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받은 ‘가족신문 만들기’라는 숙제가 인생의 과업으로 재탄생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이 가족(신문) 다큐멘터리가 범상치 않은 것은 화목함 속의 균열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처음은 정상가족이라는 단순한 도식 위에서 시작된다. 태초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고 그들이 결혼해서 쌍둥이가 태어난다. 그중 언니인 남아름 감독의 관점에서 이야기는 흘러간다. 거침없이 흔들리는 화면과 앳된 내레이션 목소리가 일부러 얼기설기한 만듦새를 강조하는 듯하지만, 잘 보존된 가족 아카이브가 충실히 편집되며 든든히 뒤를 받친다.
보관된 녹화 테이프 중 여덟 살 생일파티 때 애국가를 부르는 작은 소녀(감독)의 모습이 이야기의 실마리가 된다. 소녀는 애국자 부모들 밑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고위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대학 시절 운동권이었던 어머니의 결합은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의 충돌이었다. 여기서의 정치적 성향이란 선거 때 누가 누구를 찍었느냐에 대한 유치한 편 가름이 아니고, 애국을 실천하는 태도의 근본적인 성향 차이를 뜻한다.
기자를 꿈꾸었다가 고위공무원이 된 아버지의 옛 사진을 펼치며 비겁한 기회주의자라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하는 어머니와,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옛 포부를 밝히는 아버지의 발언이 나란히 편집되며 자연스럽게 충돌한다. “나는 그 중간에서 서서 엄마와 아빠 그 누구 편에 서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등산 중 갈림길이 나왔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며 갈라지는 장면은 감독이 평소 가정에서 느껴왔을 혼란을 함축한다. ‘나’는 일단 어머니의 뒤를 따른다. “엄마를 통해 본 세상에서 아빠의 세계는 뭔가 잘못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호주제 폐지 운동과 3.8 한국여성대회에 빠짐없이 참가했던 그에게 거리의 투쟁 현장은 익숙한 배움터였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거리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외부적인 요인들이 생겨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감독은 재수학원에 있었고,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사람들과의 대화에 좀처럼 끼질 못한다.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다가 시위가 벌어지던 광화문역 근처에서 끝내 하차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며 거리 집회에 열렬히 참여하던 어린 시절의 모습과 대비된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서서히 감독의 아버지를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감독은 보관용 서랍에서 재수학원 시절 아버지에게 보냈던 편지를, 그러나 답장을 받지 못했던 편지를 발견한다. 세월호 참사 당일 사후 수습팀으로 발령된 아버지를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는 내용이 담긴 편지다. 누구도 어버이날에 이런 편지를 받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할 것이다. “얼마 전, 아빠가 지키고 싶던 이 나라의 청소년들이 한순간에 없어졌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 과거의 편지를 들고 세종 청사로 찾아가지만, 인터뷰에 호의적이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어떤 기억도 캐묻지 못하고 허탈하게 돌아온다. 이제라도 과거의 편지에 답장을 받으려던 영화의 시도는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답장받기를 잠시 유보했을 때 세상은 미투라는 소용돌이로 요동친다. 세월호 참사와 대통령 탄핵 다음으로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찾아온 세 번째 커다란 변화였다. “이번 변화에는 무임승차하고 싶지 않았”던 감독은 어머니와 또다시 거리 투쟁에 참여하고, 학내에서도 방송영상과의 성평등위원회를 조직하여 책자를 배포한다. 비슷한 시기 같은 학과 H교수의 성폭력 사건이 터졌을 땐 동기들과 함께 학교 전체를 거리 투쟁의 장소로 바꿔버리기도 했다. 더 이상 감독은 자의 반 타의 반 어머니를 따라 다녔던 어린 시절의 멋모르는 소녀가 아닌 듯했다. 28년간 여성긴급전화 1366에서 성폭력 상담원으로 일했던 어머니의 출근길을 따라가며, 그의 가슴에 묻어둔 실패담을 듣는 모습은 좀 더 대등한 시선으로 어머니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감독의 성장을 보여준다. 현재 시점에서 어머니의 은퇴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처음 상담원의 길로 들어서던 때 어머니의 옛 아카이브 또한 병렬적으로 편집된다. 감독은 그가 인생의 길잡이였다고 회고하며 어머니를 따라 올라간 갈림길의 이야기를 접는다.
이상한 점은 영화에서 아카이브로 다루는 영상들이 하나도 빛바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족의 역사가 담긴 캠코더 영상 중 아무리 오래된 것을 가져와도 먼 과거의 영상처럼 보이기보다는 특수효과를 가미한 현재의 영상처럼 보인다. 혼자만의 착각인 걸까. 영화의 독특한 가치관에 따른 편집 방식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룬 세 가지 큰 사건은 세월호 참사,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미투 운동이다. 이들은 모두 아직 완전히 소화되지도 않고 소화될 수도 없는 현재진행형의 현대사다. 게다가 이 사건들은 감독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다뤄진다. 애초에 감독은 이 사건들과 거리감을 형성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시작 지점을 떠올려 보면, 감독이 태어난 사건과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대한 심판이 시작된 사건이 대등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독의 생일이 대통령 선거일과 동일한 점에 착안하여 민주주의의 축제일인 선거일과 가족의 축제일인 쌍둥이의 생일 파티가 동급의 사건으로 편집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일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사실이 적혀 있고 ‘꿈은 이루어진다’는 구절이 보인다. 같은 해 월드컵 관중석에서는 소녀의 일기장에서 보인 구절이 카드섹션 응원으로 실행된다.
가족 아카이브와 뉴스 아카이브가 동일한 시간대에 펼쳐지자, 사적 역사와 공적 역사의 차이가 무색해진다. 부모님의 결혼식 테이프에서 와인잔을 부딪치는 순간에 “한국 정치사에도 축배를 들일이 있었다”라는 내레이션이 흐르며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뉴스 아카이브가 끼어들고, 뉴스 내레이션 바로 다음에는 아버지의 내레이션이 마치 현대사 강의처럼 이어진다. 편집과 내레이션이 모든 사건의 대등한 연결을 지향한다. 다큐멘터리 편집에도 민주주의가 있다면, 가족사와 국가사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등한 편집 방식을 취한다고 평평한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답장을 받지 못한 편지에 대한 미련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며 주름을 만든다. 공무원으로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않는다며 속 깊은 인터뷰를 피해 온 아버지는 감독에게 마지막까지 어떤 답장을 들려줄 수 있을까. 정부를 위해 일하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세월호 이후 감독이 거리로 나서는 것을 주저하게 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감독은 그런 아버지와 어떻게든 나름대로의 담판을 짓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 아빠, ‘세월호를 기억하자’, 이것도 정치적이에요?”라는 질문에 대답을 피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세월호 9주기 기억식에서 다시금 발견된다. 허락 없이 찍힌 뒷모습은 감독이 어떻게든 담아내고 싶었던 386세대의 변화일 것이다.
“아빠는 공무원이 되었고, 엄마는 제도, 관행과 싸우는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되었다.” 어쩌면 시놉시스에서 본 이 한 줄이 고성과 쌍방 폭행이 난무하는 자극적인 갈등을 기대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90분이란 러닝 타임 내내 가족이 해체될 만큼의 갈등이 그려진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정치 성향이 어떻게 사랑으로 극복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설득이 필요하지만,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가족 안에 이토록 불가사의한 모순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인상 깊은 성장 서사를 스스로 드러낸 애국소녀의 다음 항로는 어디일지, 그의 애국이 앞으로는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지 모두 끝까지 지켜보자.
글 김주은
이토록 대단한 사람들. 부러움과 질투의 힘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