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트로 맥시멈 미트 포커스드
어메이징 얼티밋 그릴드 패티 오브
더 비기스트 포 슈퍼 미트 프릭
올해 초 버거킹에서 출시되었던 실제 버거의 이름이다. “직화로 구워 불맛이 느껴지는 100% 순 소고기 패티를 겹겹이 쌓고, 각기 다른 네 가지 고급 치즈를 더해 고유의 풍미를 즐길 수 있는” 이 신메뉴는 각 매장에서 ‘콰트로 맥시멈… 이하생략’이라는 심플한 제품명으로 표기되었다. 이 글은 물론 햄버거에 관한 글은 아니다. 다만 멀쩡한 버거에 굳이 굳이 기다란 이름을 붙인 다음 다시 정성 들여 줄여버리는 이 ‘귀찮고 품이 드는 장난’이 흥미로운 까닭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종종 유행하는 마케팅을 뜯어보면 언뜻 그 시대의 잔상이 비친다. 가히 ‘뻘짓’이라 할만한 이 수고로움은 이른바 ‘관종’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버거킹의 ‘어그로’인 셈이다. 다소 뜬금없는 소재로 글을 열었다. 하지만 이처럼 뜬금없는 전개야말로 이 글이 전하는 주제를 제대로 표현하는 방식이리라. 주저리주저리 ‘뜬금 있는’ 설명을 도저히 못 참는 이하 생략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것을 버리고 또 어떤 것을 취해야 할까. 필자는 흔히 말하는 ‘요즘 콘텐츠’에서 힌트를 얻고자 한다.
지상파 방송 3사의 연말 시상식을 보기 위해 온 가족이 TV 앞에 모이던 시절이 있었다. 한 해 동안 활약한 연예인들의 수상소감을 듣다 보면 어느새 보신각 종이 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대상의 주인공이 정해지며 동시에 새해를 맞이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연말 시상식을 보고 있자면 확실히 김이 빠지는 느낌이다.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티빙, 왓챠, 웨이브 등 OTT 서비스가 주요 매체로 부상하며 지상파 방송사의 영향력이 줄어든 탓이다. 시상식의 주요 부문 후보가 발표될 때마다 시청자들은 속으로 ‘어? 그 드라마는 왜 없지?’ 하다가 ‘아! 맞다 넷플릭스!’ 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백상예술대상’(이하 백상)과 같은 통합 시상식은 대회의 권위가 한층 높아진 느낌이다. 올해로 59회를 맞이한 백상은 숱한 화제를 뿌리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박은빈 배우가 TV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고, 그녀의 수상소감이 연신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피식쇼〉, 〈GYM 종국〉과 같은 유튜브 웹 예능이 나란히 예능상을 수상하며 참신한 심사 결과였다는 호평이 이어졌다. 방송사와 OTT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유튜브 작품까지 다룬 다양성이 단연 이번 백상의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한편 ‘청룡시리즈어워즈’(이하 청룡시리즈)라는 생소한 이름의 시상식도 열렸다. 올해로 2회를 맞이한 이 시상식은 한마디로 ‘OTT 판 청룡영화제’라 할 수 있다. 청룡시리즈의 차별점은 오로지 OTT 작품만을 시상한다는 점이다. 지난 7월에 열린 2회 청룡시리즈의 대상은 〈더 글로리〉의 송혜교 배우에게 돌아갔으며, 본교 연극원 출신 임지연 배우 역시 같은 작품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화제성과는 별개로 청룡시리즈는 존재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큰 시상식으로 기억되었다.
그런데 백상과 청룡시리즈, 두 시상식에서 큰 주목을 받은 박은빈 배우와 송혜교 배우의 투 샷을 보며 필자는 왠지 익숙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우영우와 문동은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처럼 느껴졌달까. 문득 넷플릭스의 화면과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너편 아파트의 전경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넷플릭스를 켜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섬네일 옆에는 항상 〈더 글로리〉가 있었으니 두 사람의 투 샷이 익숙할 수밖에. 넷플릭스 안의 직사각형 섬네일을 천천히 훑어보며 ‘오늘은 뭘 볼까?’ 고민하는 것이 이제는 나름 익숙한 일상이 된 것 같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매일 밤 이웃집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다른 집을 훔쳐보는 일을 반복 중인 것이다.
영화와 관음을 연결 짓는 건 사실 그다지 새로운 생각은 아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자신의 영화 〈이창〉을 통해 두 행위가 얼마나 닮았는지 직접 보여준다. 촬영 중 다리를 다친 사진작가 제프는 자신의 방 안에서 카메라 렌즈로 주변 이웃들을 훔쳐보기 시작한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 미녀 무용수, 슬픈 표정의 미스 고독. 〈이창〉의 관객들은 제프가 훔쳐보는 장면을 그대로 다시 훔쳐보게 된다. 영화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해 보자. 트루먼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것을 깨닫고 ‘진짜’ 세상으로 나가는 장면. 전 세계의 시청자들은 이를 지켜보며 트루먼이 진정한 자유를 찾길 응원한다. 극적인 순간이 지나가고 트루먼 쇼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리고 잠시 후 시청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다른 채널은 뭐하지? TV 가이드 좀 줘봐.”
이쯤되면 넷플릭스는 지난 세기에 예견된 불길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발명품처럼 보인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 〈블랙 미러〉는 최근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의 섬뜩함을 SF 장르로 그려낸 수작이다. 시리즈를 정주행한 사람은 문득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가장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이는 넷플릭스 본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최근에 공개된 새로운 시즌의 한 에피소드 〈존은 끔찍해〉는 기어이 수십억의 트루먼을 만들어 내는 상상을 실현하고야 만다. 다름 아닌 넷플릭스를 통해서 말이다.
OTT의 알고리즘은 TV 채널을 돌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동화되어 있다. 마치 선택의 폭이 늘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오늘 저녁 본인이 수리남에서 실제 일어났던 마약 범죄 사건을 다룬 드라마 시리즈, 혹은 90년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이비 교주의 만행을 다룬 다큐멘터리, 혹은 솔로 커플들이 무인도에서 서로를 유혹하는 연애 예능 프로그램을 보리라 예측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의 시선은 넷플릭스가 지어낸 아파트를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토요일엔 〈무한도전〉, 일요일엔 〈개그콘서트〉를 보고 다음 날 학교에서 신나게 떠들던 시절이 가끔은 그립다. 요즘은 ‘피식쇼’, ‘차쥐뿔’, ‘침착맨’, ‘바퀴입’, ‘곽튜브’, ‘할명수’, ‘GYM 종국’… 볼 게 많아도 너무 많다. 영화 유튜버들은 15분짜리 영상에 영화 한 편을 담아낸다. 정해진 시간에 TV 앞에 모여 드라마를 보는 풍경도 사라진 지 오래다. 어디서든 원하는 시간에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쇼츠, 릴스, 틱톡을 켜 보자. 토크쇼에서 야구 경기로 다시 정치 뉴스에서 아이돌 챌린지로 10초마다 전혀 다른 ‘인기 급상승 동영상’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고 사라진다. 10분 정도만 지나도 우리의 머릿속은 음바페와 뉴진스, 침착맨과 유시민, 한문철과 코난 오브라이언의 잔상으로 뒤엉킨다. 심지어 이곳엔 고약한 가짜뉴스가 판을 친다. 진위와 상관없이 알고리즘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지 않던가. 요즘 우리는 도무지 내가 무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문제가 조금 더 심각해 보인다.
몽타주는 영화를 편집하는 기법을 말한다. 즉 모든 쇼트와 장면 그리고 시퀀스를 배치하는 포괄적인 작업이다. 몽타주의 교과서 〈전함 포템킨〉의 감독 예이젠시테인은 몽타주가 기계적 편집 과정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몽타주 작업은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여 마치 건축을 하듯이 벽돌을 쌓아가는 행위이다. 예컨대 A 장면 뒤에 B 장면과 C 장면 중 어느 것이 오느냐에 따라 시퀀스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되기도 한다.
허나 인공지능은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파악한다. 알고리즘에 의해 A 뒤에 N, N 뒤에 Z, Z 뒤에 다시 A가 온다. 이처럼 유튜브 알고리즘이 창조하는 무작위 교차편집은 ‘무맥락의 몽타주’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맥락이 상실된 사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문맥을 읽을 필요가 없다. 남는 것은 자극이 남긴 자국들뿐이다. 그렇다면 사라진 것은 무엇일까. 편집된 부분에는 오히려 중요하지만,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은 장면들이 잔뜩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햄버거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버거킹은 사실 신메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첫째, 100% 순 소고기를 사용했다는 점, 둘째, 직화로 구워 패티에서 불맛이 난다는 점, 셋째, 네 가지 고급 치즈의 풍미가 인상적이라는 점 등등… 이처럼 할 말이 너무 많다 보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결국 소비자들에게 신메뉴는 ‘…이하생략’ 버거로 기억된다. 최근 미디어 산업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상파에서 OTT로, OTT에서 유튜브로, 콘텐츠의 양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결국 뇌리에 남는 것은 어딘가 파손된 이미지의 파편뿐이다.
롱테이크 촬영을 선호하는 감독들이 종종 있었다.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 같은 장편 영화는 심지어 원테이크라 불리는 기법(정확한 용어는 원 컨티뉴어스 쇼트)으로 제작되었다. 다시 말해 편집이 없는 것처럼 영화 전체를 한 호흡으로 구성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구성은 엄청난 난이도를 요구하기에 감독의 확고한 미학적 견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방식이기도 하다. 극과 극은 만난다고 했던가. 다른 방향을 향하는 듯 보이는 요즘 콘텐츠의 흐름 속에서도 종종 원테이크 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유튜브에 올라오는 실시간 브이로그 혹은 장시간 공부 영상 역시 원테이크 기법으로 촬영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들은 의외로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 동영상이 되기도 한다. 누가 더 짧게 줄이는지 무한 경쟁을 벌이는 최근의 흐름을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평범한 현상은 아닐 것이다.
한편 최근 한 여행 예능이 화제가 되었다. MBC에서 방영된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2〉(이하 태계일주)이다. 한차례 여행을 1주 분량의 방송에 담아내는 요즘 트렌드와 달리, 태계일주는 한 번의 인도여행을 10주에 걸쳐 방송하였다. 처음에는 기안84 혼자 인도를 여행한다. 여행이 진행되면서 차례로 덱스와 빠니보틀이 합류하고 점차 인도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말 그대로 버릴 장면이 없는 꽉 찬 에피소드가 완성된다. 심지어 태계일주 공식 유튜브 채널에는 정규 방송에 다 담아내지 못한 에피소드들이 짧은 클립으로 올라오기도 하였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다음 주가 기다려진다는 것은 요즘엔 쉽게 느끼기 힘든 감정이다. 필자는 우연히 접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오랜만에 잠시나마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필자를 포함한 시청자들이 태계일주에 반응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선택한 연출 방식이 비교적 롱테이크에 가까운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계일주는 여행 중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빠니보틀이 자신을 알아본 인도 현지인 나빈과 친해지는 과정은 사소한 장면들까지 거의 그대로 방송되었다. 이러한 장면은 시청자에게 사소한 순간도 소중한 기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일깨운다.
예전 윈도우 운영체제에는 ‘디스크 조각 모음’이라는 내장 프로그램이 있었다. 디스크 조각 모음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조각난 파일들을 한 덩어리로 모아줌으로써 운영체제의 실행 속도를 회복시켜 주는 기능이다. 가만 보면 요즘엔 우리의 뇌에도 ‘디지털 조각 모음’이 필요한 것 같다. 하루 중 잠시라도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멈추고 내 안에 떠다니는 이미지 조각들을 곱씹어 보는 것이다. 저장 공간이 부족할 때마다 매번 기억을 리셋할 순 없으니 말이다.
동시대가 겪고 있는 관음증과 편집증은 이제 두통약 정도로는 숨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 하지만 긍정적인 신호들도 발견된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디톡스를 넘어 디지털 미니멀리즘을 이야기한다. 『디지털 미니멀리즘』(세종서적, 2019)의 저자 칼 뉴포트는 가장 중요한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모든 활동은 놓아버릴 것을 제안한다. 나에게 ‘확실히’ 필요한 것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기꺼이’ 흘려보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실천이 미디어의 폭주를 멈출 순 없겠지만 나를 위한 잠시의 도피처를 만들어 줄 순 있을 것이다.
(...)
이하 생략의 시대를 걱정하며 글을 열었다.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생략의 미학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뇌 과학자들은 망각이
인간에게 허락된 축복이라 입을 모아 얘기한다. 모든 기억을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다면 우리는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굳이
거창하게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버리고 비우는
지혜는 삶을 더 간결하고 윤택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조금 더 잘
잊어버리고 더 많이 잊힐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일견 모든 것을 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금이 아니면 금세 쓸모없어지는 정보들이 너무 많아졌다. 마치 회전초밥의 접시를 쳐다보듯이 봐야할 것이 너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을 분별하는 작업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동시대 모든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켜내길 바라며 글을 줄인다.
글 임중효
학부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고 잠시 카피라이터로 일하였으며 지금은
영화이론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죽은 사회의 시인’이라는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