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2023 AUTUMN47

사거리에 가면



그런데 시장약국은 시장에 있어서 시장약국인 건가
주의 말에 인이 손뼉을 친다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이내 둘은 웃음을 터뜨리고 시장약국 맞은편 맥도날드는 주와 인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고
나는 창 너머 시장약국의 초록 간판을 가만히


웃지 않는 내가 주와 인은 못마땅하고
주는 인의 아이스크림콘에 감자튀김을 푹 찍으며
사거리 버거 가게에서는 감자튀김을 밀크셰이크에 찍어 먹는대
그러자 인은 퉁명스레
그건 우리 건데


인은 우리의 특별함에 주목한다
가령 한 남자를 셋이 돌려 사귀었던 것 비밀만으로 밤을 새울 수 있는 것 우리만의 흉터
정말 즐겁지 않았니,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장약국에 대해 생각한다
수천 번을 지나치면서도 시장에 있어서 시장약국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고
당연하게도 들어가 약을 사본 적도 없고
다만 맞은편 맥도날드에 앉아 흘깃거린 기억 밖에는
결국 시장약국이 시장약국인 이유를 십 년 만의 이사를 하루 앞두고서야 알게 된 것이다


주와 인은 자꾸만 내가 못마땅하고
기어이 떠날 수 있는 사람이야 남겨지는 사람의 마음 따위 무슨 상관이겠어
혼잣말하듯 나를 비난하고
나는 따지고 싶다
진짜 혼잣말을 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혼잣말의 의미를 생각해봐 시장약국을 고찰했듯


감자튀김을 먹으면
소금 알갱이에 놀란 혀는 굳어버리고
사거리에 영화관이 들어선대
제2의 시내를 만들 생각인 거야
아파트 단지도 곧 완공되겠지
즐겁게 미래를 상상하던 주와 인
그러다 불쑥
누군가 울음을 터뜨리면


이제 다시는 우연히 마주치지 못하는 거야
스무 걸음이 아니라 수만 걸음을 걸어야 너희 집인 거야
몰래 즐기던 새벽도 공원 석상 험담도 오일장 도둑질도
이 맥도날드도 다 끝장이라고


인은 아이스크림이 묻은 손에 얼굴을 묻고
주는 인의 어깨를 감싸며 나를 노려보고
나는 창 너머 시장약국 간판을 애써 외면하며


미안해
십 년 만의 이사를 하루 앞두고 중얼거리다 문득
정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


떠나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의 마음도
세상에는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상자



어제는 관을 만들었다
원래는 작은 보석함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마음껏 재료를 써도 좋다는 공방 주인의 말에
허겁지겁 목재를 욕심낸 탓이었다


공방 주인은 내가 만든 커다란 보석함을 보며
정말 마음껏 쓰셨군요
이 정도면 작은 강아지도 넣을 수 있겠어요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순 엉터리시네요
작은 강아지가 아니라 허스키예요
허스키는 아주 큰 개라 한때만 작을 뿐 결국은 크게 되어있다고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관은 이제 내 침대 위에 있다


덜컥 자라버린 관에 무엇을 넣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봄의 오동나무 성장기 청소년 퍼지는 물 번지는 소문 끝없는 황야 그 위를 달리는 총알
쏟아 넣고 뚜껑을 닫는다
언젠가는 관을 뚫고 나올 것이다


그렇지만 자라지 못한 개가 있어


오래전
수의사는 허스키가 무언가 잘못 삼켰다고 말했다
큰개가그런걸로죽을수가있나요이애는아주커다란개가될텐데요다만잠시작을뿐인데요


작은 죽은 개는 파란 바구니에 담겼다
뚜껑이 없어 죽은 몸이 훤히 보였다
빳빳한 털과 감긴 눈 초파리의 춤
달랑달랑 바구니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 개를 묻고
개의 이름을 잊었다


이름을 기억했다면 따질 수 있었을까
작은 강아지가 아니라 허스키예요


자라지 못한 것들을 관에 눕힌다
영원히 함께 자랄 줄 알았던 것들


뚜껑을 잘 닫아주고 싶었어


산의 사계절을 상상한다
내려오는 길 몇 번이나 고꾸라졌던





추천사

뚜껑을 잘 닫아주고 싶은 마음

우리 안에는 덜 자란 아이가 산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사회적 자아라는 기둥 뒤에 덜 자란 아이를 숨겨두고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일세라 단속하기 바쁘다. 하지만 몸의 성장 속도와 마음의 성장 속도가 늘 비례하는 것은 아니어서, 불현듯 회오리가 일어, 내 안의 아이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올 때가 있다. ‘어…… 그, 그래, 안녕, 잘 지냈니.’ 정면의 아이를 보며 멋쩍게 인사를 건네게 되는 순간이.

조은솔의 시는 바로 그 일을 한다. 그의 시는 힘들이지 않고 우리 안의 아이를 깨운다. “마음껏 재료를 써도 좋다는 공방 주인의 말에” 보석함을 만들려다 관을 만들어 버린 아이를 마주하게 하고, 단짝 친구들과의 헤어짐을 목전에 둔 여느 하루의 서글픔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얼핏 보면 사소해 보이는 장면들이고, 맥락을 비틀지 않아 잔치국수 먹듯 후루룩 읽힌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문장에 도착하는 순간 이상한 허기가 밀려든다. “영원히 함께 자랄 줄 알았”는데 “자라지 못한” 마음들은 어디로 가지? 끝끝내 고백하지 못한 진심은 그저 이렇게 공중으로 흩어지고 마는 건가?

삶은 존재의 뚜껑을 아무렇게나 열어젖히기 좋아하고 그럴 때 우리는 덜 자란 아이와 함께 지붕 없는 집에 방치된다. 그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조은솔의 시가 이야기하는 ‘성장’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뚜껑 없이 열어젖혀진 상태가 꼭 나쁘기만 한 것 같지는 않다. 성장은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미숙함과 여림에 꼭 맞는 덮개를 마련하는 행위이기도 할 테니까. 고꾸라지면서도 끝까지 산길을 내려오는 그의 시가 나는 참 좋다.
덮개 없이 방치되어 있던 나의 상자들을 덩달아 사랑하고 싶어진다. 안희연(시인•연극원 극작과 서사창작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