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 안의 형형색색의 조명들. 전자 효과음. 조이스틱. 어딘가 익숙한 그래픽으로 가득 찬 화면. 오락실 같아 보이는 이곳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5월 12일부터 9월 10일까지 게임 문법과 미학에 영향을 받은 국내외 현대미술 작품 30여점을 소개하는 전시 《게임-사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예술로서의 게임을 제시한다. 현대미술 안에서 ‘게임적인 것’이 무엇인지, 나아가 ‘게임 같은 것’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맞붙고 상호 반영되는가를 고민한다. 때문에 전시의 맥락을 이루는 작품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갖는다: 매체로서의 게임은 무엇인가, 게임과 사회 간의 동기화와 가속화된 확장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게임은 사회적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게임과 사회 간 실체적 상호 인식의 관계는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이 물음들은 하나의 명제에 도달한다.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
전시 안에서 수많은 게임은 사회와 새로운 방식으로 접촉하거나 서로를 인식한다. 예컨대 김희천 작가의 〈커터 3〉은 현실과 가상 사이를 잇는 과정에서 개입된 기술이 갖는 문제점을 짚는다.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배경인 게임을 플레이하는 영상이다. 관객은 끊임없이 현실의 나와 게임 비디오 속의 인물, 실제로 발 딛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작품 안의 국립현대미술관을 비교한다. 게임 안에서의 존재는 수많은 옵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현실 안’에서 ‘게임 밖’의 상황을 상상하고 제시할 수 있는가? 작품이 던지는 물음은 ‘우리보다 더 구체적인 존재로서의 우리’를 가리킨다. 비현실, 혹은 가상 세계, 게임으로서 구현되고 설명될 수 있는 어떠한 차원은 이미 현실이 된 지 오래다. 그것이 사회의 어느 부분을 확장하고, 이식하며, 지배하거나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더 구체적인 게임 속 존재의 그래픽이 이질적으로 부서진다는 점이 재미있다. 게임-미술 작품들은 불완전한 그래픽과 현실의 사진, 푸티지를 교차시키며 현실과 가상, 존재와 비존재, 리얼타임과 이미지 사이를 넘나든다.
관객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영상’을 서울박스 중앙에 놓인 빈백에 누워 편하게 관람한다. 마치 자신의 방 안에서 편하게 직접 게임을 하거나 플레이 영상을 보듯. 이러한 일상적 행위를 연상시키는 형식은 여가와 관람, 방 안과 미술관, 현실과 게임, 예술과 사회와 같은 엇갈리고 맞물리며 때로는 평행한 두 시간선을 넘나들게 한다.
코리 아칸젤과 페이퍼 라드의 〈슈퍼 마리오 무비〉는 닌텐도 사의 게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화면과 사운드를 해체하고 재조립한다. 세대와 지역에 무관하게 모두가 알고 있는 게임을 재료로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서사와 영화적 구조를 생성한다. 낯설다. 익숙한 멜로디는 변주되었고 친근한 마리오는 예상 밖의 움직임을 한다. 방황한다. 혼잡스럽게 섞이는 노이즈 음악과 그래픽은 불편하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카트리지를 해킹했다는 제작 과정의 비하인드는 불편함을 완성한다. 해킹, 예상되지 않은 그래픽과 움직임, 변주된 멜로디와 노이즈는 익숙한 ‘마리오’를 비튼다. 이것은 더 이상 유쾌하고 편안한 게임이 아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미술관과 미술사의 맥락 안에서 비디오 게임을 어느 지점에 위치시켜야 하는가에 답하기 위해 게임을 컬렉션의 일부로 소장했다. 이런 행보는 ‘아트게임’의 개념과 함께 게임을 예술적 표현 매체로 조명하는 이번 전시의 기획과 닿아있다. 게임은 예술적 개념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있다. 코리 아칸젤과 페이퍼 라드는 이러한 논의를 촉발한 작가들 중 하나다. 그들은 디지털 기술 혁명의 시기를 직접 겪고 게임의 이미지와 비디오 게임을 해체, 재조립하며 현대미술 안에서의 철학적 사유를 제시했다.
전시는 2, 3, 4전시실과 서울박스에서 열린다. 서울박스에서는 김희천 작가의 신작이 커다랗게 걸려있다. 관객이 처음으로 발을 디디게 되는 4전시실은 “예술게임, 게임예술”이라는 제목과 함께 게임을 예술에 접붙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슈퍼 마리오 무비〉가 이곳에서 전시된다. 프로듀서 제노바 첸이 제작한 아트게임 〈플로우〉도 4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게임이 지닌 예술적인 속성에 주목한다. 관객은 아름다운 화면 속에서 부유하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3전시실에는 게임으로서의 예술과 사회를 접붙이는 작업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 너머의 세계”라는 이름에 걸맞게, 작품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사회적인 함의를 품고 있기도 하다. 3전시실은 예술이 된 게임이 사회와 완전히 합치되었을 때의 이후를 상정한다. 게임과 사회가 강력하게 동기화된 상태, 이로 인해 빨라진 세계의 확장을 탐구한다. 나아가 확장된 세계 안에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공동체의 사회적 경험과 한계를 이야기한다. 2전시실을 이루는 작품은 ‘정체성’을 논한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소외된 존재로서의 정체성, 플레이어로서의 정체성, 감각하는 실체로서의 정체성. 이것들은 때때로 모호하다. 정체성을 가르는 경계가 흐려져 있기도 하다. 따라서 2전시실은 “정체성 게임”이라는 이름을 내건다.
그 안의 루 양의 연작 〈물질세계의 위대한 모험〉은 수많은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일본 애니메이션, 종교적 도상, 디지털 기술, 컴퓨터 게임, 공상과학의 요소로 가득하다. 이를 통해 가상과 현실 사이의 이야기를 만들고 아케이드 게임과 애니메이션 형식을 빌려 인간의 본질과 인간 중심적 사고에 의문을 제기한다. 익숙한 형식과 모양새를 빌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람한의 〈튜토리얼: 내 쌍둥이를 언인스톨 하는 방법〉은 VR 게임의 형식을 차용하여 감각하는 존재에 대한 논의를 뽑아낸다. 시각 정보와 기억, 경험과 허구가 넘쳐나는 세계 안에서 실제의 감각과 그 주체가 명료한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전시관의 숫자가 바뀔수록 게임과 사회는 점점 맞붙는다. 게임이 사회가 되고, 따라서 사회가 확장되고, 그 사회의 변화는 가속된다. 비로소 《게임-사회》라는 전시의 제목에 다시 눈이 간다. ‘게임-사회’는 예술로서의 게임이 사회를 빠르게 확장하는 과정과 결과 자체이다. 게임이 예술이 되고 또다시 사회가 되는 유기적인 이식인 것이다. 관객과 작품 역시 이식의 과정을 겪는다. 전시는 관객참여형의 성격을 보이는데, 이는 4, 3, 2전시실을 거쳐 갈수록 강해진다. 관객은 점점 작품 안으로 들어간다. 감상자에서 플레이어라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조이스틱이나 플레이용 총과 같은 새로운 기관을 얻게 된다. 기관의 확장이며 이식이다. 이는 나아가 경험과 의식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게임-예술, 예술-사회, 게임-사회 간의 이식과 확장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는 듯하다. 게임과 현대미술은 닮아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은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하고 참여하는 관객의 모습과 닮아있다. 이러한 향유의 공통점은 주체 스스로가 특정한 순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감동적이고, 예술적이며, 주관적인 경험이다. 게임과 현대미술은 감상의 과정과 결과가 닮아있다. 또한 게임의 플레이어는 제작자의 의도를 따르게 된다. 정해진 경로와 방식을 통해 플레이한다. 미술관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관람객은 기획된 전시의 동선을 따라, 방향에 따라 전시를 감상한다. 그와 동시에 예외도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버그를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어떠한 공백, 사각지대, 오류. 현대미술도 마찬가지이다. 빈틈없는 의미로 가득 찬 작품은 드물다. 비슷한 양상은 두 장르가 서로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남는다. 전시에서는 게임이 곧 예술이며 예술이 곧 게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술로서의 게임, 예술에 이식된 게임을 이야기한다. 이식의 과정은 어떠한 공백, 버그 혹은 사각지대를 지울 수 있는 것일까? 전시에서 이야기하는 게임의 내재적 요인과 관객에게 시사하는 바가 예술과 크게 다를 바 없다면, 게임 그 자체만으로 장르적 의미를 형성할 수는 없는 것인가? 가속화된 세계의 확장과 그 안에서의 새로운 인식과 감각을 위한 전시는 단순한 ‘체험’이 아닌 ‘관객참여형’이 될 수 있는가? 만일 게임과 현대미술 간 형식의 유사성 덕에 두 장르의 이식이 가능했다면,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는 두 장르의 상호 이식은 불가능한가?
《게임-사회》를 좀 더 면밀히 분석해 보자. 관객참여형 전시는 관객이 주도적으로 경험하고 체험하며 새로운 의미와 순간을 만들어 낼 때 유의미하다. 그러나 화려한 그래픽 속에서 관람객은 방향을 잃고, 그저 수동적인 체험만을 위해 조이스틱을 잡는다. 그 이유는 전시 안의 모든 작품이 하나의 맥락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작품은 게임-예술, 예술-사회, 게임-사회의 확장적 의미를 구축하는 데만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각각의 작품이 만들어 내는 의미는 가속화된 게임과 사회의 확장이라는 맥락 아래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해당 전시가 새롭고 즐거운 이유 또한 역시 게임이라는 형식을 빌려 예술적 함의를 표현하고 감각하는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융복합 예술의 가능성을 흥미롭게 펼쳐내는 것이다.
융복합 예술은 이식의 과정이다. 엇갈린 두 장르를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이것은 예술이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거나 혹은 새로운 경로, 대안, 방안, 시각을 제시하는 과정과 닮아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예컨대 이번 전시의 기획은 “게임은 곧 예술이며 예술이 곧 게임이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수많은 여지와 가능성을 낳는 방식이 융복합 예술이므로 형식의 유사성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조금 뒷전으로 둘 수 있다. 아무리 다른 형식의 두 장르여도, 수많은 가능성과 여지를 남기며 복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시를 들어 보자. 록 음악과 축구의 융복합 예술은 가능할까? 두 장르는 어떤 형식의 유사성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복합의 시도가 가능하다면, ‘록 음악은 축구이며, 축구는 록 음악이다’라는 명제가 아니라 ‘록 음악은 축구일 수 있으며, 축구는 록 음악일 수 있다’라는 명제 아래에서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상이한 두 장르라도 형식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 안에서 각자의 사람들이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타디움 안에서 축구를 응원하는 사람과 록 페스티벌의 사람들은 비슷해 보인다. 하나의 장르를 집단으로서 향유한다는 형식 때문이다. 이렇게 형식의 공통점을 찾았을 때 융복합 예술, 즉 이식은 가능해진다. 이는 확장을 가속한다. 새로운 순간을 만들어 낸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세계이다.
글 정지원
미술이론과로 입학, 현재는 전과하여 방송영상과에 재학 중이다. 경계
없는 예술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