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2023 AUTUMN47

엇, 그런데 말입니다
강덕구 평론집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

예술이론을 전공하는 나에게는 오랜 숙명이 있다. 그것은 내가 처한 환경을 직시하고, 명쾌하게 분석하며, 그와 관련된 글과 작품을 나만의 언어로 읽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줄곧 이러한 일에 능통한 사람들을 동경해 왔다. 아마 지금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내가 비평을 극복하고 싶어 했는지. 평론은 글을 쓰는 능력 외에도 상당한 배경지식과 이해력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내게 늘 평론이라는 작업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하지만 그 산을 넘은 듯한 선배 예술가가 있었으니, 마치 복합적 요소들이 공존하는 영상예술의 형식과도 같이 영상이론을 전공한 저자 강덕구는 그의 평론 모음집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에서 여러 분야에 걸쳐 박학다식하면서도 통찰력 깊은 면모를 보여준다.

동아시아 저편에서 들리는 포쉬 악센트, 혹시 나 좀 힙한가?

필자1가 대학에 입학해 서울 미술관 나들이를 처음 시작할 즈음인 2019년만 해도 국립현대미술관에 그리 사람이 붐비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상업 예술 전시들이 SNS에 활보하게 됨에 따라 사람들은 무료 혹은 단돈 몇천 원으로 즐길 수 있는 국공립 미술관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즉, 감상에 있어 각각의 고유한 언어 체계를 학습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어느 정도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하는, 진입 장벽 높은 고급 취미라고 여겨질 만한 미술 작품 관람 유행에 사람들이 편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 취미와는 구별되는, 고급 취미를 즐길 줄 아는 자의 모습을 표방한 것인데, 이런 현상은 비단 미술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온전히 같은 의미로는 아니지만 말이다.

한때 ‘힙하다’라는 표현이 칭찬으로 쓰이곤 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힙스터(hipster)로 불렀으며 그들의 삶의 방식을 지칭하는 말로 힙스터리즘(hipsterism)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이들은 무엇을 향유하는가. 동시대의 유행을 선도하는 주류문화가 아닌, 마이너한 취향과 비주류의 문화를 택하거나 혹은 부모님 세대가 향유했던 문화를 즐긴다. 이렇게 비주류를 즐기는 이들은 소위 유행에 민감한 자들인데, 대개는 남과 다른 취향을 추구하며 그들과 자신을 구별 짓는다. 따라서 유행을 갈구하지 않는 ‘힙한’ 자들의 행보는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강덕구는 용어의 기원을 추적하며 힙스터리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소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힙스터리즘의 기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의 자아를 끊임없이 갈망해 온 백인들이 보완할 에너지원을 흑인들에게서 찾은 것에 기인한다. 백인들에게 흑인의 이미지는 “펄떡펄떡 뛰어다니는 삶의 이미지”로 연상되었으며, 흑인 문화를 그들 자의식에 이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2 멋쟁이의 동의어로 사용되어 온 ‘힙함’이 사실은 백인들이 상상한 흑인 이미지의 전유(appropriation)물이었던 것이다.

고백하건대 필자 또한 본래 사용되는 맥락을 제거한 채로 무언가를 선망한 적이 있다. 영국 영어 중 하나인 포쉬 악센트(Posh English)가 바로 그것이다. 흔히 여왕의 영어라고 불리는 해당 악센트는 영국의 계급문화를 보여주는 한 예로, 주로 상류층만이 사용하며, 특정 집단(이를테면 영국 윈저에 있는 명문 학교인 이튼 스쿨에서 재학생끼리만 공유되는 언어)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영국 발음에 그들만 쓰는 단어와 표현이 있다니! 문화예술적 취향에 있어 종종 비주류를 지향하기도 하는 나에게 이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유튜브에 올라온 포쉬 악센트 발음 영상을 보던 와중, 나의 욕망을 잠재우는 댓글들을 발견했다. 그 내용은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한, 철저한 이방인인 자가 그들 앞에서 포쉬 악센트를 사용한다면 놀림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들에게는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 사는 이가 단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포쉬 악센트를 쓰는 것이 마치 외국인이 조선시대 양반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저자는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이 마치 전유가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비슷하다고 언급한다. 우리는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성장하는데, 이처럼 전유의 메커니즘은 이미 우리의 예술 창작에 있어 일부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문화적 타자를 ‘올바르게’ 묘사하는 데만 치중하며 여전히 똑같은 돌림 노래를 부르는 상황을 비판한다. 하지만 저자는 타자와 어떻게 올바르게 조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책 전반에 언급하고 있는, 예술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인종, 지역 간의 위계 질서화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 성찰하게 된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1
혼동을 피하고자 ‘저자’는 책의 지은이인 강덕구를, ‘필자’는 본 리뷰를 작성한 이를 지칭한다.
2
강덕구,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 글항아리(2023), 32-33p

비평3의 과거, 현재 그리고 그 후

비평과 리뷰가 여러 매체로 전환되고 평론이 침체됨에 따라 평론가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일부 기성 평론가들은 이에 대해 매체가 변화했을 뿐, 그리 문제 될 것이 아니라 말 할 것이다. 이에 저자는 “위기 자체가 부재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위기를 직접 경험하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있어 음모론자들이 부풀린 위기 상황만큼이나 기이하게 느껴진다”4고 말한다. 이는 마치 국제콩쿠르에서 입상하는 한국인 연주자들이 많아지면 일시적으로 클래식계가 급부상하는 것 같은 착시 효과와 비슷하지 않을까. 사실상 적어도 전공자들만큼은 학위 공부 이후에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감을 체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한 점은 이들 모두 공통적으로 ‘그들만의 리그’의 좁은 문턱을 통해 폐쇄적인 제도로 전진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 쉽게 체감할 수 있는 것은, 평론가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등단을 대체하는 여러 제도가 기성세대에 비하면 폭넓어졌다는 것이다. 다양한 매체와 제도는 시대의 흐름에 알맞게 시의성을 지닌 비평 상품들로 다양한 독자들을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 또한 스타성을 획득한 몇몇만이 독점하는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에 저자는 독점을 분쇄하는 방법으로 오히려 시장에서의 거물 평론가들의 분열을 파고들기를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분열이란 상품으로서의 대중적이고 시장 친화적인 면모를 의미한다. 혹은 그는 예술시장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평론가 간의 위계질서를 타파하고 “독자=필자”5의 등식이 성립하는, 독점이 창출되지 않는 “새로운 시장”으로의 진출 방안을 언급하기도 한다. 저자는 직업으로서 평론가를 지속하게끔 만드는 것, 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의 성공의 공통 분모는 다름 아닌 ‘필체’라고 주장한다. 비평에서 문체는 아이디어를 전파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에 성공의 열쇠를 지닌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직업 평론가로 살아남는 법에 대해 강구하기 전에 오늘날에도 직업 평론가가 존재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영화관에 가야지만 영화를 볼 수 있었고, 어두운 조명 아래 앉은 자리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보던 시절에는 영화평론계가 사실상 기억의 장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비평을 위한 글을 작성하려면 본 것을 모두 기억해 내거나 여러 번 극장을 드나들어야 했다. 하지만 매체의 발달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영화를 여러 차례 돌려볼 수 있게 되면서 영화평론계는 기억의 장으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처음 접한 영화가 단번에 기억나지 않아도 다시 돌려보고,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그 부분만 선택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의 롱테이크 영상이 아닌, 파편처럼 돌아다니는 이미지로의 영화만 남게 된 상황에서 어떻게 영화평론가가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는 비단 영화계만의 문제는 아니며, 예술계 전체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른 제도인가? 오늘날 개인 또한 제도라는 가시적 바운더리를 조작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제도란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기억의 장에서는 작품 비평이 위주가 되었었다. 작품의 스타일이나 미적 가치 등을 주로 논하게 되며 조금 더 나아가서는 작가의 삶과 연계시킨 해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분석하는 데에 그쳐서는 오늘날 평론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비평계의 존재 이유를 자신만의 문체로 독자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이만 직업 평론가로서 지속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비평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비평의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이 목적 그 자체가 되는 것 보다 예술 작품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작품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창을 보고, 나뿐만 아니라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이것이 바로 성공한 비평이며 평론계의 진정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3
본 글에서 의미가 비슷한 두 용어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비평’은 행위성을 강조하며, ‘평론’은 글로 적힌 비평을 가리킨다.
4
같은 책, 116p
5
같은 책, 124p

나만의 박자

매년 3월이면 신입생들은 커다란 기대를 품고 예술학교에 입학한다. 학교라는 공통된 울타리에 속해 있지만 4년 동안의 교내 혹은 외부 활동을 통해 각자가 그리는 미래의 악보는 모두 각기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선배 예술가가 그려 놓은 길을 뒤따라갈 것이고, 다른 이는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갈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이미 다져진 길이 ‘정박자’의 길이며, 그것만이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 늘 ‘정박자’의 삶이 옳은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저자 강덕구의 책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을 필자가 겪어온 예술계에 반추하면서 리뷰했는데, 선배 평론가 강덕구는 그만의 박자대로 예술계를 헤쳐 나가고 있었음을 느낀다. ‘기존의 위계질서를 답습하는 정박자’가 아닌, ‘이를 타파하기 위해 자신과의 싸움에 고군분투하며 엇나가 보기도 하는’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클래식을 연주하는 사람들끼리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이들은 주로 정박자에 떨어지는 클래식 곡에 익숙한 나머지 그렇지 않은 곡, 이를테면 재즈 연주에는 익숙치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주가 시작되면 음악은 이내 곧 자리를 잡아 간다. 음악 안에서도 여러 박자가 있듯, 인생에도 정해진 박자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기준 박을 갖고 인생을 연주해야 하는 것이다. 나만의 박자에 대한 확신은 내가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관심, 애정,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글 김민정
음악학과 미술이론을 공부했으며, 어느덧 졸업을 앞두고 있다. 언어로써 표현되는 예술의 가치에 관심이 있으며, 언젠가는 예술작품을 향유할 때 느끼는 감정의 층위에 대해 연구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