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행위’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태도는 근대적인 학문과는 거리가 있다. 비평의 태도는 아는 바를 지식화하고 구조화하며, 설명하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글쓰기로서의 비평은 어쩔 수 없이 문학적이다. 이때 ‘문학적’이라는 표현은 시나 소설 등의 문학 장르와 무관하게 글을 씀으로써 가능해지는 픽션 자체에 가깝다. 사과라는 단어에서 사과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좋은 비평은 항상 문학적 글쓰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한범은 물음에서 비평을 시작한다. 그가 흥미롭게 느끼는 작품의 특정 면모는 지식과 구조를 통해 해석할 때보다 ‘이건 뭐지?’라는 물음을 던졌을 때 더 잘 보인다. 표면적인 질문에서 깊숙한 내부까지의 의미를 이끌어내며, 비평의 시간은 설명하기보다 생각하는데 향한다. 미술이나 영상과 같이 시각적인 창작물을 보며 문학적인 작업을 하는 비평 쓰기를 할 때, 미술 작품과 비평문은 이상한 공생 관계를 맺는다. 글쓰기를 통해 물질적인 것을 텍스트로 변환하는 것에 그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이 과정이 항상 고통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작품의 앎과 신비의 경계를 탐색하고, 이를 잘 드러내기 위한 비평 고유의 글쓰기 역량을 찾는 것, 이것은 거의 창작의 노고와도 같기 때문이다.

‘비평 행위의 근본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지향점을 두고 여러 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결국 비평은 이런 방식으로 그의 다른 모든 일과 얽힌다.

〈박보마: 사라지는 하루〉(2023, 나선도서관) 나선도서관 개관 전, 빈 공간에서 나선프레스에서 출판된 박보마 작가의 『사라지는 하루』를 전시한 모습.

나선의 운동성과 지향

나선도서관에서는 많은 행사가 열린다. 공간의 이름은 도서관이지만 강연회나 상영회, 읽기 모임, 오픈 스튜디오와 같이 다방면의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그러나 형식과 이름이 다르더라도 이들의 지향점은 결국 같다. 표면적으로는 다양해 보이지만, 이한범이 주최하는 모든 활동은 결국 ‘앎의 경계를 탐색하는 일들의 운동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이러한 운동성은 나선의 형상을 그린다. 불안정하고, 흩어지고, 결과 지향적이지 않으며,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운동성은 복잡한 듯 보이지만 어쩌면 단순하다. 다양한 행사들의 목적은 참여자들이 나선운동에 참여하고 재생산하는 것에 있다. 이한범은 이에 관해 ‘나선’이 개인의 브랜드가 아닌 이념으로 남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와서 나선도서관과 나선프레스를 운영한다고 해도, 나선이라는, 예술생산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이 운동성에 대한 가치가 계속 만들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선도서관을 이루는 책들도 결국은 나선의 운동성이라는 가치를 향해서 모인다. 도서관을 방문하는 이는 마음대로 책을 꺼내 읽고 아무 데나 다시 꽂아도 된다. ‘나선’이라는 가치가 도서관의 분류체계의 인덱스가 되기 때문이다. 나선의 형상은 미술사나 철학사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된다. 1960-70년대 대지 미술가들은 거대한 나선을 땅에 새겼다. 고대 문명에서도 나선의 형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대 미술가들이 고대 문명을 호출하고 상상하는 과정은 이한범이 나선운동을 주목하는 문제의식과 함께한다. 다만 이한범은 역사 속 사례들을 레퍼런스 삼기보다는 지금 여기 나선에서 생산되고 실천되는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지금의 상황과 세계에 대한 반성 혹은 비판에서 출발하여, 그것들과 함께 다른 세계를 형성하고 이어 나가는 것, 그것을 목격하고 직접 참여하는 것, 중요한 것은 정말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인 운동이다.

“언젠가 나선이 ‘일링크스의 놀이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쓴 적이 있거든요. 저도 우연히 보게 된 건데, 로제 카이와라는 인류학자이자 평론가가 『놀이와 인간』(2018, 문예출판사)이라는 책에서 인류의 놀이를 분류하면서, 그 중 하나를 ‘일링크스(illinx)’라고 표현해요. 어린이들이 놀이를 할 때 역할놀이를 할 수도 있고, 또 그 밖의 여러 가지 놀이의 형식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중 일링크스는 빙글빙글 도는 놀이를 가리켜요. 놀이터에 가서 도는 기구를 타거나 혹은 서로 손을 잡고 그냥 맹렬히 제자리에서 도는 그런 것들 말이죠. 그 안에는 어떤 아름다움이나 의미가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떤 어지러움과 운동성뿐인 놀이가 분명히 있단 말이죠. 나선프레스와 나선도서관이 아이들한테 제공하고 싶은 놀이터는 연극 무대도, 교실도 아닌 일링크스의 놀이터라고 생각했어요. 어린이 뿐만 아니라 모든 독자들이 감각의 흐트러짐, 현기증과 같은 읽기 경험을 겪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책을 만드는 것 같아요. 이를 시도하기 위해 여러 협업자들과 방향성을 계속 모색하고 있어요.”

이한범이 나선도서관에 대해 내세우는 키워드는 ‘시끄러운 도서관’이다. 나선도서관을 이루는 책들도, 나선프레스에서 만들어지는 책들도 시끄럽길 바란다. 놀이터에 가면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하다. 특별한 교훈을 주거나, 문학적 가치로 가득한 책을 만들기보다는 어지러움과 놀이 뿐인 도서관과 책. 이러한 지향성은 나선이라는 공간이 서점이 아니라 도서관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서점은 금전적인 가치가 작용하는 공간이다. 서점 안에서 책은 어쩔 수 없이 상품에 불과하다. 서점에서는 더 이상 책에 대안 정치적인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도서관은 보다 더 소비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선’은 왜 전시 공간이 아닌 도서관의 이름을 달고 있을까? 이한범은 전시장으로만 가득한 미술 제도 역시 정치적 가능성이 없는 모습이라고 답한다.

〈조범석: 숲의 사람들〉(2024, 나선도서관) 나선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영화 프로그램 중 최근에 했었던 조범석 감독의 상영회.

“책과 관련해서, 더 이상 서점은 정치적일 수 없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어떤 가능성을 타진하기에는 한계를 마주했다고 판단했어요. 서점은 이제 낭시가 말했던 사유의 거래 장소가 아니에요. 서점이라는 공간은 강력한 소비주의랑 더 깊이 관련 되어가고 있고, 그로부터 자유롭고 보다 정치적인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게 저는 도서관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만 저는 미술 제도에 걸쳐있기 때문에 서점보다는 왜 전시장이 아닌 도서관을 하냐는 질문을 더 많이 받았거든요. 저는 전시장으로만 가득한 미술 제도가 지옥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정체성이 뭔지 모를 대관 미술 공간들은 끊임없이 문화 상품으로서의 예술 생산과 소비만 종용한단 말이죠. 그 소비주의 동력들이 지금 최고조에 이른 것 같아요. 그러나 예술적 작업이란 제가 생각하기에는, 결코 작품으로만 환원되는 게 아니에요. 작업의 의미에 있어서는 작품이 형성되기까지, 심지어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의 복잡한 관계들을 총칭하는 것인데, 지금 여기에는 이런 시간을 상상하고 다룰 수 있는 장소가 없었어요. 제가 도서관을 만든 이유는 이런 고도의 소비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기도 해요”

도서관은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뿐인 세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경제적 가치와 무방하며, 비생산적이고, 결과 지향적이지 않은 공간에서 그는 누구나 생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비평적 태도와도 맥이 닿아있다. 소비주의적인 풍경에 대한 비평적 태도의 나선운동을 지향한다는 말로 나선 도서관을 요약할 수 있겠다.

나선과 노동

나선도서관은 토요일에만 문을 연다. 운영자인 이한범은 이에 대해 자신이 감당 가능한 수준의 노동을 영위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평일에는 비평가로서 글을 쓰고, 수익을 위한 다른 활동을 병행한다. 그 이상의 노동은 공간을 변질시킬지도 모른다. 나선도서관은 정식 공공 도서관으로 등록되어 있고, 운영 시간에는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방문자들이 보증금을 내고 회원이 되면 책을 빌릴 수도 있다. 빌린 책에는 아날로그한 방식으로 기록을 남긴다. 약 1,300권의 장서가 있는데, 해당 규모에는 아날로그 방식의 처리가 더욱 합리적인 노동이었다고 한다.

나선도서관 한편에는 나선프레스의 오피스가 있다. 나선프레스는 예술 실천과 관련된 다양한 책을 만드는 출판사이다. 책을 만드는 일은 협업이다. 그렇기에 이한범에게는 작업자들 간의 관계성이 중요하다. 만약 새로운 관계를 도모한다면, 기존의 것과는 다른 책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나선프레스가 탄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한범은 기존 출판 계약의 방식 안에서 수많은 협업 관계가 지워졌다고 느꼈다. 저자뿐만이 아니라 편집자와 디자이너 등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담겨도, 그것을 표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끄러운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습적 관계를 부술 필요가 있었다.

“저에게 책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생산에 참여하는 관계성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사실은 정말 다른 결과물을 만들고자 할 때, 이 관계를 재발명하지 않으면 그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다른 생산 모델을 상상해야 그나마 조금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굳이 제 출판사를 차려서 작업을 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생산 조건 자체를 자율적으로 설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건 편집자의 일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 있는 것이죠.”

이 과정을 이한범은 ‘신비하다’고 표현했다. 예를 들어 빵을 만드는 과정과도 같은 것이다. 제빵사는 밀가루를 반죽하고 발효하며 굽는 시끄러운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따끈하고 맛있는 빵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은 일상적이지만 신비하다. 나선도서관과 395 빵집의 협업을 신비의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그에게는 책을 만들고 비평하는 것도, 빵을 만드는 것도, 그리고 도서관이라는 공간도, 빵집이라는 공간도 항상 새로운 관계, 새로운 발명 그리고 어떤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노동과 휴식 사이의 방랑

창작이 그렇듯 비평은 쉼 없는 일이다. 고단한 노동이다. 휴식과 노동 사이에서 이한범은 어떤 균형을 잡고 있을까? 그는 노동과 휴식의 구분을 부정한다. 휴식이란 노동을 고난스럽고 힘든 것으로 규정하며 생긴 이분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삶을 노동과 휴식으로 나눈다면 일을 하는 시간은 끔찍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이한범은 방랑을 택한다.

방랑은 노동과 휴식 사이의 구분과 무관하다. 이분법을 지양하는 것이다. 물론 방랑 역시 고단하다. 그러나 노동의 고단함과는 다르다. 쉼 없이 어딘가를 향한다는 운동성으로 인한 고단함이다. 그는 물론 육체적인 휴식은 필요하지만, 일의 부정으로서의 휴식을 취한다면 더 이상 방랑을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한다. 자연스럽게 일하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시간의 범주는 흐려진다.

빅토리아 시대의 프롤레타리아들은 고된 노동을 하고도 집에 돌아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비평적 작업을 했다. 자크 랑시에르는 이를 ‘나선의 밤’이라고 칭했다. 쳇바퀴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그저 잠에 든다면 이것은 오로지 닫힌 원형 운동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수면을 미루며 비스듬하게, 다른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방랑. 이 방랑은 비평적 태도에서 온다.

방랑은 소비주의의 순환에서 벗어난 행동이기도 하다. 노동과 여가는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분법 아래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도망치는 어긋남의 시작으로서도 방랑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따라서 비평은 방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선이라는 공간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 경계를 넘나드는지, 다양한 정체성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다. 예컨대 미술과 영상 비평은 무엇이 다른지, 편집자로서의 노동과 도서관에서의 노동은 어떻게 다른지. 다양함 안의 차이점과 경계선을 묻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들은 공통된 가치를 바라본다. 단순하고 명확하다. 나선 운동을 지향하는 것. 나선운동은 현기증으로 가득하다. 이 현기증은 원점으로부터 빗나간, 조금은 나아간, 처음과는 다른 지점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한범은 가까운 시일 내에 자신의 첫 평론집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또한 ‘움직임의 박물관’이라는 출판 시리즈도 기획 중에 있다. 박물관이란 움직임에 취약한 공간이다. 견고하게 남은 것들, 움직이지 않는 것들로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움직임의 박물관’은 박물관이라는 제도가 생산하는 지식과 문화 아래에서 다루지 못했던 움직임에 대해 탐색하고자 한다.

추후에도 나선운동을 실천해 나갈 그의 멈추지 않는 프로젝트를 기약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글 정지원
영상을 공부하고 있다. 울리는 소리는 청각에 그치지 않고 촉각까지 도모하는 것과 같이, 복합적인 감각의 경험을 찾는 중이다.

영상 남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