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으면, 나는 (다음) 글을 쓸 수 없다.
우리는 돈을 늦게 받았고, 덜 받았고, 못 받았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은 채로 남겨졌다.
우리는 모여서 그르렁대며 분노했다.
많은 수를 고려했다.
인터넷에 글을 쓰고, 대자보를 붙이고, 그들을 고발하고,
서로 토로하고, 우리를 보호해준다는 곳에 신고하고,
그리고 사실 연필을 내려놓을 수도 있었다.
그래, 우리는 카메라 렌즈 뚜껑을 닫고, 무대 위에서 내려오고,
바삐 움직이던 팔을 내리고, 만들어낼 것을 치워버리고,
모든 종류의 편집기를 영원히 종료시킬 수도 있었다.
붓을 꺾고 싶어질 때, 우리는 붓을 꺾을 수 있다.
때로는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기도 하는 우리다.
나는 미술 비평, 영화 비평을 비롯해 이런저런 글을 쓴다. 글쓰기를 좋아한다. 글 한 편을 쓰면 그 과정에서 남는 것이 있다. 전부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다. 새롭게 배운 무언가, 즐거움, 사유의 연습, 까다로운 고민을 힘겹게 이어가는 고통…… 기본적으로 내가 그런 것들 때문에 글을 쓰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마냥 그렇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주로 글쓰기에서 내가 바랐던 모든 것이 충족된 이후에 있다. 바로 그때, 희미하고도 당연하게 구석에 치워두었던 나의 희망이 선명해진다. 열정과 의욕 그리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1을 통해 이어온 작업의 끝에서, 내가 기대했는지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던 수수한 합리성을 배신하는 보수와 임금 문제를 겪고 나면 말이다. 열심이었던 일에 의욕이 꺾이고, 좋았던 일에 회의감이 끼얹어진다. 그제서야 나는 깨닫는다. 우리는 즐겁고도 힘겹게 무언가를 만들었을 때, 응당한 대우와 정당한 대가를 바란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아주 미세하기부터 전면적이기까지, 근근이 깨지기를 이어 간다. 그런데 부서진 조각들 사이에서 끈적한 고민이 베어 나온다.
오해를 무릅쓰고 미련해 보이는 나의 마음을 털어놓는 이유가 있다. 이 글을 매개로 혼자서 탈출할 바 없는 굴레에 갇혀 지속되던 고민에 사유의 기회를 주고 싶어서다. 그리고 비슷한 마음을 가졌을 사람들과 이에 대해 나누고 싶어서다. 그러니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다
1
합리적인 판단이란 상황마다 다르다. ‘이 작업은 돈은 받지 않고 해도
괜찮아.’, ‘그래도 돈은 벌 수 있으니까.’, ‘이 정도 받는 거면
괜찮지.’, ‘보수가 정말 좋네.’ 등등… 물론 그 합리성이란 가장 소박한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울며 겨자 먹는 식의 ‘합리성’인 경우가 많다.
돈을 위해서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한 순간, 나의 마음은 여기저기를 빠르게 왔다 갔다 한다. 고료가 적더라도, 줄었더라도 글의 질은 떨어뜨리고 싶지 않다.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지만 계속하고 싶다, 즐거우니까. 그래, 글쓰기는 재밌다, 하고 싶다, 힘들다, 까다롭다, 배우는 게 많다, 괜찮은 경험이 된다, 좋다. 어쨌든 돈도 벌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이유로든 적당히 감내한다는 태도가 결국 임금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아닐까? 나의 열정으로 그들의 착취를 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줄어든 고료에 맞게 앞으로는 글에 들이는 힘과 시간을 줄여야 할까? 창작의 마침표를 입금받는 고료의 액수를 확인하는 순간에 찍어야 하나? 그렇다면 얼마를 받는 몇 매짜리 원고에 어느 정도의 공력을 들여야 하는 걸까? 과연 금액에 따라 나의 글쓰기를 분절해 낼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여기에 그렇다, 그래야 한다고 쉬이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나의 예술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응당 필요하지만, 그 ‘정당함’의 기준을 잘못 설정하다간 시장이 지배하지 못하는 것들을 시장에 욱여넣고, 화폐로 측정될 수 없는 것들을 화폐의 교환 논리에 밀어 넣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목욕물을 버린다고 아이까지 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착취와 빈곤과 부당함을 피해 가면서도, 자본의 계산법을 거부할 수 있을까?
결국 가장 강경하고 자명해 보이는 선택이 필요할까. ‘돈을 안 주면 안 써.’, ‘이런 취급을 한다면 그냥 파업할 테야.’라는 투쟁의 태도. 내가 생각하는 정당한 대우에 미치지 못한다면 임하지 않는 것. 누군가가 나의 글(쓰기)을 ‘상품’이나 ‘노동’으로 인정하고, 그에 맞는 돈을 지불해줄 때까지 유급 글쓰기를 멈추는 것.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글을 계속 쓰고 싶고 싣고 싶으니까. 그렇다고 가만히 글을 쓰면 바뀌는 것이 없지 않을까……
탈출구 없는 고리에 갇힌 고민은 계속되고, 아무것도 결단하지 못하는 사이 나는 우물쭈물하며 ‘그냥 해오던 대로’ 글을 또 써낸다. 그리고 세상은 여전히 ‘그냥 해오던 대로’ 나의 글을 대한다. 고민의 굴레 속에서 결정은 유예되고, 결국 ‘이것만으로도 경력과 경험이 되니까 감안하고 계속해야 하는 을의 처지’가 가장 적절해 보이는 유예의 명분이 된다. 그러나 빠르게 오가던 마음을 붙잡아 문장으로 만들다 보니 이 사태가 내게 불러일으킨 뭔가 더 근본적인 의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끝없이 순환하는 고민의 고리 속에서 오랫동안 물고 늘어진 적 없는 질문. 그러니까, 나는 왜 계속해서 글을 쓰는가? 이런 일(들)을 겪고도? 나는 나를 의심하다가, 방향을 돌려 우리를 의심하게 만드는 쪽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왜 붓을 꺾지 않을까?
꺾지 않은, 혹은 꺾지 못한 우리의 붓질에는 순응과 타협만이 묻어 있을까? 내가 받는 돈이 얼마든지 신경 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만큼 임하면 어떻게 될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건 도발적인 자유로움인가, 부당한 예외 상태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무감함인가, 굴종인가, 순응인가, 순진함인가. 반항적이면서 미련한 모순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발견해야 할까. 하고 싶으면서도 이대로 할 수는 없는, 그렇지만 끝내 그만두지도 않는 우리의 고민은 어떤 사유를 추동해 낼까?
“예술노동이라는 의제는 예술을 노동으로 간주하자는 1차원적인 주장이 아니다.”2 제대로 된 임금을 지불받는 것이 중요한 만큼이나, 무엇이 노동인지를 분류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책정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세간의 기준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민은 예술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 노동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노동이며 그것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느냐를 평가하는 체계를 향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노동과 휴식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서로 대립한다는 발상은 자본주의하에서 생겨났다. 현재의 ‘노동’은 자본의 가치를 증식시키는 것을 대가로 ‘임금’을 획득하게 되는 구조 속에서 정의된다. 이 안에서 ‘휴식’은 다시금 힘든 노동을 재개하기 위한 준비 시간으로 마련된다. 우리는 긴 노동과 짧은 휴식, 중요한 생산과 그를 위한 재생산을 오간다. 그러나 이런 ‘노동’과 ‘휴식’은 어떤 것들을 끌어안지 못한다. 아니, 애당초 이런 이분법은 모든 것을 끌어안기 위해 고안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예술을 비롯한 많은 것들은 위 범주에 억지로 끼워 넣어지기는 할지언정 제대로 포함되지 못했다. 예술은 값으로 정량화되지 않고, 단일한 ‘가치’와 ‘무가치’의 분류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을 생산하는 재료와 방식이 정해져 있는가? 물질과 비물질과 의도와 목적과 인생과 인간과 생각과 실수와 실패와 무의미와 소위 ‘예술가’가 아닌 존재들이 창작 과정에 개입한다. 또, 예술을 향유하는 방법이 정해져 있는가? 향유는 오독과 정독과 거부와 수용과 파괴와 재창조를 수반한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가 명확치 않다. 그래서 예술은 무언가를 하긴 하지만, 자본을 늘리는 노동도 아니고 소비를 하는 휴식도 아닌 게 되곤 한다. 출근이 없고, 퇴근이 없고, (공)휴일이 없고, 근로일이 없고, 그래서 근속도 파업도 흐릿하다. 예술의 과정3은 대부분 GDP 수치로 인식되지 않는다.
2
오경미, 「예술노동 논쟁 재고찰: 철학적 개념 논쟁을 넘어 넘어
현장으로」,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36』(2018), 35p.
3
여기서 ‘예술의 과정’이란 예술 생산과 향유 양 측면을 포괄한다.
부wealth는 값price과 다르기 때문이다. 부란 세상에서 모든 것들이 살아가고 상호작용하는 데에 필요한 풍요를 이른다. 따라서 부는 지식, 예술, 문화, 자연, 감정적 교류와 관계, 상호부조와 상호호혜 등 넓은 범주의 가치들을 포괄한다. 즉, 부는 돈으로 표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돈으로 환전되지 않는 것들을 통해 풍요로워진다. 가령, 사회와 “인간의 삶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서로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가장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들도 동료 인간들의 돌봄과 지원을 통해서만 개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경제’는 궁극적으로 그런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보급을 제공하는 방식일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가치들’(숫자로 환원할 수 없기 때문에 귀중해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통적인 상호 창조와 돌봄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4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서로를 피워내는 “사회의 ‘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으로 변질”5되어 버린다. 그리고 억지로 상품이 되어버린 부는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 평가하는 화폐를 매개로 시장에서 거래된다. 마찬가지로, 부를 창출하는 모든 일을 포괄하는 노동은 잉여가치를 창출해 자본을 늘려나갈 때만 불완전하게 인정받게 된다. 이제 우리는 “가치의 영역이 (중략) 체계적으로 가치들의 영역을 침범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예술이 만들어내는 부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다.
내가 발견하고 싶은 예술의 ‘노동’은 자본의 가치를 줄여나가는 것7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가치를 줄이는 것 자체가 부이며 가치들 중의 하나다. 예술인 소득 수준의 양극화에서 알 수 있듯, 어떤 예술(가)은 거대자본과 동료가 되어 화려하게 살아남거나 부활하곤 하지만, 많은 예술(가)들은 자본과 협력하지 않고 근근이 이어진다. 예술이 돈벌이가 되지 않고 세상이 우리에게 이상하고 부당하게 군다는 걸 알면서도, 미련하고 당돌하게. 그럼에도, 이 미련함은 쉬이 착취당하는 순진함으로 그대로 등치되지 않는다. 이들이 지속하기를 택하는 다양한 이유 중에는 경제적 가치보다 자신이 창출해 내는 비경제적 가치들과 부의 의미를 믿기 때문이라는 점이 있어서다. 이 선택 자체가,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규정하는 ‘노동’과 ‘가치’의 범위를 거부하고 의심하는 씨앗을 품고 있다. 이들은 자명한 것 같은 자본의 가치를 신뢰할 수 없게 하고, 요동치게 하고, 무화시키곤 한다. 대신, 시장 논리로부터 자유롭기를, 자본을 조롱하고 무시하기를 택하는 부를 생산한다.
4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 김병화 옮김, 민음사(2021), 433p.
5
사이토 고헤이,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정성진 옮김,
아르떼(2023), 28p.
6
4번과 같은 책, 433쪽. 강조는 인용자.
7
이 표현은 지난 5월 나눈 S와의 대화에서 얻은 것이다. S에게 감사를
표한다.
우리는 울면서도 예술을 하면서, “사용자를 강자로 보고 근로자를 약자로 보는 현실 인식”8에서 출범한 노동법, ‘자본의 가치를 늘리는 정도’와 ‘희소성’을 기준으로 노동과 상품을 다뤄온 소위 ‘자유 시장 경제’, “네가 좋아서 택한 일이니까 가난도 감내해.”라고 말하는 세간에 물음표를 던진다. 빈곤이 당연해진 예술계가 이상하고, 예술에서는 가난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이상하고, 요지경 속에서 예술을 지속하는 나도 이상하다는 물음표 말이다. 이 의심은 큰 힘과 부를 갖고 있다. 슬프게도, 다른 가치들과 부에 대한 발견으로 이뤄지는 힘을 갖고 있는 이 물음표는 착취와 폭압 앞에서 가장 선명해진다.9
리베카 솔닛은 사랑하는 사람과 일상을 파괴하는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행한 연대와 상호부조에 주목해 『이 폐허를 응시하라』(2012, 펜타그램)를 썼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재난은 기본적으로 끔찍하고 비극적이고 슬픈 일이며, 제아무리 긍정적인 효과와 가능성이 부수적으로 나타난다 해도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 이유, 즉 재난 속에서 생겨났다는 이유로 그런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솔닛을 빌리자면,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위 문장들 속 “재난”에 예술계의 착취나 빈곤을 대입해도 될 것 같다. 재난 속에서 서로를 돕는 이웃 간의 놀라운 연대에 주목하는 것이 곧 재난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 것처럼, 자본의 가치를 의심하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해 보자는 말은,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돈을 벌려고 하면 쓰겠냐’는 식의 핀잔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계가 던진 물음표가 폭발하며 시작된, 예술인기본소득 보장과 예술인복지법 제정 등의 요구, 예술 또한 노동일 수 있음을 말해온 시민 운동 또한 기존 노동의 외연을 확장해 가치가 아닌 부를 만드는 노동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제아무리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속에서 생겨났다고 해도 우리의 물음표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건 의심하고 질문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결국 ‘우리는 어떻게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은 ‘왜 우리는 계속하지?’라는 고민과 함께한다. 우리 안에서 피어나는 의심은 “예술가 아닌 노동자인가 혹은 노동자 아닌 예술가인가라는 선택적 규정에 빠지지 않고, 예술가이면서도 노동자라는 이율배반을 밝히는 것”일 가능성을 품는다.10 우리는 “착취당할 권리를 주장하는 패배적인 노동자”11가 되려는 것도 아니요, 예술은 노동과 결코 겹쳐질 수 없는 영역이라며 고고하게 구는 것도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볼 때,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되 오롯이 착취당하는 피해자로만 정체화하지도 말았으면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좀 더 잘 알아볼 수 있다. 예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다른 ‘우리’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많다. 돌봄, 연대, 데모나 시위 행위, 시민 운동, 봉사, 상호부조… 우리는 또 다른 우리들과 함께하며 각자 던져왔던 물음표들을 모아서 힘을 실어볼empower 수 있다. 다른 이율배반적 (비)노동자들을 알아채고, 화폐로 통폐합될 수 없는 다양한 가치들을 발견하고 지키는 쪽으로 향해 갈 수 있도록.
프레드릭 제임슨은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 같은 자본주의가 착취하고 폭압 하는 모든 것은, 결국 자본주의를 의심케 하는 위험분자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종말시키려 하는 것들을 알아채고 관찰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결코 자본주의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는 이물질 같은 것들이 이어오는 질문과 의심 속에는 갈고 닦을 만한 풍요가 있다.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또 글을 썼다. 명쾌한 답을 내리지도, 멋있는 대안을
제공하지도 못한 부끄러운 글을 이어 썼다. 분명히 이 글을 가장 먼저
읽는 사람들 중 누군가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 나의 발칙하고
찌질한 글쓰기가, 너의 미련한 예술이, 우리의 멈추지 않는 “운동
전체”가, 그것이 지속되고 있는 것만으로 “다른 관계와 행동 방식을
기대하는 적극적인 파업”12이라고
믿어서.
8
정종희, 『중소사업장의 근로자와 사용자를 위한 단 한 권의 노동법』,
시대의창(2016), 4p. 노동법상 예술가 말고도 직업이 아닌 것들이 많이
있다. 도둑, 사기꾼, 사과나무, 시위자, 젖소, 산책자, 사상가,
엄마.
9
최인이, 「예술인의 노동자성 인식」, 『예술과 노동, 다시 보기』,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2021), 42~43p. 최인이는 영화인들이
영화산업노조를 결성한 과정을 심층 인터뷰로 연구했다. 그는 영화
스태프들이 기존에는 “예술가로서의 의식 속에 매몰되어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박탈당하면서도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자신들을 노동자로 규정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이었다”고 분석한다. 이렇듯 예술가의
임금과 복지 등 기본적 권리에 대한 각성은 심한 착취, 폭력, 빈곤
앞에서 일어나곤 하다.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이 사망한 후
예술계 구성원들이 모여 예술인기본소득과 예술인복지를 위한 제도를
폭발적으로 요구했던 것도 이와 유사하다.
10
서동진, 「예술가는 언제 파업하는가?」, 『한국예술연구』, 36,
(2022), 70p.
11
정강산, 「“노동 없는 지혜는 사기나 속임수로 변한다”고 되뇌는 한
예술가에게 부쳐」(2015), 이 글은 웹진 『집단오찬』에 2015년 3월
31일에 실린 글과 같다.
12
에바 폰 레데커, 『삶을 위한 혁명』, 임보라 옮김, 민음사(2024),
224p.
글 김선진
우리는 어떻게 부와 가치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낸 부를 인정하는가? 우리가 발견한 부에 보답하는가? 그 보답은
어떤 형태로 돌아오는 게 좋을까? 이 글 속에 담긴 믿음이 현실 앞에서
무용해지지 않기 바라며, 아직까지도 고민이 가득 남아 있다. 그래도
일단은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파업을 하고 싶은 예술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