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2023 AUTUMN47

마법 같은 도취의 경험
〈마법원 파티〉를 기록하며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취’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예술 철학을 설명했다.

도취 상태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충만해진 덕분에 모든 것을 풍요롭고 충일한 것으로 만든다. (…) 따라서 아름다운 인간, 즉 힘의 상승이라는 도취에 사로잡힌 인간만이 사물과 세계를 아름답게 보며, 그렇지 않은 인간은 사물과 세계를 추하고 무가치하며 무의미하게 본다.1

1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 박찬국, 21세기북스(2023) 190p

니체의 철학에 따르면 예술이란 무언가에 도취하는 순간에 존재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예술대학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는 구성원들에게 도취를 통한 예술적 경험을 안겨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모든 것이 ‘경영화’ 되어버린 현대 사회에서 예술적 도취를 맛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가 언급한 ‘경영화’는 ‘다음 단계’를 상정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 완벽한 예시로 한국 교육 시스템을 들 수 있겠다. 초등학교는 중학교, 중학교는 고등학교, 고등학교는 대학교 그리고 대학교는 취업을 목표로 오직 ‘다음 단계’를 위해 구조적인 체계로 운영한다. 물론 한국예술종합학교는 특이한 사례다. 일반 대학들에는 ‘취업률’이라는 최종 목표치가 있고(4년제의 예술대학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통계 자료를 교육부로부터 평가받지만, 이와 달리 한예종은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국립특수대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비슷한 양상을 띤다. ‘취업률’이라는 평가 기준에서만 구별될 뿐, 예술 관련 수업 및 활동이 진행되는 과정은 결국 ‘경영화’ 되어버린 모습이다.

작가(텍스트 창작자)를 예로 들어 보자. 학생이 창작한 텍스트를 수업에 가져간다. 수업에서 호평받을 시 학내에서 해당 작품을 선보일 기회를 얻는다. 만약 학내에서도 반응이 좋다면? 이때부터 여러 경우의 수가 생긴다. 연극 대본은 문화재단 혹은 교내 공연전시센터에서 창작지원금을 얻어 실연 기회를 노린다. 영상 대본은 연출자를 만나 영화제에 출품하거나 투자를 받는다. 무용, 음악, 전통예술, 미술 등 전공마다 다른 방식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대다수의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품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닿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연극의 창작지원금’, ‘영상의 영화제 출품’ 등의 이력을 넘어서지 못하며 일부는 그 기회에서조차 소외되어 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라는 속담은 2023년 한국 예술계에서는 유효하지 못하다. 여러 지원과 공모사업의 문을 두드려도 돌아오지 않은 메아리는 창작자로 하여금 ‘이젠 그만할 때가 됐구나’라는 생각으로 열정을 식게 만든다. 이러한 난관을 소화하는 것은 오로지 창작자 홀로 감내해야 하는 몫이다. 그리고 포기하는 순간 학생 예술가는 필히 창작자가 아닌 평범한 대학생으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취업에 대한 압박이다. 한때 수업에서 받았던 박수들은 그 순간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심지어 머지않아 졸업장을 들고 학교도 떠나야 하는 처지다. 필자는 그 간극에서 발생한 허탈이 결국 학생들이 창작물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자신까지 포기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본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끝없이 다음 단계를 성취해내야 하는 것에 지친 학생 예술가들이 떠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이러니한 질문이 생긴다. 그 끝없는 ‘다음 단계’로의 이행과 성취는 학교가 구성원에게 요구했던 것일까? 혹은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실행했던 것일까. 양쪽 다 각자를 변호할 수 있는 입장이 있다. 우선, 한국예술종합학교는 문체부 소속 국립특수대학이기에 비교적 타대에 비해 성과 평가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학교가 학생들에게 수치화 가능한 실적 압박을 가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역시 학생들의 자발적인 실행이었을까. 여기에도 의문이 남는다. ‘다음 단계’를 꿈꾸게 만든 동력에는 주변의 칭찬과 호평이 있지 않았는가. 이런 가운데, 필자는 아래와 같은 진단을 내리고자 한다.

모두가 그것에 익숙했을 뿐이다.

‘다음 단계’를 상정하는 순간 ‘현재’는 철저히 ‘미래’를 위한 예비의 시간으로 전락한다. 모든 행위는 가치와 의미의 유무로 평가받게 된다. 필자는 그것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경영화’된 시대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학교는 그 속에서 학생들을 보호하고 성장시켜야 한다. 수업에서 창작된 작품을 ‘다음 단계’로 보내는 것은 그 일환이다. 도취는 말 그대로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삶 전체를 책임져 줄 수 없다. 더구나 등록금, 재료비 모두 결국에는 돈이지 않은가. ‘다음 단계’를 상정하지 않는 예술이 가능해지려면 그만한 자본까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도취’를 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이다. 그야말로 마법 같은 일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연전시센터가 주관한 캠프 〈마법원 파티〉가 개최됐다. 위에서 언급한 ‘마법 같은 일’을 한번 실행해보자는 취지였다. ‘다음 단계’를 상정하지 않고 오로지 그 순간에 집중하는 예술적 도취의 경험을 선사하고자 했다. ‘마법’은 이에 대한 은유였고, 그것을 잘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1. 충분한 자기 확신을 가진 예술가
2. 예술가를 순수하게 바라봐 줄 관객

한 달의 참가 신청을 받은 끝에 105명(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생 35인 + 초등학생을 포함한 가족 단위 참가자 70인)의 참가자가 모였다. 2023년 8월 24일부터 28일까지 총 4박 5일간 전라남도 구례의 한 캠핑장에서 〈마법원 파티〉가 개최되었다. ‘파티’라는 탈을 쓴 실험의 시간이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굳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지 않는 예술을 다 함께 향유하는 순간의 경험이 과연 참가자들에게 도취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의 집중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이 글은 행사가 끝난 직후, 〈마법원 파티〉의 기획자가 직접 쓰고 있다. 그렇기에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울뿐더러,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의 생각을 일일이 다 알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도취의 순간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 도취는 곧 무언가로부터의 초월을 의미했다.

〈마법원 파티〉 기록 사진 ©공연전시센터

하나. 무더운 날씨로부터의 초월 (관객=아이들)

〈마법원 파티〉는 무더운 여름에 진행됐다.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갔던 와중에, 어린아이들은 예술 체험 프로그램에서 재학생들과 함께 만든 마법 모자, 마법 망토, 마법 가면을 계속해서 착용했다. 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마법 가면을 절대 벗지 않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잠시 가면을 벗었다가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가면을 쓰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둘. 전문성으로부터의 초월 (예술가=재학생들)

쉬는 시간에 음악을 전공하는 재학생들이 뭉쳤다. 자신들의 재능을 이용하여 (〈마법원 파티〉가 진행됐던) 캠핑장에서 즉흥 퍼레이드를 진행해 보고자 했다. 실로폰, 멜로디언, 미니 드럼 등을 챙겨 순회공연을 했다. 그러자 토끼 기숙사 학생들이 그들의 뒤를 따르며 즉흥으로 ‘마법의 소라 고동’ 놀이를 진행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하나둘씩 학생들이 따라붙었다. 자신의 전공을 응용해 하나씩 퍼포먼스를 추가했다. 어느 순간에는 어린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계획에 없던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이러한 〈마법원 파티〉의 광경을 단어로 요약하면, ‘어린아이’다. 이는 ‘도취’라는 단어로 예술 철학을 설명했던 니체가 자신의 인간적 이상향인 ‘초인’을 설명할 때 예시로 들었던 단어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2

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사색의숲(2022), 44p

〈마법원 파티〉 기록 사진 ©공연전시센터

니체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낙타’, ‘스스로 사냥하고 생각하는 사자’를 거쳐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즐기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니체의 말처럼 〈마법원 파티〉의 어린아이들은 ‘마법’이라는 컨셉에 금세 도취했다. 그것은 〈마법원 파티〉에 참여했던 아이들만의 특별함이 아니다. 우리 모두 역시 어린아이일 때는 크고 작은 도취를 빈번히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도취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과거로의 회귀다. 위에서 예시로 들었던 ‘즉흥 퍼레이드를 진행하던 학생들’은 새로운 창작을 한 게 아니라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아가서 도취한 것이다.

필자는 도취만이 진정한 의미의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이지 못한 생각이다. 다만 ‘현실적’이라는 말이 도처에 깔린 시대에, 주기적으로 동료들과 함께 도취를 경험한다면, 그 예술적 희열이 ‘직업인으로서의 예술가’ 혹은 ‘졸업 후 사회 진출’을 준비해나가는 학생들에게 작은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이번 글을 통해 함께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비록 그 힘이 물질적인 가치를 제공해주지는 않겠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만 겪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되어 줄 것이다. 일종의 재학생 복지인 셈이다. 즉, 〈마법원 파티〉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공연전시센터가 준비한 예술 복지 행사였다. 앞으로도 또 다른 도취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도록 고민해보고자 한다.

글 류연웅
협동과정 음악극창작과 재학생이자 공연전시센터 인턴 PD. 〈마법원 파티〉의 기획자. 이머시브 예술에 관심이 많다. 현재 최애 작가는 오시미 슈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