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 엇나감, 엇갈림, 엇각, 엇결, 엇길. ‘엇’은 어긋나고 어슷함을 말한다. 일치하지 않고, 삐뚤어져 있거나 어긋나 멀어지는 것. 다분히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 접두어는 어떤 불일치, 일탈, 어그러짐을 표시한다. 하지만 그 뉘앙스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엇’은 어떤 질서와 조화 가운데 일어나는 돌발적인 사태에 대한 지칭이다. 어떤 일치에서 벗어나고, 어떤 질서와 특정한 형상에서 벗어나는 사태를 우리의 언어는 ‘엇’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엇’은 부정적인 사태를 드러내지만, 그것이 순수하게 부정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엇길은 다른 길이지 길 자체의 부정은 아니며, 엇박자는 확실히 또 다른 음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엇’은 긍정을 향해 가는 부정이고, 또 다른 사태의 도래를 위한 돌발인 것이다. 그래서 ‘엇’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다. 바로 그 어려움과 마주하여, ‘엇’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나 또한 ‘엇’나가기 위해, 철학자 플라톤을 이 자리에 불러내고자 한다. 물론 이런 시도는 의아함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모든 현대적 사유의 질서 안에서 플라톤은 엇나감의 주체라기보다는 그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철학과 예술, 과학과 정치를 포함하는 20세기의 모든 사유는 플라톤으로부터 엇나가는 사유가 아니었던가? 모든 시대의 흐름은 반플라톤적이었고, 그러한 일반화된 반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사유에 대한 엇박자를 만들어냄으로써 전혀 새로운 창조적 흐름을 이룬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의 철학적 사유는 어떠했을까? 철학을 정초하는 플라톤의 사유는 당대를 풍미하던 신화적 사유와 인간 중심적 사유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의 사유야말로 고대의 지배 질서에서 벗어나는 근본적인 엇나감의 사유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엇’의 사유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플라톤의 엇나감을 다시 조명하는 일이다. 이제 그 미로 안으로 들어가 보자.
플라톤적 엇나감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그의 문제작인 『국가』에 등장하는 동굴의 비유다. 플라톤의 동굴 안에는 결박당해 정면의 그림자밖에는 볼 수 없는 죄수들이 있다. 그 그림자만이 진실로 여겨지는 죄수들의 이 어두운 동굴에서 의도치 않게 한 죄수가 빠져나간다. 그는 동굴 밖 진짜 세계와 태양을 목격하고, 과거에 자신이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이 허구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 죄수는 동굴 밖 진리가 던져준 자유와 기쁨을 만끽하는 대신, 다시 동굴로 돌아가 동료들을 그 진리의 세계로 이끌고자 한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림자를 진짜 존재로 믿고 있는 동굴의 죄수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의 동료를 동정하고 조롱한다. 그는 눈이 멀어 돌아온 가련하지만, 귀찮은 미치광이에 불과한 것이다. 동굴의 그림자를 진짜 존재로 여기는 동굴의 죄수들에게 그가 설파하는 태양의 존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동굴의 엄연한 질서에서 ‘엇나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이단아가 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빛의 세계와 태양의 존재를 동굴 안의 희미한 빛, 꺼질 듯 일렁이는 그림자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내 뻗은 동굴 밖으로의 한 걸음, 그 엇나감은 그에게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진실, 두 번 믿지 않을 진리를 선사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드리워진 진부한 거짓 형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진실에 가닿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엇나감이다.
플라톤은 그렇게 ‘엇’의 사유를 최초로 실행하는 철학자가 된다. 그것은 비단 추상적인 비유의 차원에 머무는 것만이 아니다. 플라톤의 철학은 대부분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개입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 그리스 아테네의 지배 질서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형태를 띤다. 『국가』의 작중화자인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그가 설계하는 정의로운 국가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수호자의 교육을 중심으로 그 국가를 설명하면서, 수호자들이 사유재산을 갖지 않고, 모든 교육과 양육이 잘 이루어진다면, 혼인과 출산을 포함한 모든 것이 공유의 질서로 변화할 것이라는 말을 지나가듯 던진다. 그의 이야기를 모두 경청한 제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더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망설임을 보인다. 그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의로운 국가의 구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것을 ‘세 가지 파도’라고 명명한다. 첫째는 훌륭한 자질과 성향을 갖춘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수호자들이 가족과 사유재산을 갖는 것을 금지하여 그들 사이에 공유의 질서를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철학자가 군왕으로 통치하거나 군왕이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플라톤은 그의 엇나감을 구체적이고 대안적인 사유로 제시한다. 이 세 가지 파도는 여성이 정치에서 배제되고, 가족과 사유재산에서 비롯되는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무지한 대중을 기만하는 민주주의의 선동 정치가 판을 치던 당시 아테네 사회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서의 ‘엇나감’인 셈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엇나감, 정체되어 마침내 타락한 고대 민주주의의 중우정치로 대표되는 아테네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부정성을 넘어 또 다른 긍정성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객관적인 질서의 차원에서 보면 플라톤의 시도는 별반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말할 것이다. 플라톤이 전제했던 여성의 해방은 그 당시에 그저 상상적인 것이었고, 수호자의 삶은 타락할 수 없는 구도자의 삶에 접근한 적이 결코 없으며, 철인정치라는 이상적 정치의 모델은 공산주의와 꼭 마찬가지로 그저 헛된 공상일 뿐이었다고. 실제로 플라톤은 당시의 지배 질서를 바꾸지 못했고, 그 질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객관적인 질서와는 다른 지점이다. 플라톤은 그가 제시하는 정의로운 국가의 형상이 이상적인 국가의 전형이 되기를 원했다. 진리와 정치가 일치하는 국가, 진리의 온전함(integrity)이 정치의 기초가 되는 그러한 국가의 기준을 플라톤은 기존 질서에 대한 ‘엇나감’을 통해 제시한다. 그러나 정의의 기준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이후에 필요한 것이 바로 엇나감의 주체적 실천이다. 그때 비로소 정의라는 진리는 현실로 돌아온다. 동굴로 돌아가는 죄수의 우화는 바로 정의의 현실로의 진입, 진리의 실제적인 실천을 가리키는 것이다.
플라톤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정의를 향한 그의 엇나감은 최초의 실천인 동시에 이후의 모든 실제적인 실천을 추동하는 사유의 장치가 된다. 그 실천 속에서 엇나감은 반복된다. 실제 역사 속에서 정의를 위한 실천은 이런저런 형태로 지속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엇나감은 사유의 질서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이 실제적인 것은 바로 엇나감의 실천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천은 대부분 비난받고 억압된다. 사회를 변혁하고 억압에서 벗어나 정의를 현실화하려는 모든 실천의 경험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엇나감은 기존의 질서와 불화하고, 기득권을 공격하며, 주어진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비난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다. 플라톤은 그 위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귀환한 죄수는 과거 자신의 동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는 것을 넘어서, 급기야는 생명을 위협당한다. 그의 엇나감은 지배 질서에 대한 도전이고, 그 질서를 지켜내고자 하는 이들은 그런 도전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엇나감은 기존의 질서에 대항하여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하는 무모한 행위가 되기 쉽다. 그토록 끈덕지게 엇나감을 실천했던 저 소크라테스는 그 도박의 결과로 독배를 들지 않았던가.
이러한 엇나감과 그 실천이 비단 정치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은 절대 아니다. 과학의 영역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입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갈릴레이의 주체적 실천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인정받는 지난한 과정을 잘 보여준다. 지배적인 신 중심의 과학적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그의 주장과 그것을 검증하려는 지속적인 실천들은 종교 권력과 근본적인 불화를 일으켰고, 그는 결국 종교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기에 이른다. 예술적 실천에서도 엇나감은 예술 그 자체를 구성하는 내적인 원리다. 예술은 그 엇나감을 통해 적극적으로 기존 질서와 불화를 일으키는 독특한 영역임이 틀림없다. 예술은 언제나 기존 질서의 빈틈을 찾고, 그 질서와 엇갈리는 선택을 내려 애쓴다. 예술의 엇나감은 종착지를 모른다. 새로운 예술의 간극을 찾아 헤매는 예술에게 엇나감은 예술 그 자체다. 엇나감의 실천이 없다면 예술도 없는 것이다. 호메로스에서 뱅크시까지, 엇나감이 없는 예술이란 없다. 이 모든 엇나감의 실천은 언제나 이어지고 지속된다. 때로는 침묵하고 후퇴하기도 했고, 때로는 완전히 사라진 듯 보이기도 했지만, 인류가 쌓아 올린 엇나감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 왔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엇나감은 모든 새롭고 혁신적인 사유의 시작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엇나감은 기존 질서가 부정하는 ‘무(無)’로부터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주체적 실천의 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고히 자리 잡은 질서에서 엇나가지 않는다면, 새로움과 혁신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창조는 ‘엇’으로부터 시작되어 기존 질서와 충돌하고 불화하는 가운데, 그 질서가 부정하는 ‘없음’에서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엇’은 일찍이 없었던 새로움의 표식이며, 창조와 혁신의 기표다. 그런 과정이야말로 ‘엇’의 진정한 가치가 외관상의 부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긍정성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정치도 과학도 마침내는 예술도, 이러한 창조적 긍정으로 나아가는 사유의 영역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엇나감이 없는 예술, 주어진 질서에 복종하는 정치, 가진 자들의 이해에 봉사하는 과학은 모두 불모의 땅에 유폐된 거짓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유는 긍정적인 창조의 영역에 속한다. 가시적인 확실성만을 주워섬기는 지배 질서와는 전혀 다르게, 창조적 사유의 주체성은 없는 것을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배 질서가 ‘무’로 간주하는 모든 것의 새로운 가능성을 가늠하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창조적 사유에 내재적인 ‘엇’의 주체성이라고 단언해야 할 것이다.
엇나가지 않으면 새로움의 창조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누구든 갈 수 있는 길이다. 모두를 위한, 모두의 길. 그러니 외로워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엇나감의 걸음을 떼어놓으면 그만이다. 모든 창조가 가로막힌 듯 보이는 오늘날, 엇나가는 그 한 걸음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인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걸음. 그 걸음으로 엇나가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단 한 걸음. 그 엇나감의 한 걸음이 모든 것을 바꾸어 내리라.
글 서용순
파리8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성균관대학교 비교문화협동과정 외래교수로 학생들과
함께 프랑스 현대철학과 현대의 정치, 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