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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실패하기

나는 작년에 한예종 영상원에서 타 기관과 공동으로 주관했던 한국-카자흐스탄 청년 다큐멘터리 공동 창작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 4월부터 기획하고 7월에 열흘가량 촬영 후 편집하여 12월 교내 상영회에서 팀마다 완성된 영상을 상영했다. 상영회가 끝나며 프로젝트도 함께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상영회 당시의 영상이 영화가 될 수는 없었다. 미완의 작업이라는 감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미완의 감각은 공식 프로젝트 종료와는 무관하게 영화 내적으로 푸티지 활용 부족,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는 정보의 과다, 첨예하지 못한 구조적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영화 외적으로는 상영회 전후로 들었던, 언어적 모욕으로부터 거리두기에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묵묵히 이 작업을 조금 더 발전시키게 되면 그런 수치도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은연중에 믿었던 것 같다. 추가편집을 통해 영화 자체와 영화를 둘러싼 과거의 선택들, 시간들(불쾌한 표현에 반박하지 못했던 시간까지도)을 재구성하고 싶었다. 따라서 나는 계속하겠다고 결정했다.

이 글이 쓰이기 시작했던 5월 말까지도 나는 편집 작업을 완료하지 못한 상태였다. 3월부터 4월까지는 작업을 완료하기 위해 수업 시간과 잠자는 시간 외에 거의 모든 시간을 개인 편집실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해서 작업의 진척이 그 시간들과 비례하지는 않았다. 작업이 조금씩 나아가는 감각은 5월이 되어서야 조금씩 느낄 수 있었을 뿐, 그전까지는 쌓고 허물기의 연속이었다.

새로운 학기가 진행 중임에도 이미 공식적으로는 종료된 작업을 계속 잡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작업 아직도 해?’, ‘언제 끝나?’ 같은 질문을 자주 들었다. 3월 말까지는 스스로가 이 작업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고 있고 그것을 쉽게 봉합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며 ‘이번 달에는 끝날 것 같다’는 나의 말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게 되면서 자긍심 또한 점차 쇠약해져갔다. 믿음이 약해질수록, 지워내고 싶었던 말들은 또렷해지곤 했다.

나의 의지로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끝나지 않는, 끝낼 수 없는, 끝내지 못하는 작업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적어도 3, 4월의 내겐 그 사실이 무능력의 징표로 다가왔다. 그 시기엔 이 미완성된 영화가 가까스로 봉합된다고 하더라도, 제도 내에서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창작의 불확실성이 압박과 회의감으로 다가오곤 했다. 5월이 되어도 작업이 마무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점차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여전히 그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데도 영화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다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개인편집실에서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친구들과 대화하면서도 그 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작업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내가 작업을 깎아가는 게 아니라, 작업이 나를 깎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학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작업적으로 패배감과 우울감에 빠졌다. 새로운 워크숍 작업을 시작하는 데에도 공포감을 갖기 시작했고, 그러다…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끝나지 않는 작업처럼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이 나 혼자 쌓고 무너뜨리고, 또 작업을 반복하면서 해결하면 되는 문제인가? 각자의 작업으로 바쁜 이 학교에서, 이런 자기분열감은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까. ‘아직도 해? 언제 끝나?’라는 완성을 전제로 하는 질문이 아닌, 봉합되지 않은 작업의 풍경을 같이 봐줄 수 있는 언어, 대화의 장을 여는 언어는 무엇이 있을까. 작업을 계속 해 나갈 수 있게 하는 비판적 지지는 어떻게 건넬 수 있을까. 창작물에 시간을 쏟더라도 그것이 완성될 지, 미완으로 남게 될 지 알 수 없으며, 완성되더라도 제도권에 승인되어 관객/독자를 만날 수 있을 지는 불확실하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창작 활동을 지속하는 데 있어 심리적 부담과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다.

제도(심사위원, 영화제, 제작 지원 등)가 내 작업을 승인하면 이런 고민이 자연스레 해결되는 걸까. 정답을 향하는 작업이 아니라, 기꺼이 길을 잃고 헤매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라도, 예술이 가진 반노동적, 비노동적 속성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실패와 미봉합과 흔들림이 지금보다는 좀 더 자주 말해져야 한다. 끝까지 가서 잘 실패해 보는 것, 그렇게 해서 그것이 어떤 실패였는지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공유할 때 열리는 진지한 대화를 원한다. 만약 실패와 흔들림이 예술창작의 숙명이라면, 학교라는 공간은 다른 공간과는 조금 달라야 하는 거 아닐까.

나는 다른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작업의 실패, 혹은 미완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따라서 취재를 위해 실패와 연장의 작업, 자의든 타의든 자신과 작업의 관계가 흔들리는 경험을 한 이들을 찾는다고 글을 올렸다. 그렇게 총 세 명의 이야기를 싣는다. 수림과 사과(가명)는 영상원 방송영상과, 선진은 미술원 미술이론과에 다니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수림은 졸업작품을 만드는 데에 4년이 걸렸다. 졸업상영회가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편집을 진행 중이다. 작업을 시작할 때는 1년만 하면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촬영을 마치고, 이제 편집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즈음에 외부 기획개발 멘토링에서 작품 주제와 촬영 스타일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수림은 질문에 미처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었고, 자신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편집 구성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정리를 해도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 쓴 것처럼 느껴졌다. 그 상태가 1년 반 정도 지속됐다. 졸업을 해야 했기에 간신히 편집을 진행하기 시작했는데, 막상 편집을 시작하니, 자기 작업의 규모를 제대로 인지하게 됐고, 그 후부터 불안이나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선생님과 면담하며 수림은 “전 자신이 없어요. 근데 자신이 없다는 게 절 계속 편집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고 “그러면 계속 자신 없어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이렇게 계속 편집해 가시면 될 것 같아요.”라는 답을 들었다. 이렇듯 ‘자신 없음’은 계속 수림이 이 작업을 쉽게 봉합하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그 ‘봉합하지 못 함’의 상태 오랜 시간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작품에 필요한 언어를 끝까지 찾아가도록 만들었다.

선진은 미술이론과를 주전공으로, 방송영상과를 복수전공으로 하여 미술이 사회와 만나는 방식에 관해 공부한다. 그러나 미술이론과는 현대사회보다는 미술사에 집중하므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는 점에서 간극을 느낀다. 이론과는 특성상 그 분위기가 학계의 전통과 닮아있다. 학회라는 자리가 계속해서 검증하고 비판을 받아야 하는 자리이기에, 자기 말이 얼마나 설득력 있고, 자신이 어느 정도의 학술적인 연구를 해왔고, 그것이 얼마나 타당한지 보여줘야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 또한 “제가 뭐라고 이런 말을 하겠습니다만”으로 자주 첫 운을 뗀다. 그러다 보니, 현직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글을 쓸 때도 주로 정답을 지향하는 글을 쓰게 된다.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있더라도, 만약 선행연구가 없다면 그 주제를 기피하게 된다. 선진은 이론과에서 공부하며 스스로를 연구자로 생각하기보단, 아직 자격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패배감을 종종 친구들에게서 감지하곤 했다. 이론적인 비약, 실패, 실수가 있을 때 이것 또한 배움의 과정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다들 틀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서 써왔는데, 틀렸다고 할 때 조금씩 금이 간다. 선진은 객관성과 합리성, 설득력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런 지점에 매몰되다 보면 결국 자신이 해석을 개진하거나 평론하는 게 어려워지고, 기존의 의견들만 정리하는 방향으로만 말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과(가명)는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작년에 〈00콧구멍(가제)〉이라는 작업으로 곳곳에서 제작 지원을 받았다. 제작 지원을 받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감각, 영화 출연진에게 경제적인 보답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 완성 및 상영을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러나 지원사업 1차에 합격한 후에는 심사위원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졌다. 사과는 한 제작 지원에서 심사위원으로부터 다른 방향성을 제안받았는데, 그 방향성이 작품의 기획 의도와 맞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 후 논의가 감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느껴졌고, “나라면 이 영화 절대 안 볼 거다, 내가 심사위원이면 돈 안 줄 거다.”라는 말을 들었다. 심사위원에게 자신의 의도와 이유를 설명했으나,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자리를 이동했다.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듣고 그것을 수용할지 말지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지만, 심사위원의 위계적인 모욕 언사를 들을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당시 ‘내 작품이 이상한가?’, ‘내가 비이성적이고 지금 감정적으로 구는 건가?’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피드백이라는 겉모습을 띠었을 뿐, 작업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한 후에는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그 시기에 건강한 상태였기 때문에 극복한 것이지, 절대 가벼이 여길 상황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세 사람을 만나며 예기치 않게 기한이 자꾸 길어졌던 작업, 미완의 작업/작업자로 남게 만드는 학과의 분위기, 제작 지원사업으로부터 승인되었음에도 계속되는 인정투쟁에 대해 들었다. 세 이야기는 자신의 작업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자기분열감과 내부적 갈등이라는 면에서 연결되어 있는 경험으로 들린다. 이 과정에서 창작자들은 완성에 대한 불확실성, 자기 작업에 대한 회의감, 외부의 평가와 내적 기준 사이에서의 갈등을 겪는다. 작업을 잘 만들고 싶은 욕망, 조금 더 나은 작업을 만들고 싶은데 그게 잘되지 않는 좌절, 그 욕망과 좌절을 둘러싼 상황은 나와 작업 사이의 거리감을 쉽게 없애버린다. 위의 세 사례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은 미완, 실패, 지연의 경험을 통과하며, 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과는 다른 목표를 상상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좋은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주목받는 창작자가 되어 일정한 수익을 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싶다는 욕망과 같은 걸까. 절망은 이 두 욕망이 다르다고 해도 구분할 수도 없고 그런 시도 자체가 우스꽝스럽게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에서 온다.”1 시장경제에는 승자와 패자, 성공과 실패, 완성과 미완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생산성을 중심으로 단기간에 가시적인 효과를 보려는 여러 정책들, 창작들이 결과적으로는 부작용을 드러내는 것을 우리는 헤아릴 수도 없이 보아왔다.”2 예술가 또한 그러한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3 그렇기에 수림이 영화를 쉽게 봉합하기보다 지연시킨 것, 선진이 학과가 규정한 미술이론 너머를 보고자 하는 것, 사과가 제작 지원사업의 심사위원으로부터 승인받고자 애쓰기보다 작업을 더 단단히 움켜쥐고자 하는 것은 시장성 내지는 지배 질서에 쉽게 흡수되지 않겠다는 움직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존의 언어로부터 누락되는 마음, 작업을 살피는 것, 그렇게 더 적극적으로 ◦◦으로 남는 것, 이를 실천으로서의 ◦◦4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렇게 ◦◦의 의미와 정치성을 찾는 것이야말로, 예술창작자가 해내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나는 이 글과 함께 2주가량의 시간을 보내며, 앞서 이야기했던 영화편집 작업을 끝마쳤다. 결국 영화제라는 또 다른 공식적인 마감 기한을 빌미로 마무리 지어볼 수 있었다. 이쯤 하면 충분히 만족스럽냐는 질문에 아직은 머뭇거려진다. 하지만 제한된 소스 안에서 하고 싶은 걸 다 해봤냐는 질문에는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섣불리 봉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작업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시기에는, 레퍼런스와 각종 전시, 영화, 산책 등을 통해 나 자신이 작업보다 커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작업을 하면서는 작업이 나보다 커지기도 하고, 내가 다시 작업보다 커지기도 하면서 나와 작업의 변화가 엎치락뒤치락 서로를 부풀리고 또 깎았다. 그러니 이번 마무리 또한 하나의 과정이 될지도 모른다. 끝은 언제나 다시 열릴 가능성을 내포한다. 작품과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겼을 때, 내가 변화하여 작품의 언어가 낡았다고 생각될 때, 공들여 쌓았던 언어 위에 다시 다른 언어를 쌓으며 다른 이야기를 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모든 과정은 반복되지면 결코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나선형의 과정이 된다.

한예종에서 수많은 예술 창작자들이 머물고 있다면, 이 공간은 그 과제를 어떻게 뒷받침 해줄 수 있을까. 미래의 고전을 창작하는 것이 학교의 설립 이념이라면, 한예종의 공간은 실패를 무수히 연습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실패가 머물 공간이 충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학교는 서로의 실패를 함께 목격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실패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고, 실패를 가지고 작업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5 실패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길 바란다. 다만 그것은 “‘다시-보기’(re-view)”6를 위한 움직임이어야 한다. “상대의 ‘다시 봄’을 나에게로 다시 들여오는 끝없는 순환의 과정 속에서”7 작업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상호돌봄의 움직임이기도 하다.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을 같이 봐주고 질문해 주고 징징거림을 들어주는 동료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실패와 미완에 대한 담론, 다시 말해 창작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공동체가 되길 기대해본다.

1
차재민, 『1보다 크거나 작거나』, 아우름북스(2024), 184p.
2
임옥희,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여이연(2010), 336p.
3
lbid.
4
잭 핼버스탬,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현실문화 (2024), 182p.
5
같은 책, 199p.
6
이여로,
“다시 보아 주는 사람들, 사물들”, 《세마 코랄》, 2023년 1월 16일.
7
같은 글.

부록 :
지난해 방송영상과의 〈다큐멘터리워크숍2〉 수업에서 마민지 선생님은 학기 초반에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본래라면 다른 이에게 나의 팀원이 되어달라고 요청할 때, 품앗이를 통해 각자의 노동력을 거래하게 된다. 타인이 자신의 작업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 자기 자신을 표준근로계약서로 고용해보는 연습을 했다. 주 몇 일, 하루 몇 시간을 노동할 것이고, 몇 시간을 쉴 것인지, 본인에게 해당하는 임금이나 잠재적 포상은 무엇이고, 개인과의 작업적 약속은 무엇인지 나름대로 계약 조건을 작성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학기 말이 되어가면서 작업이 일상을 압도하게 되고, 표준근로계약서를 지키는 날보다 지키지 못하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이 계약서를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작업으로부터 거리두기가 되기도 했다. 삶과 작업을 의도적으로 분리하고, 이것이 나의 노동력을 쏟고 있는 작업임을 떠올렸을 때, 작업이 곧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게 됐다. 이러한 분리는 때론 작업을 더 나아가게, 실패를 덜 두렵게 만들기도 했다. 작업이 삶으로부터 영향을 받긴 하지만, 적어도 쉼과 작업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마민지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고자 했다.

방송영상과의 강보라 선생님은 예술사 〈참여관찰방법론〉과 전문사 〈다큐멘터리 세미나 1-조사방법론〉 수업에서 학기 초중반에 실패파티를 연다. ‘실패에 대한 자기정의를 내려보고 나름의 방식으로 기념화’해보기 위해서다. 강보라 선생님은 “어떤 대단한 실패담을 늘어놓아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게 된다는 이들도 있지만, 역으로 그런 부담을 내려놓으면 자기 삶에서 ‘실패’라고 부른 순간들은 무엇인지, 또 만약 그게 딱히 없다면 왜 그런지, 자기의 언어로 실패를 번역해본다면 어떻게 될 지 등을 고민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렇게 실패는 두려움의 대상이나 피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것 중 하나가 된다. 실패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실패해봐야 한다. 그것이 실패인지 아닌지, 전체 속에서 어디가 실패인지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실패들에 울고 웃으며 실패에 축하의 자리를 내어준다

이처럼 교과과정 안팎으로 작업과 삶의 관계를 잘 형성시키고자 하는 움직임들도 항상 존재했다. 작업을 하는 도중에 이 경험들을 떠올리는 게 많은 도움이 됐다. 앞선 경험들이 쌓였을 때, 공통의 믿음과 경험을 옆에 있는 이들과 공유하게 된다. 이 시간이 실패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게 하고, 작업과 내가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제 또 어떤 시도를 만들어볼 수 있을까.

글 안소정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다큐멘터리를 공부하고 만듭니다. 더 나은 실패를 하고자 합니다. 몸, 취약성, 접촉에 관심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