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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의 전성기에 관한 영원한 수다

잡지에 관해서 할 말은 다들 많다. 잡지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이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가 이전에 지녔던 위상을 아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느낄만하다. 나는 2015년도에 있었던 문예지 줄 폐간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민음사에서 발행하던 계간지 『세계의 문학』이 폐간되며 문학잡지의 높은 위상의 시대가 끝났다는 인식이 팽배할 무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로 〈지금 다시, 문예지〉라는 좌담회가 기획됐다. 좌담회는 녹취되어 동명의 책(미디어버스, 2016)으로 만들어졌는데, 당시 나는 녹취 기록 아르바이트를 맡게 되었다. 클로바노트도 없던 시기에 녹취록을 풀어 타이핑하느라 굉장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새롭게 시작한 문예지들은 『악스트 Axt』, 『릿터 Littor』 등이었고, 그중에서는 문예지는 아니었지만, 큰 반응을 얻었던 『analrealism vol. 1』(2015, 서울생활)을 낸 후장사실주의자도 있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났고, 잡지들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릿터』는 이제 명실상부 인기 상품이 되었다. 『릿터』는 유명 연예인과 인플루언서의 글과 인터뷰를 게재하는 행보를 보였으며, 신진작가를 소개하고 그들의 신작을 홍보하는 자리가 되었다. 『악스트』 또한 ‘비평’의 자리를 확장하는 것보다는 작가 인터뷰에 더 많은 방점을 찍었다. 어쩌면 이러한 신진 잡지들의 성공은 비평을 대거 ‘경량화’하는 데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사실은, 그럴수록 비평은 게토화된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비교적 무거운 기성 잡지라고 일컬어지는 『문학동네』, 『문학과 사회』, 『자음과모음』 등은 모두 ‘비평’에 대한 메타 비평을 시도했다. 비평은 이제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삼는 것보다는, 비평 그 자체의 필요성을 스스로 제기하는 존재 증명에 나서고 있다.

나는 2016년도부터 2017년도까지 매거진 『K-Arts』의 필자로 활동 했다. 매우 즐거운 기억이었다.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었고, 잡지를 담당하는 선생님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었다. 비록 매번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진 못했지만, 샤브샤브 집에서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취직을 위한 이력서에 매거진 『K-Arts』 이력을 적었다. 내게는 알짜배기 아르바이트면서, 취준에 활용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이기도 했다.

윤가은 감독과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영화 〈우리들〉(2016)을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윤가은 영화감독은,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했다. 나는 〈우리들〉을 당시에는 아주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홍보 매거진의 성격상 그에게 부정적인 질문을 던지진 않았다. 그리고 매거진의 청탁을 받고는 근 10여 년 만에 윤가은의 행보를 찾아보았다. 〈우리들〉 이후 〈우리집〉(2019)이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올해까지 5년간 영화를 발표하지 못했다. 영화감독은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베팅하는 투기꾼 같은 직업이다.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는 영화감독에게 내가 항상 존경심을 가지는 이유다. 그럼에도 8년이 지난 후, 그의 작품에 보다 정확한 평가를 내려보자면, 나는 〈우리들〉이 봉준호의 표현대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더불어 아역배우를 스크린 위에 살아 숨 쉬게 하는 ‘3대 마스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들〉의 순수성은 어느 정도 미심쩍은 면이 있으며, 나는 그보다는 소마이 신지의 작품들이 훨씬 유년기를 잘 표현한다고 본다. 여담은 여기서 멈춘다.

이후에도, 오늘날 문화예술계에서 다소 예외적인 주제들까지도 아우를 수 있었던 매거진 『K-Arts』를 비롯하여 한예종의 지면들은 내게 의견 피력의 장이 되어 주었다. 한예종 학생 신문에선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2023, 글항아리)에 실린 「플레이리스트, 그것은 나의 즐거움: 취향, 폭력, 짐 오루크-기능」(이하 ‘짐 오루크-기능’)의 초안 버전을 연재했다. 내가 쓴 이 글은 한국의 어떤 매체에도 적합하게 실리지 못할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이 난해해서가 아니라, 관심 있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음악 웹진의 경우, 비평의 경량화는 치명적일 정도로 심각하다. 문학계와는 사뭇 다르다. 나는 2000년대부터 음악 웹진을 줄곧 팔로우해 왔다. 웹진 ‘웨이브 [weiv]’, ‘리드머’, 등등(이에 관해선 내가 쓴 『밀레니얼의 마음』(2022, 민음사) 서문을 참고하길 바란다). 음악 웹진과 저널리즘은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를 정도로 황폐해졌다. 케이팝 산업으로 음악 저널리즘 전부가 옮겨간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더는 스노비즘도, 취향의 경쟁도 의미가 없다. 음악 평론은 케이팝 산업의 아이돌들을 특정한 성정치의 맥락에서 독해하는 문화연구, 케이팝 산업의 가이드북 이상이 될 수 없다. 이런 와중에 내가 2020년 4회에 걸쳐 연재한 「짐 오루크-기능」은 테마가 있는 음악 비평이었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혜택을 받았다. 내가 쓴 여러 글이 있지만, 유독 「짐 오루크-기능」에 애정이 가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이 글을 받아줄 곳이 없었다는 점 때문이다. 매거진 『K-Arts』와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은 내게 커리어에 도움이 될 포트폴리오, 샤브샤브, 소정의 원고료뿐 아니라 국내 저널리즘 어디에도 실릴 수 없는 음악 비평 게재의 기회를 제공했다.

실제로 역사 속 매거진 저널리즘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장문 비평’을 가능하게 한 동력이었다. 일례로 미국의 반문화 잡지 『크림 CREEM』에서는 1970년대, 음악 비평가 레스터 뱅스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글을 썼고, 전후 미국 유대인 위원회가 창간한 잡지 『코멘터리』는 유대계 미국인의 문화적 성채였다. 『맥스위니스』 또는 『옥토버』, 『아트포럼』, 『북포럼』, 『이플럭스』, 『시네마스코프』는 현대미술, 문학, 영화, 동시대 문화연구 등 각 분야에서 담론을 실어 나르는 선박이었다. 각 분야에서 필자들을 성장시키고,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장이 되기도 했다. 이 잡지들은 하나씩 폐간되어 간다.
미국의 서평지 『북포럼』은 2022년 폐간을 발표했고(2023년 재간되었지만), 이에 비평가 크리스천 로렌첸은, 워싱턴 포스트에 「북포럼의 폐간으로 독자들이 잃은 것」이라는 글을 기고한다. 미술 잡지 『아트포럼』의 자매지로 출발한 『북포럼』은 문학계에 ‘장문 비평’의 영역을 구축했다. 로렌첸은 문학소비주의에 맞서는, 공정한 평론의 장소로서 서평지가 기능했다고 말한다. 이는 근래 나오는 모든 책들이 ‘북토크’와 ‘멋진 프로필 사진’으로 세일즈에 전념하는 것과 반대다. 이제 책은 작가를 위한 파생상품이 되어, 그 자체로 평가받기 힘들게 되었다. 능동적으로 패션지 화보를 찍는 작가들은 이제 하위 인플루언서처럼 보인다. 나 역시 『씨네21』과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것은 물론 작가의 신원을 보증하여 책이 잘 팔리게 할 뿐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작가에게 이득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로렌첸의 이야기는 한국의 상황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2010년대 한국에서도 협동조합 인터넷 언론인 ‘프레시안’이 장문서평지를 표방했고, 이는 나름의 반향을 일으켰다. 은행나무 출판사의 격월지 『악스트』는 사업 초기, 저돌적인 마케팅으로 작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프레시안’의 시도는 서평을 간신히 살려놓는 토대였다. 『악스트』의 홍보 방식은 계간지나 일간지를 제외하면, 작가 인터뷰에 긍정적인 가치를 두지 않았던 한국 문학계에 인터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왔다. 그럼에도 잡지의 종언이라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바꾸진 못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매거진 『K-Arts』는 분명 한국예술종합학교 홍보의 목적을 띠긴 했지만,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매거진 『K-Arts』에서 영화 〈특별시민〉 리뷰, 앞서 언급한 윤가은 감독 인터뷰, 영화 〈유리정원〉 리뷰 등 다채로운 작품들을 다뤘다. 물론, 여기에는 한예종 출신이 창작에 참여한 작품이라는 조항이 붙긴 했지만, 이는 얼마간 잡지의 전성기가 지난 시점에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로는 어떻게 보면, 매거진 『K-Arts』의 복지적인 성격도 있다. 매거진 『K-Arts』는 재학생의 비평을 독려하고, 졸업생의 성과를 지면에 공유한다. 나는 이에 혜택을 보았고, 그때의 감사함은 아마 내가 글을 그만 쓰는 시점 이후에도 지속될 것 같다.

여하간 공적 지원을 받는 매거진 『K-Arts』와는 달리, 대부분의 잡지들은 타협과 폐간을 선택지로 둘 수밖에 없었다. 타협의 결과는, 로렌첸이 말했던 ‘문학 소비주의’로의 전환이었다(투항 같은 표현은 닭살 돋는 뉘앙스를 내포하므로 쓰지 않는다.) 이 현상은 이제 디폴트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비평의 경량화, 문학의 에세이화, 작가 자아들의 난립... 평론가 홀로 이러한 난국을 빠져나오긴 쉽지 않다.

1] 비평의 경량화
2] 문학의 에세이화
3] 소비자주의

매거진, 잡지가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자체적으로 이슈화할 수 있는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비평가의 커리어 패스라는 돌발 변수까지 제기된다. 이를테면 나는 성공한 비평가일까? 아무도 나를 그렇게 보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비평계의 커리어 패스는 등단 후, 잡지에서의 평론가 생활로 귀착된다. 대학원과 교수 자리가 있을 수도 있다. 또 근래에는 유튜브나 이런저런 커리어가 덧붙여졌다. 소설가 조슈아 코언은 한 기고1에서 서평가와 비평가의 차이점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는데 매우 흥미롭다.

문학 평론가는 고급 타운하우스나 펜트하우스에 살며, 정장을 입고 학술 기관이나 부유한 동종업계에 속해 있다. 그러나 서평가는 그보다 더 초라한 아파트에 살고, 초라한 옷을 입으며 값싼 술과 담배를 즐긴다. 윌리엄 해즐릿과 매튜 아널드는 문학 평론가였고, 여름 인턴으로 일하는 1만 명의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들은 서평가였는데, 그들은 출판사에서 급히 500단어 정도의 서평이 필요할 때마다 서평가가 되었다.

시모어 크림은 문학 평론가가 되고 싶은 서평가였다. 그 후에는 수필가가 되고 싶은 문학 평론가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어느 쪽도 되지 못하고 아름답고도 가련한, 재치 있지만 진부한 글을 쓰는 글쟁이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 뉴욕 저널리즘의 잭 케루악으로, 그가 문학과 문학계의 가십을 다뤘던 칼럼 ‘문학 생활’ 은 1960년대 뉴저널리즘의 초석을 마련했다. 특히 크림의 숙적이었던 노먼 메일러의 저널리즘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Joshua Cohen, “The Beaten Cannoneer”, 《Forward》, 2010.3, 인용되는 본문은 필자 번역.

시모어 크림은 출세를 노골적으로 지향하진 않았지만(못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관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는 솔직하게 무력함과 열등감을 고백했다. 다른 문학에 대한 문학인 비평은 어쩌면 이러한 열등감을 필연적으로 내면화하는 기제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잡지는 비평가에게 있는 거의 유일한 커리어 패스 중 하나다. 어떤 예술 작품의 바깥에서 그것의 핵심을 설명하는 목표를 지닌 비평이 소비주의화 되었다는 것은 작품의 매력을 들여다보는 데 실패했거나, 스스로 매력을 갖는 데 실패한 비평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예컨대 비평이 에세이처럼 변하는 이유는, 그것이 엄정함이라는 잣대에서 벗어나 작품의 매력 자본을 부추기고, 스스로 매력적으로 보이려는 데서 유래한다. 이로 인해 비평(과 더불어 문학)은 점차 투명성에 자신을 개방한다. 잡지는 한때 예술에서 일어나는 책략과 술수를 분석하고, 형식 간의 전쟁을 매개하던 장소였다. 비평가는 아마도 문학의 외교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문학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 투명해져야 한다. 자본에, 혹은 나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우리는 매력을 갖춰야 하고,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잡지는 싸움의 장소라기보다는 매칭 애플리케이션이 되었다. 크림처럼 실패한 비평가이자, 실패한 산문가는 오늘날에 잡지에서 그렇게 환대받는 작가는 아닐 것이다. 크림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엄숙한 비평 스타일에서 탈피, 구어적이고 생생한 언어로 비평을 썼지만, 그의 지위는 어중간한 평론가로 머물며, 독자에게 호응받지 못했다. 그는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노먼 메일러에 대한 열등감을 공공연히 드러내곤 했다. 노먼 메일러는 크림의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했다. 비록 그가 메일러가 번 돈이나, 영예까지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메일러가 얻은 문학계의 권위는 그를 괴롭히는 촉매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크림의 감정이 잘 드러나는 한 글의 제목은 「노먼 메일러, 내 머리에서 나가!」다.) 코언에 따르면 크림은 1989년 여름에 죽었다. 그는 조카에게 바비 튜레이트라는 진정제 계열의 약품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심부름을 마친 조카는 크림에게 계산서를 가져다주었다는데, 크림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렇게 많이 샀는데, 2달러라도 할인이 안 되나”였다고 한다.

“크림의 뉴욕 타임스 부고는 예상대로 사소하고 유보적이었다. 반면 메일러의 사망 소식은 20년 후 1면에 실렸다.”

무슨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으려나? 이후, 매거진 『K-Arts』를 그만둔 건 2018년이었다. 취업을 위해서였다. 종종 그때의 즐거움을 떠올리곤 한다. 나는 작은 명성을 지닌 평론가다. 의미가 있을까? 매거진을 펼치고 그 지면에 내가 썼던 글들을 상상해 본다. 내가 꿈꿨던 미래의 번뜩임도. 가정법을 통해 과거에서 오늘날을 투사하는 상상력은 언제나 달콤하다. 매거진 『K-Arts』 덕분에, 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얻은 좋은 시간 덕분에 달콤함을 누릴 수 있었다.

Long Live K-Arts Magazine!

글 강덕구
작가, 비평가. 영화를 공부했다. 요즘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영웅, 상징,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