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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의식》 전시 전경 ©박보마

하늘을 조율하는 하늘색
박보마 개인전 《물질의 의식》

엇나가 생긴 찰나의 세계를 생각한다. 반사의 세계는 직진하던 빛이 물체에 부딪혀 엇나가며 생기고, 박보마는 그 세계를 좇는다. 박보마가 빛을 따라갔더니 그곳에는 창문에 비친 하늘이 있고, 하늘을 좇았더니 그곳에는 건물 곳곳에 묶인 하늘색 리본이 있다. 박보마의 작품들은 대체로 아주 가볍고 속이 비어 있으며, 표면만을 갖는다. 어떤 것도 꽉 쥐지 않는다. 그렇게 박보마는 무언가가 스친 자리를 비추며 그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갖지 못한 상태를 반복한다.

리움 미술관 로비 ROOM에서 진행되는 전시 《물질의 의식》(2023.07.25-12.24)과 7월 28, 29일에 진행된 퍼포먼스 〈오페라: 하늘색 무한 카논〉1에서는 박보마가 거쳐온 궤적들이 집약되어 있는데, 그 궤적은 박보마가 만들어 온 복수의 페르소나들을 살피며 따라가 볼 수 있다. 빛, 순간, 여성성을 옹호하고 기록하기 위해 고안된 ‘fldjf studio’, 이곳에서 반사체이자 댄서 역할을 하는 ‘qhak’, fldjf studio의 비물질적 작업 방식에서 탈각된 물질의 심상을 수공예로 표현하는 ‘WTM decoration&boma’, 박보마의 수호천사이자 독일인으로 추정되는 ‘보마스 듈러(Bomas Dueler)’2, 사고로 양쪽 팔을 잃은 채 향수를 만드는 러시아 출생 남성 ‘레베카 손(Rebecca လက်)’3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불러온 가상의 회사 ‘소피 에튤립스 실랑(Sophie Etulips Xylang Co)’(이하SEXC)이 그것이다. 이들을 경유하여 박보마는 자신의 세계를 빚어왔다. SEXC는 이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견고하고 균일한 자본주의의 공간이 아니다. 공식 홈페이지4에 따르면, 이곳은 태양 빛이 도시에 반사되는 시간에 빌딩의 창문, 바닥의 표면에 잠시 생기고, 태양을 무한대로 갖고 있으며, 그림자 상태의 임원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SEXC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fldjf studio를 통해서이다. fldjf studio는 수년 전부터 먼 곳에 있는 회사들과 신호를 주고받았는데, 그중 SEXC는 fldjf studio와 잠시 일치하는 파장을 나눈 것을 계기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fldjf studio는 회사의 물질들을 빛으로 바꾸고 다시 반사하며 SEXC을 이곳에 잠시 머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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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서 다루는 퍼포먼스는 7월 28일 자의 공연이다.
2
fldjf studio, WTM decoration&boma, 그리고 보마스 듈러에 대한 소개는 다음의 글을 인용하였다. 박보마, 「추상 인정, 물질 볼륨 기분 필터 환원」, 웹진 세미나(8호), 2021
3
레베카 손에 대한 소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이상엽, 「향이 나는 푸른 맛을 만지는 손」, WTM decoration&boma, 《Rebecca လက and The Cost》(2019.6.20-7.4, 갤러리 SP)의 글
4
소피 에튤립스 실랑의 공식 홈페이지 https://www.s-e-x-co.com/

로비를 이루고 있던 것들의 목록

이번 전시는 SEXC의 리셉션 공간을 리움 미술관의 휴게 공간인 로비 ROOM에 구현한 것이다. 전시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빛과 소리 그리고 향이다. 투명하거나 혹은 반짝이는 하늘색의 물체들이 놓여 있고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며 장미, 바닐라 향이 뒤섞여 다가온다. 이곳은 자연스럽기보다는 연출되어 있다. 선반에는 조화, 얼음 모형 등 모조의 것들이 놓여 있으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선반과 테이블을 덮고 있는 대리석 무늬의 시트지다. 시트지는 자신이 포장지임을 숨기지 않은 채 아직 사용되지 않은 여분까지 여실히 보여준다.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는 담배꽁초는 누군가 이 공간에서 방금 나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렇게 구현된 로비는 박보마가 특히 관심을 기울여 온 공간이다. 작가의 한 인터뷰에 따르면5 로비를 향한 관심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로비가 가진 불특정하고 중간적인 성격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로비에 머무는 사람들 때문이다. 먼저 공간의 중간적 성격은 곧 개방이라는 상태와 연결된다. 로비는 회사의 관련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열려있으며,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자주 놓인다. 이 개방의 감각은 따라서 곧 긴장감으로 연결되고 이는 전시뿐만 아니라 퍼포먼스에서도 두드러진다. 퍼포먼스는 미술관에 입장함과 동시에 맞닥뜨리게 되는 리움미술관의 실제 로비에서 진행되었다. 공간에 들어서면, 하늘색 반소매 셔츠와 민트색 치마, 밑창이 푸른 은색 하이힐을 신고 눈에는 커다란 하늘색 가짜 속눈썹을 붙인 세 명의 퍼포머들이 흩어져 서로 이야기하거나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퍼포머들의 이러한 일상적인 행동은 약속된 공연 시작 시각을 넘기고도 변하지 않았고, 관객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웅성거렸다. 관객들은 로비를 자유롭게 이동하다가 기다림이 계속되자, 중앙 의자에 앉아 쉬거나 멀리 떨어진 벽에 기대기 시작했다. 초점을 두고 있을 곳이 명확하지 않고,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디에서 무언가가 등장할지 알 수 없는 상태. 공연 앞부분의 이 시간은 그 자체로 박보마가 주목하는 ‘로비’의 감각과 닮아 있다.

〈오페라: 하늘색 무한 카논〉 퍼포먼스 전경 ©박보마

30분쯤 지났을 때 공간 어딘가에 앉아 있던, 미화원으로 추측되는 두 여성이 공간 가운데에 설치된 하늘색 막대로 은방울들을 밀며 로비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퍼포먼스는 새롭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들의 움직임은 마치 대걸레로 바닥을 닦는 듯한 행위를 연상시켰는데, 몸짓의 끝에는 은방울들이 있어 이동하는 내내 소리를 냈다. 로비 바닥을 구르는 방울들은 로비의 낮은 조도와 그 위에 뿌려진 반짝이들 덕에 찬란히 빛났다. 박보마는 로비에 있는 미화원, 경호원 등이 회사의 표면을 직접 만지는 이들이기에 진정한 회사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오페라: 하늘색 무한 카논〉은 이들이 어떻게 표면을 감각하고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퍼포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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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창작스튜디오 지원 인터뷰를 참고했다. (인터뷰어: 양효실)

관객이 손에 쥔 것들의 목록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관객에게는 세 가지 오브제가 주어졌다. 〈향: 2010년 8월 13일의 장수하는 스펀지 블루 로즈는 이제야 하늘을 대신해〉(2023)라는 작품의 사진(흰 벽에 부착된 하늘색 장미)이 프린트된 시향지와 하늘색 스프레이가 군데군데 묻어 있고 ‘sky 1’이라는 태그가 묶여 있는 은방울, 그리고 하늘색 깃털이 그것이다.
관객에게 주어진 이 물체들, 향, 빛, 소리는 박보마의 작업에서 되풀이되어 등장하는 모티프들이고, 이번 전시 공간(SEXC의 로비)에서 역시 이러한 오브제들을 볼 수 있었다. 이것들은 한 곳으로 수렴하기보다 촘촘히 퍼져나가며 공간을 점유한다. 박보마는 견고한 물질을 고정된 틀에 채워넣기보다 개방된 공간에 미립자들을 풀어놓아 그들이 자기 멋대로 가닿게 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더불어 이들은 ‘가짜’ 혹은 ‘허상’의 것이다. 박보마의 작품에서 ‘가짜’는 얼음 모형, 모형 나비, 가상의 회사와 같이 말 그대로 모조의 것이기도 하고, 하늘과 빛처럼 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잠시 비춘 것으로서의 가짜이기도 하다. 이들에 대해 박보마는 “가짜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영원성”에 대한 감화, 모조가 가진 좀비적 성격,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진 않는” 가짜6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작가의 언어를 통해 추측해 보게 되는 것은 박보마가 영원성을 실체와 허상을 구분 짓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는 어떻게 영원해지는가. 그것은 박보마가 잡아채는 것들이 모두 반사체와 같이 견고하지 않고 표면에만 머무는 것, 혹은 견고하더라도 표면만 남은 것들이라는 점에서 가능해진다. 퍼포먼스와 함께 제공된 스크립트에도 가짜들이 등장한다. 미술가는 고층의 빌딩 유리창에 비치는 하늘과 태양 빛을 채집하고, 하늘은 스크롤을 계속 내리며 이어지는 방식으로 길어지고, 미술관 난간에 묶인 하늘색 리본은 하늘의 색을 지니고 있음을 넘어 하늘 그 자체가 되어 간다. 스크립트에 따르면 관객이 받은 물건들 또한 각각 하나의 하늘이 된다. 이번 전시뿐만 아니라 박보마가 꾸준히 시도하는 것은 하늘, 그리고 빛을 잡는 것인데 그녀는 늘 그들의 ‘껍데기’7를 쥠으로써 하늘과 빛을 잡아낸다. 하늘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닌 하늘의 반사체를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진의 원리’를 이용한다. 모조의 것들, 그리고 반사체들에 실체가 맺히는 것은 아주 잠깐이지만, 그 잠시는 여러 각도에서 여러 날 동안 반복될 수 있다. 이렇게 영원은 하나의 시간을 길게 늘이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계속된 반복으로 발생한다. 우리 눈앞에 하나의 장면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듯 보이지만 실은 눈의 깜빡임을 기준으로 분리된 컷들이 반복되는 것처럼. 박보마는 이렇게 하늘을 얻는다.

6
위 각주와 같은 인터뷰를 참고했다.
7
껍데기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박보마의 표현이다. 안이 비어 있고, 찰나의 빛이 비쳐 물질성이 구축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 창작스튜디오 지원 인터뷰 (인터뷰어: 조이솝) 참고

〈오페라: 하늘색 무한 카논〉 퍼포먼스 전경 ©박보마

손 없이 만지거나 손과 마주친 것들의 목록

이런 박보마의 작업들은 유머러스하고, 하나의 농담과 같이 느껴진다. 박보마의 작업이 유머러스해지는 것은, 서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가 취하는 “미러링 혹은 반전의 시도” 때문인데, ‘미러링’과 ‘반전’ 역시 박보마의 문법을 거치며 새로운 감각을 전달한다.

이를테면 작가는 물건을 훔쳐 작품의 대상으로 삼은 적 있다.8 물건을 훔친 이유는 팬시점이 천사 조각상에 책정한 가격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회사라는 견고한 가치체계를 흔들기 위해 소피 에튤립스 실랑을 선보이며 박보마는 회사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라는 체계의 표면으로서, 그 물리적 건물을 가져온다. 온통 유리 창문으로 뒤덮인 거대한 직사각형의 건물, 그것이 반사하는 빛에 회사의 실체를 맞춘다. 더불어 ‘건물을 만지는 사람만이 진짜 건물의 주인’이라는 자신의 논리로 미화원, 리셉셔니스트, 경호원 등을 회사의 주인으로 세우고 회사의 경영진들은 영정 사진을 연상시키는 사진 속 실루엣으로 남겨놓는다.

박보마의 페르소나 중 하나인 ‘레베카 손’은 양손이 없는 조향사이다. 조향사의 서사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듯, 박보마의 ‘미러링’과 ‘반전’은 손 없이 만져지는 향, 빛, 소리의 세계와 손으로만 마주할 수 있는 회사의 벽, 속이 빈 표면들의 세계를 모두 만들어 낸다. 정확히 대칭적인 반전이 아닌 엇나가 반사되는 세계, 박보마는 바로 이러한 세계를 통해 실체와 허상을 만진다. 실체이되 표면만 간신히 남은 것, 허상이되 표면은 남은 것. 박보마의 작품 속에서 실체와 허상은 함께 서로의 속을 비워내며 겉을 지어낸다.

여러 문장으로 박보마의 작품에 다가가려 했지만, 미처 다가가지 못한 부분과 언어로는 전달하기 부족했던 감각들이 많이 남는다. 박보마의 작품은 이미지로만 열리는 세계에 유독 가까이 있는 듯했다. 아래의 단락은 이번 글의 출발 지점에 두었던 글들이다. 어쩌면 이러한 표현들이 앞의 여러 문장보다 이 전시와 조금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아주 가볍게 영원해진다. 하중 없는 곳. 빛은 잠시 실루엣으로 거한다. “복사 빛으로의 세계”9. 빛과 반사체가 서로를 음각(陰刻)한다. 모든 하늘은 너무 무거워서 하늘색 리본을 건물에 매어두는 것으로만 견딜 수 있다.

8
5번 각주의 인터뷰를 참고했다.
9
박보마, 「세계는 반사하고 있기도 없기도」, 『머티리얼 스터디』, YPC PRESS, 2022

글 오지은
주로 엉킨 나무들이 있는 창문 앞에서 글을 쓴다. 본 것에 대해 글을 쓰다가, 글에서만 보이는 것에 관해 쓰게 된다. 강아지 만수를 아끼고, 만수는 네모난 몸을 갖고 있다. 미술 이론을 전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