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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윤

영원히 모를 뻔했던 세상에 대하여 : 시카고에서 보낸 한 학기

여행이 된 일상

시간의 상대성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쏜살같이 사라지는 주말을 지나 맞이한 월요일이 24시간 내내 알알이 느껴지는 것처럼,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금방인 반나절이 국제선 비행기에서는 영원과도 같은 것처럼. 길고 긴 비행으로 시작과 끝을 알렸던 미국에서의 2024년 상반기는 눈길 닿는 모든 곳이 새로움으로 가득했다. 마치 맨발로 흙을 디디며 걷는 것처럼 오감이 모두 낯설고, 동시에 시원하고 재밌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한국에서 내 손으로 싸 온 짐들조차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던 입국 초반의 일주일은 한 달처럼 길게 느껴졌지만, 어느덧 자연스러워진 미국 생활은 그저 한국과 14시간의 시차가 있을 뿐, 같은 속도로 자전했다. 떠나기 싫은 아쉬움에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으면 하고 바랄 때마다 야속하게도 밤은 금세 찾아오곤 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는 학기와 여행이 모두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터라, 나조차도 내 지난 시간을 적절하게 결론 내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 모든 일이 정말 어제처럼 생생할 때 쓰는 글에는 그 나름의 활기가 있을 거라고 믿으며 글쓰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출국장에 들어가며 아빠와 나눈 포옹, 시카고 오헤어 공항의 자동문이 열릴 때 온몸으로 받아냈던 강렬하고 알싸한 겨울바람, 강의실 창문에서 역광으로 비치던 햇살, 룸메이트가 쓰던 바디로션 냄새까지 특별했던 한 학기의 모든 것들은 여전히 빛을 지닌 채로 잔상처럼 맴돌고 있다.

나라를 넘어서기

한예종과 파견교에서 모두 합격 통보를 받은 이후, 준비 과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아무래도 비자일 것이다. 특히 입국 수속이 까다로운 미국 파견 교환학생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비자는 처음 그 나라에 도착했을 때, 내가 믿음직한 사람임을 증빙할 수 있는 출입증과 같은 역할을 한다. 교환학생들이 받는 문화교류 비자인 J1은 보증의 주체가 확실하고 기간이 짧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게 받을 수 있는 편이지만, 절차가 복잡한 와중에 해야하는 일이 몰아치는 건 매한가지다. 나는 교환교에서 비자 신청에 필요한 DS-2019라는 서류를 받고, 이후 온라인으로 비자와 인터뷰를 신청한 뒤 최종적으로는 미국 대사관으로 가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대기 의자도 없는 곳에서 한참을 줄 서서 기다린 인터뷰는 네댓 가지의 기본적인 질의응답 후 끝났고, 대사관은 내 여권을 가져가 1~2주 후 여권 안쪽에 스티커처럼 비자를 붙여 돌려주었다. 이 작은 종이를 위해 거친 난관들을 생각하면 결말은 다소 허망하게도 느껴진다. 비자 인터뷰가 끝난 날 미국대사관이 있는 광화문 근처에서 친구와 순두부찌개를 뚝배기 바닥까지 박박 긁어 먹고, 불법체류 안 할 거라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인터뷰 통과를 자축했다.

비자 준비 과정과 비슷한 시기에 요구되는 의료 정보 작성도 골치 아팠다. 나는 파견교가 제시한 양식을 채우면서 내 접종 기록에 신생아 때 맞은 홍역 1차 예방접종 날짜가 누락됐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걸 찾기 위해 현재 관할 보건소와 어릴 적 살던 동네의 보건소에까지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내 예방접종 내역에는 1차를 맞아야만 맞을 수 있는 2차 접종 기록과 날짜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학교에서는 1차 접종 기록을 알아야겠다고 했다. 일 년도 채 안 되게 나가 있을 건데 파상풍 주사를 맞고, 보건소에 전화를 걸고, 접종 증명서를 자꾸 갱신하다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 준비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국가’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고 거대하다는 것이었다. 한평생 모르고도 잘만 살았던 홍역 1차 접종 날짜를 외국에 고작 4개월 남짓 머물기 위해서 찾아내야 한다니. 내가 살아온 시간 모두를 문서화하여 내가 그저 ‘무해한’ 학생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일은 꽤나 피로했다. 국가가 제공하는 울타리의 무게감, 그리고 국적에 대한 정체성을 통감했던 과정이었다.

모국어를 넘어서기

영어 과외, 수능 영어, 회화학원, 토플 시험까지 나름대로 영어에 대한 이런저런 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했지만, 영어만으로 삶을 영위하는 일은 역시 어려웠다. 다른 언어를 추가로 공부하지 않아도 파견이 가능한 영어권 학교를 지망했음에도 그랬다. 아주 간단한 단어도 생각나지 않을 때는 머리를 부여잡고 문장 대신 탄식을 뱉었고, 기껏 떠올린 말을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을 때는 다시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은 적도 많았다. 파견 직후 나의 학교 계정에 문제가 생겨 음악 건물에 있는 담당자 선생님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내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훨씬 오랜 시간 주저해야만 했다. 선생님은 내가 입국한 지 5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하며 온갖 행정 절차에 숨 막혀가던 나를 격려해 주셨었는데, 교환학생 초반의 기억임에도 그 시절의 아득함과 무력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업을 따라가는 것은 점점 수월해졌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수님이 하는 모든 말을 100%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나를 매번 고난에서 구해준 것은 ‘Canvas’라는 플랫폼이었다. 한예종에서 사용하는 블랙보드와 흡사한 시스템으로서, 강의계획서, 과제, 시험, 교수님의 메시지 등 수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쪽지 시험이나 과제 제출까지 전부 처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덕분에 나를 비롯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이 (물론 영어권 학생들에게도) 수업을 원활히 따라가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코로나19 이후에 Canvas를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됐다고 하니, 나름대로 코로나19가 남긴 긍정적인 유산인 셈이다. 그렇게 파견교의 시스템과 교수님들의 말투에 제법 익숙해질 때쯤, 발음하기 다소 어렵다는 받침 많은 내 이름 역시 명쾌하게 불리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전공을 넘어서기

한예종의 음악원은 주로 클래식과 현대음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니, 내가 개인적으로 팝 음악이나 재즈에 관심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그런 장르들을 학교에서 수업의 형태로 경험해 본 적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파견교였던 Columbia College Chicago(이하 CCC)는 팝과 재즈 음악을 중점으로 하는 학교였고, 내가 신청한 수업들은 모두 클래식 음악을 다루지 않는 강의들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Songwriting I〉 수업은 작사에 관한 것이었는데, 물론 가사를 발표하는 데에 있어 작곡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가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심지어 그것을 영어로 써내는 과정은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가 한국어로 글을 쓸 때 어미 하나 쉼표 하나의 차이를 민감하게 느끼는 것처럼 영어 역시 그럴 텐데, 그 정도의 예민함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외국인이기에 쓸 수 있는 묘사가 있지 않을까 하고 과하게 주눅 들지는 않으려 했다. 사고 체계를 관장하는 언어가 다른 덕분에 생각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건너뛰고 문장 전체가 영감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심지어 이 수업은 세 번의 리사이틀 겸 발표 시간에 내가 작사하고 작곡한 곡을 직접 노래하고 공연해야만 했는데, 글이나 악보를 제출할 뿐 한 번도 스스로 작품의 퍼포머가 돼 본 적 없던 내게는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끝내고 난 뒤의 성취감 역시 겪어본 적 없는 형태의 감정이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CCC의 특징은 엄청난 양의 행사와 이벤트가 수시로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학생 연합과 동아리 등에서 거의 매일 이벤트가 열렸고, 흥미로운 행사가 동시간대에 있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가장 큰 행사는 역시 봄 학기가 종강하면 열리는 학교 축제 ‘Manifest’였는데, 나 또한 〈Jazz/Pop Choir〉 수업 덕분에 잠깐이나마 Manifest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Songwriting I〉 리사이틀이나 〈Jazz/Pop Choir〉 Manifest 공연과 같이 플레이어로서의 나를 보여주는 경험은 결과물의 형태가 ‘글’로 남는 음악학 전공인 내가 한예종에서는 거의 하지 않았던 종류의 것이었던 데다가, 그런 자신을 보여주는 데 별로 거리낌이 없는 문화적 배경이 더해져 남다른 감상으로 다가왔다.

©오서윤

나를 넘어서기

나는 원래부터 해가 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이라, 종강이 다가올수록 공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도시를 돌아다니곤 했다. CCC는 한예종 음악원이 위치한 서초캠퍼스처럼 도시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특정한 구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카고 다운타운을 이르는 루프(Loop) 내에 건물이 여기저기 퍼져 있는 시티 캠퍼스의 형태였다. 덕분에 걸어서도 충분히 시카고의 중심지를 둘러볼 수 있었고, 학교와 제휴하여 학생 할인이 적용되는 교통카드인 벤트라(Ventra) 카드를 이용해 루프 바깥 또한 자유롭게 나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관광지들이 모여 있는 도심, 즉 루프와 리버 노스는 내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도로 이름이나 위치를 가늠하는 것이 점차 능숙해지고 구글 지도 없이도 도시 이곳저곳을 잘 다닐 수 있게 됐을 때에는 이제껏 해왔던 일주일 남짓한 해외여행과는 달리, 내가 잠시나마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이 지구상에 내가 태어난 곳이나 사는 곳 말고도 잘 아는 도시가 하나 더 생겼다는 기분이 왜인지 나를 들뜨게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영화 〈다크 나이트〉를 봤는데, 영화 속 배경인 고담시의 전경을 비추는 씬을 보고 ‘저거 시카고네!’하고 단번에 알아보았던 것도 같은 맥락의 즐거움이었다. 또한 나는 바다와 같은 물가를 좋아하는데, 시카고에는 강, 미시간호, 그리고 바다처럼 큰 크기의 호수를 이용한 해변까지 있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소금기 없는 해변에서는 발을 담그다 와도 금방 마르고 끈적거리지도 않아서, ‘Unsalted Beach’라는 모순적인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으니, 적극적으로 다양한 친구들과 잘 지내보자고 마음먹었지만 그다지 살가운 성격이 못 되는 나에게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아는 얼굴도 그냥 스쳐 지날 때면 인사조차도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 것이 답답했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나만 같이 지내는 친구가 없는 것 같아 조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천히 환경에 섞여가면서 나는 초반보다 자주 용기를 냈다. 생활이 편해지며 다소 긴장이 풀린 것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CCC도 우리 학교처럼 별로 규모가 크지 않아 학생들이 많이 겹쳤다. 다섯 개 수업 중 세 개나 같이 듣는 친구도 있었고, 음악 전공생들이 주로 쓰는 1014 건물과 Sherwood 건물을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낯익은 학생들을 자주 마주치기도 했다. 빨간 원에 검은 별이 그려진 Road Runner 로고의 기타 케이스를 메는 애들만 한 트럭이었지만 뒷모습만 봐도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있었다. 같이 간 교환학생 친구와 4월 중순에 라틴계 학생 연합에서 주최한 브라질 카니발 테마의 행사 ‘Carnaval do Brasil’에 갔었다. 우리는 고개를 돌릴 때마다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했는데, 그때 친구가 “다 아는 얼굴들이구먼.” 하던 게 기쁘고 웃겼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여기 온 지 한 학기도 안 지났는데!

영원히 모를 뻔했던 세상에 대하여

2월 중순, CCC에서 같이 봄 학기를 보내는 여러 나라에서 온 교환학생들과 같이 학교에서 하는 〈햄릿〉 연극을 보러 갔었다. 3시간짜리 연극 내내 배우들은 화를 내거나 빠른 속도로 말했고, 줄거리도 많이 각색된 데다 심지어 영어도 현대 영어와 달라서 정말로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고 있으니, 공연 자체보다는 ‘내’가 여기 앉아서 공연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졌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간에 다른 예술대학 학생들이 이런 공연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겠지?’ 싶었다. 심지어 언어와 국가조차 다르니까. 나는 멀티버스 영화처럼 어쩌면 평생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모를 뻔했던 세상을 열고 그 속에 참여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교환학생이었기에 성적보다는 경험을 중시하며 한 학기를 보낼 수 있었고, 언어에서 오는 문제를 제외하고는 스트레스를 최소한으로 받을 수 있었다. 매 순간 새로운 경험과 적은 학업 부담이 아주 꿈만 같아서, 당연스런 고난을 모두 제외한 이 한 학기짜리 꿈에서 깨어나 졸업 논문이 기다리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졌다. 종강 무렵에야 비로소 친구들과도 더 친해진 것 같았고, 출국 전 별의별 걱정에 잠 못 이루던 밤이 무색하게 도무지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아쉬움이 남아야 또 돌아가고 싶어진다는 여행의 법칙을 믿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가며 추가로 벌었던 14시간을 기나긴 한국행 비행기 속에서 이틀을 몽땅 보내는 것으로 되갚으면서. 나의 귀국이 다소 어영부영 이루어진 감이 있어서, 그곳에서 만나 나를 유영해 지나간 모든 인연들에게 이 지면을 빌려 인사를 전한다. 나의 어떤 하루와 같은 사건을 간직하고 있을, 내 생애 가장 낯설고 인상적인 그들을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글 오서윤
어느덧 졸업 논문만 남겨두고 있다. 요즘 꽂힌 ‘Unsalted’인 것들이 두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땅콩버터고 두 번째는 미시간호다.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나서 일기가 한 달이나 밀렸고, 왼쪽 다리에는 인생 가장 큰 멍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