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째서 연극을 할까?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
보았을 질문이다.
특히, 학업과 생업을 공연과 병행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학생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하다 보면 다양한 생각이 든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었지?’ 라든지, ‘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거지?’, ‘내가
원했던 게 정말로 이게 맞을까?’류의 고민들. 예술을 한다고 하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닌다고 하면 으레 따라오는 시선이 있다. 고독한
예술가,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 괴짜…. 허나 실제로 재학하면서
만나본 학내 사람들은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어쩌다 보니’, ‘물
흐르듯’ 예술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술을 선택하는 것에
드라마틱한 계기나 의지가 있었던 경우는 흔치 않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세간에서 예술에 대해 흔히 갖는 생각이 있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 하지만 예술학도라면 으레 한 번씩은 떠올려 봤을
것이다. ‘내가 정말 예술을 좋아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은 안타깝게도 비생산적일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효과적인 방안이 크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우선 예술로부터 멀어져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반대로, 좋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다. 여기서 좋은 예술작품이란 절대적으로 잘 만든 작품을 지칭하지 않는다. 어떤 작품들은 명확한 에너지를 갖는다. 그것은 긍정적인 에너지일 수도, 부정적인 에너지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에너지가 감상자로 하여금 모종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매년 여름이 되면 이런 에너지가 응집된 예술가들이 신촌으로 모인다. 바로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하 ‘프린지’)은 1998년 처음 출범하여 연극, 무용, 음악, 퍼포먼스, 시각, 영상 등 다채로운 분야의 예술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는 독립예술제다. 프린지의 가장 큰 특징은 참여하는 작품 혹은 예술가들이 별도의 심사나 선정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날것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닌, 진정 원해서 여는 무대의 장이 열린다. 선정 기준이 없는 만큼 내용과 퀄리티도 각양각색이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그것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프린지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독립예술을 선보인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의 작품들을 만나보았다.
처음 들어간 극장의 풍경은 낯설었다. 카페 같은 분위기에, 몸을 돌려 앉을 수 있도록 등받이가 없는 의자. 팻말에는 “몸을 돌려 자유롭게 관람하세요”라는 설명이 적혀 있고 관객의 정면과 왼편에 무대가 꾸려져 있었다. 극은 정면과 왼편 모두를 사용하여 이루어지며, 그럴 때마다 관객들은 몸을 돌려서 극을 감상할 수 있다. 프린지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가 이렇게 새로운 공간을 찾아내는 것이다. ‘고라니특공대’라는 이름을 가진 이 극장에서는, 튀어나온 고라니를 마주하듯 뻗어나가는 생각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우리 앞에 나타난 ‘진솔씨’를 통해서다. 〈진솔씨를 찾습니다!〉(이하 〈진솔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극학과 전문사 재학생 박보경이 연출 리더와 공동창작으로 참여한 노구라 프로젝트의 창작극으로, 총 다섯 명의 멤버가 합심하여 만든 공동창작 프로젝트이다. 특징이 있다면 바로 박보경을 제외한 네 명은 모두 배우라는 것. 그래서 네 명의 배우가 하나의 키워드를 연기한다. 〈진솔씨〉의 키워드는 ‘솔직함’이다. 솔직함은 타인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솔직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얼마나 솔직해야 할까? 솔직함은 과연 좋은 것일까?
“언젠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나는 연극을 하고, 앞으로도 연극을 계속한다면, (중략) 무대가 아닌 곳에서도 무대를 상상하며 연습하는 시간이, 연기하는 나를 앞세운 순간이 점점 더 길어진다면, 그렇지 않은 나는 어디로 가지?”1
진솔씨와의 만남은 이런 독백을 네 명의 배우가 서로 반복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봤을 법한 고민, ‘무대 바깥의 나는 어디로 가는가?’. 연극이라는 장르는 잔인하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그 감정만으로는 지속할 수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연극인은 생계를 위한 활동을 달리 가져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쉽사리 연극을 버릴 수도 없다. 과연 이 생활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무겁다.
〈진솔씨〉의 배우들은 진솔씨, 즉 솔직한 자신을 찾기 위해 다방면의 시도를 해 본다. 극 중에서 만원 버스를 탄 미희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저 오늘 제 마음속에서 여럿 죽였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해 봤을 법한 생각. 가볍게 꺼낼 수 있는 진솔함들. 웃음과 함께 시작된 말은 점점 더 내밀한 고백으로 이어진다. 혼자 밥을 먹지 말라, 모임 좀 빠지지 말라, 사회성 떨어진다. 타인을 생각해 주는 것처럼 건네어지는 솔직한 말들은 단지 자기 마음 편하자고 건네는 말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요! 저 이런 거에 예민해요. 왜 다들 신경 쓰지 않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제발 좀 다들 나 같은 사람도 신경 쓰면 안 돼요? 질문하지 않는 예의를 모르시나요? 아예 도와줄 거 아니면 그냥 두는 게 최고의 배려인 거 모르시나요?”
미희는 이러한 절규를 통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사과한다. “죄송해요. 다들 공연 보러 와서 누가 화내는 거나 보고 있네요.” 공연은 의도적으로 현실과 연극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솔직함에 접근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설치한다.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솔직함의 벽을 깨기 위한 시도이다. 예컨대 다음 장면에서는 “김미희 양이 솔직함에 상처받은 이유에 대하여”라는 토론 배틀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미희를 제외한 세 명의 배우가 토론을 벌인다. 결국 미희가 솔직한 말들에 상처받은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한편 다음 장면에서는 욕망을 두더지에 비유한다. 인생은 솟아나는 욕망들을 망치로 때려잡으며 살아가는 두더지 게임이라는 것. 그래서 배우들은 뿅망치를 들고 두더지를 잡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미희의 1인 극장에서는 아예 배우의 일기장을 가져와서 읽는다. 네 명의 배우가 각자의 무대에서 저들만의 방식으로 솔직함에 접근하는 것이다.
〈진솔씨〉는 ‘솔직함’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양한 솔직함이 어지러이 떠돌아다니는 환란의 장을 만듦으로써 우리에게 그 자욱을 느끼게 한다. 연극의 마지막은 “연극이 미운 이유”에 대한 나열들로 장식된다. 아이러니하다, 연극을 통해서 연극이 싫다고 말한다는 것은. 이는 연극을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끝끝내 떠나지 못하는 연극인들의 초상과도 같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진솔씨를 찾을 수도 있고 찾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마음 한켠에 놓인 진솔씨와 함께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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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진솔씨를 찾습니다!〉 대본 중 발췌, 노구라 프로젝트
공동창작, 박보경 제공
〈진솔씨〉가 연극을 해야만 하는 이들의 내면에 접근했다면, 〈리어 in(人) 황야〉(이하 〈리어〉)는 연극인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숱하게 봤을, 연극인이라면 더더욱 질릴 정도로 봤을 셰익스피어의 고전에 새롭게 접근한다. 〈리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전문사 재학생인 성화숙 연출이 직접 대본을 재구성하여 공연을 올렸다. 블랙박스 무대 중앙에는 거대한 천이 놓여 있다. 이 천 하나로 〈리어〉만의 독특한 구성이 펼쳐진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도 규모가 장대하고 비극성이 짙다. 흥미로운 지점은 〈진솔씨〉와 〈리어〉모두가 타인과의 교차로에서 시작되는 고통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진솔씨’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솔직한 말들을 듣고 상처받거나, 스스로가 솔직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솔직함의 결핍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다. 한편 ‘리어’의 고통은 자기-되기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이는 리어가 왕으로서의 지위를 자아의 기둥으로 삼은 탓에 타인들과의 전인격적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어는 딸들의 효심을 시험하고자 했다. 그 결과 진실로 자신을 생각하는 막내 코델리어를 내치고, 고너릴과 리건의 거짓말에 현혹된다. 한마디로 리어는 타인의 솔직함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인간의 솔직함이란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대표적으로는 어둠과 죽음의 이미지가 있다. 또한 인간이 시각적으로 쫓아갈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 더하여 아무리 대비해도 영영 알 수 없는 타인의 마음 역시 미지의 차원에 있으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리어는 오만했고 그 오만함으로 두려움을 지우려 한 것이다. 왕이라는 지위가 언제까지고 스스로를 지탱시켜줄 것이라는 오만. 리어는 이러한 오만으로 인해 봉인된 상자를 열어버리고, 비로소 이를 감당할 수 없는 한 명의 인간이 된다. 타인은 고통이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을 통해 실재한다. 리어는 타인들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됨으로써 점점 소외되고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게 된다. 이는 리어의 수행원을 반으로 줄이려 하는 고너릴과 리건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 한 달 후에 꼭 25명으로 줄여 오세요.
- 25명이 필요할까?
- 열 명 정도 필요할까요?
- 다섯 명은? 필요할까?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당신을 돌보도록 명령받은 하인들이 있는데, 한 사람이면 어때요?
- 아니, 하나는 왜 필요하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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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어 in(人) 황야〉 대본 중 발췌,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저,
성화숙 각색, 성화숙 제공
즉 리어는 100명의 수행원을 거느릴 때만 리어 왕이었다. 허나 지위를 잃은 지금은 그저 어느 딸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한 명의 노인일 뿐이며, 그런 노인에게는 한 명의 하인조차 필요하지 않다. 이는 타자와의 관계가 자아에 미치는 영향을 또렷하게 비춘다. 그리하여 모든 수행원을 잃은 리어는 황야를 떠돌며 사람으로서의 초라한 자신을 감당해야만 한다. 성화숙 연출은 이 황야의 이미지가, 곧 올 비극에도 꿋꿋이 나아가는 숭고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표현한 것이라고 밝혔다.
황야는 우리가 모두 겪어야 할 고난이다. 황야는 나 자신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이 공연은 그러한 황야를 하나의 천으로 표현한다. 리어를 맡은 배우는 이 천에 파묻히기도 하고, 옭아매어지기도 하며 얽히고설킨 늪으로 전진한다. 그래서 극의 마지막은 여전히 황야를 걸어가는 리어의 모습에서 끝난다. 원작에서 리어의 비극적인 죽음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 하는 리어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진솔씨에게 힘입어 보다 솔직해지자면, 리어 왕을 떠올리며 고통을 마주해 보자면, 내게는 어떤 바닥이 존재할까. 한때 연극을 할수록 스스로가 지워진다 느껴졌다. 프로시니엄 무대의 장엄한 스펙터클에 이끌려 입학했으나 0에서부터 시작하는 연극원 지하 블랙박스 무대는 기대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은 공연을 억지로 보고 만들고 분석해야 했다. 그것에서 의미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래야 내 모든 선택에도 의미가 생성되니까. 그러나 언제였을까. 어쩌면 학업과 연극의 병행이 너무나도 어려워 학업을 일부 포기해야 했던 시기. 어쩌면 “무대에 똥을 뿌렸다”는 폭언을 모두가 보는 곳에서 듣고도 참아야 했던 시기. 어쩌면 제대로 나이조차 모르는 사람이 반말을 하며 나를 심부름꾼처럼 대하던 시기. 극장에 들어서니 두드러기가 났다. 온몸의 피부가 뒤집히고, 울긋불긋해지고, 간지러웠다. 극도의 스트레스와 지하의 질 나쁜 공기가 합쳐진 결과였다. 그때 그는 왜 소리를 질렀을까? 그것이 그의 ‘솔직함’이었을까? 연극은 그 어떤 장르보다도 관계성이 중요한 공동 예술이다. 타인이 나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을 때, 내가 발을 디뎌야 할 무대는 거친 황야가 된다. 긁으면 덧나고 놔두면 아픈 존재가 바로 연극이다.
허나 우습게도, 나는 지금까지 연극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작품과 나의 관계 맺기를 통해 또 한 번 자아가
존립하기 때문이다. 〈진솔씨〉를 보며 내 안의 진솔씨를 찾아내고
〈리어〉에게서 과거의 그림자를 본다.
극장에서 난
두드러기처럼, 긁으면 덧나고 놔두면 아픈 존재가 바로 연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극을 계속할 것이다. 그 고통 역시 인생의
일부임을 알고 있으므로.
글 강가영
문예창작과에서 연출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장르들 사이를
항해하다가, 현재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는
예술을 지향한다. 최근 농구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