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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 PM 7:30 concert#3 Kyiz Virtuosi & Violinists ©대관령음악제운영실

굽이굽이 다른 감상, 평창대관령음악제
제20회 평창대관령음악제

클래식 음악을 떠올리면 ‘교양’이나 ‘고급의’ 같은 수식어, 또는 곱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공연장을 방문하는 광경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정숙한 분위기는 왜인지 자세를 반듯하게 만들고, 음악에서는 무언가 정해진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때 클래식 음악이 특정 계층만을 위한 장르였던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에도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클래식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음악의 한 종류일 뿐, 감상의 방법에 정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귀를 사로잡는 리듬이나 선율에 몸을 맡기거나, 좋아하는 작품과 연주자에 열광하거나, 새로운 음악이나 악기의 매력을 알게 되거나, 아니면 그것이 내 취향이 아님을 확인하거나. 이 모든 것이 클래식에서도 가능하다. 무대는 마음과 귀를 열어둔 모두에게 마주 열려있는 것이다.

국내 대표 클래식 음악 축제인 평창대관령음악제는 2004년부터 매년 개최되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자연’을 주제로 하는 올해의 음악제는 7월 26일부터 8월 5일까지 평창 알펜시아를 중심으로 강원도 전역에서 열렸으며, 특히 올해는 첼리스트 양성원이 음악감독으로 부임한 뒤 첫 번째로 개최되는 음악제이기도 했다. 국내외 많은 유수의 음악가들이 무대에 올랐고 전국 각지에서 많은 관객이 음악을 기대하며 평창으로 모여들었다. 음악제를 관람하며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무대들에 대하여, 음악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소개한다.

7/27 PM 7:30 concert#3 Kyiz Virtuosi & Violinists ©대관령음악제운영실

7/27 PM 7:30 concert#3 Kyiz Virtuosi & Violinists ‘동료’와의 이중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S.Bach)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Concerto for 2 violins in D minor BWV1043〉은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이나 음악학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교본인 『스즈키』에 수록되어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작품이다. 그 많은 연습곡 중에서도 이 곡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곡이 교본의 순서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중주’곡 이기 때문일 것이다. 곡을 혼자 연주하는 모습과 다른 이와 함께 연주하는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차이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연주자에게 각각의 연주 형태는 굉장히 다른 감각을 요구한다. 음악의 흐름을 온전히 내가 결정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는 그것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설정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의 주체성이 반영된 음악은 그것을 현장에서 감상할 때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 이는 다채로운 소리 덕분이기도 하지만, 소리 이외의 연주자가 서로 주고받는 몸짓과 표정들이 음악의 흐름을 돕는 역할을 하기에 그렇다.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도 이와 같은 현장성이 극대화되는 작품으로, 두 대의 바이올린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솔리스트와 반주악기군 사이에서까지, 각 파트에서 일어나는 대조와 일치가 작품의 뼈대를 이룬다. 또한 바흐는 하나의 모티프를 이런저런 모양으로 변주시키기를 좋아했던 작곡가이므로 각 파트 간 상호작용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작품의 연주 방식에 따라 연주자들은 오로지 서로에게 기대어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야 하므로 서로 호흡을 살피거나 눈으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이런 장면은 무대를 마주하고 있을 때만 찾아볼 수 있는 묘미가 된다. 더불어 같은 선율이 다른 파트에서 다른 조성으로 등장하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작품을 한껏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번 무대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까닭은 무엇보다 솔로를 맡은 두 연주자가 서로 스승과 제자라는 점에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기욤 쉬트르(Guillaume Sutre)와 김성문은 평창대관령음악제가 운영하는 실내악 멘토십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클래식 음악에서는 어릴 때 악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으며 1:1 방식으로 레슨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매우 돈독하다. 이는 다른 세대의 두 사람이 음악을 비롯하여 서로의 삶까지도 긴밀하게 나누게 된다는 장점이 있는 한편, 스승과 제자의 경계가 명확해져 관계가 특정한 방식으로만 형성된다는 특징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관습 속에서 서로 다른 입장의 두 사람이 한 무대에서 이중주를 연주하는 모습은 기존의 굳어진 관계들을 초월하는 시도로 보이기도 했다. 두 연주자는 음악이 흘러가는 내내 호흡을 일치시키고 눈을 맞추며 세밀하게 선율을 주고받았으며, 그 과정에서는 어떠한 고정된 역할이나 위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인사하는 그들의 모습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서로를 아끼고 의지하는 동료 음악가의 모습이었다.

7/28 PM 4:00 concert#4 Catalogue d’oiseaux ©대관령음악제운영실

7/28 PM 4:00 concert#4 Catalogue d’oiseaux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또 다른 방법

클래식 음악은 시대별로 통용되었던 음악어법이 조금씩 다르다. 예컨대 바로크 시대 음악과 낭만 시대 음악은 서로 다른 원리로 작곡되었고 다른 주법으로 연주되기 때문에 각 음악이 가진 맥락을 고려하여 음악을 감상한다면 저마다의 즐거움을 더 잘 누릴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음악의 어법과 내가 가진 음악어법이 맞지 않을 경우 우리는 음악을 파악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아는 만큼 들린다’는 말이 매번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때때로 음악에 관한 배경지식이 감상에 즐거움을 더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음악제에서 피아니스트 로데릭 채드윅(Roderick Chadwick)이 연주한 프로그램은 20세기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과 레오시 야나체크(Leoš Janáček)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올리비에 메시앙은 오늘날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음악어법과는 상당히 다른 방법을 구사하는 작곡가이다. 무대에서 연주된 작품은 《새의 카탈로그Catalogue d’oiseaux》1 중 일부로, 이 작품은 메시앙의 독특한 음악어법과 조류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메시앙은 어린 시절부터 새에 관심이 무척 많았고 그와 관련된 지식이 매우 해박했다. 그는 종종 숲에서 들리는 새의 울음소리를 재빠르게 오선보에 받아 적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 그것을 피아노로 옮기는 행위를 즐겼다고 한다. 《새의 카탈로그》도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작곡된 작품이다. 피아노 독주 모음곡인 이 작품은 새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13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무대에서는 그중 일부인 〈흰머리딱새〉, 〈올빼미〉, 〈검은딱새〉, 〈유라시안갈대딱새〉가 연주되었다.
전체 작품의 연주시간은 2시간 30분에 달하며 작품에 등장하는 새의 종류를 모두 셈하면 총 77종이나 된다고 하니, 새에 관한 메시앙의 남다른 애착을 짐작할 만하다. 이러한 작곡 배경은 작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무대에서 연주되는 음악은 관객에게 낯설기 그지없다. 산발적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들은 도무지 무엇에 집중하여 음악을 들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음악에 멜로디가 없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연속되는 화성이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 꼭 마구잡이의 음정들을 나열해 놓은 것만 같다.

또한 나름의 간격을 두고 연주되는 음표들에서는 그 어떤 규칙도 발견할 수 없으며 곡의 시작과 끝을 알아차릴 만한 힌트도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특징은 메시앙이 표현하려 했던 새의 울음소리를 똑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 상태에 있는 새의 울음소리는 우리가 음악적 요건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충족하지 않는다. 이 자체를 아름답다고 여겼던 메시앙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음향을 그대로 옮겨내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들쑥날쑥한 건반의 울림들을 피아노 소리로 듣기보다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새의 울음소리로 상상하며 작품을 감상한다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연의 소리를 음악으로 여기고 정교하게 모방했던 메시앙의 시도를 보며, 과연 음악과 소리는 어떤 기준으로 구별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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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감상을 원한다면 Warner Classics에서 발매된 앨범 《Messiaen : Edition》에 수록된 버전을 추천한다. 본 앨범의 피아니스트인 이본 로리오(Yvonne Loriod)는 메시앙의 아내로, 《새의 카탈로그》의 헌정 대상이자 작품을 초연한 본인이기도 하다.

7/28 PM 7:30 concert#5 José María Gallardo del Rey & String Quartet ©대관령음악제운영실

7/28 PM 7:30 concert#5 José María Gallardo del Rey & String Quartet
진정한 음악가, 호세 마리아 가야르도 델 레이

기타는 피아노만큼이나 많은 사람에게 친숙한 악기일 것이다. 70·80 시절 통기타는 청춘을 상징했고, 2000년대에 들어 유행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수많은 참가자는 어깨에 기타를 메고 나와 노래했다. 휴대성이 용이하면서도 다양한 선율에 맞춰 반주할 수 있다는 장점은 기타가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는 비결일 것이다. 이런 기타에도 ‘클래식’한 종류가 존재한다. 클래식 기타는 다른 소리나 악기를 반주로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느 솔로 악기들처럼 독자적인 음악을 펼쳐내는 것에 주력한다. 악기의 특성상 음량이 크지 않아 오케스트라나 다른 악기들과 함께 연주되는 경우가 적은 편이기는 하지만, 클래식 기타는 연주의 스펙트럼이 다채롭고 단독 연주로도 큰 에너지를 뿜어낸다. 스페인 기타리스트인 호세 마리아 가야르도 델 레이(José María Gallardo del Rey)도 넓은 무대에서 오로지 기타 한 대만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가야르도 델 레이는 프로그램 다섯 곡 중 무려 세 곡을 자신이 작곡한 곡으로 채웠는데, 이와 같은 일은 클래식 음악회에서 흔하지 않다. 클래식은 통상적으로 과거에 작곡된 곡을 연주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클래식 무대에서는 작곡가와 연주자가 구분되어 있다. 그러니까 자기 작품을 직접 연주하는 가야르도 델 레이는 기타 연주자인 동시에 작곡가이면서 편곡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수적인 명칭의 구분일 뿐이다. 그는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기타라는 도구로 풀어냈을 뿐이지, 그가 각 과정을 구분하여 행한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선율을 만들어내든지, 악기를 연주하든지, 각자가 음악을 향유하는 방법에 맞고 틀린 것은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무대 위의 그를 보며 진정한 음악가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는 자신이 체화한 음악어법을 토대로 악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자신의 도구로 구현해 냈으며, 그렇게 연주된 음악은 아무런 막힘이나 제약이 없이 자연스러운 동시에 관객을 끌어당길 만한 매력적인 서사를 지니고 있었다.

특별히 인상 깊었던 곡은 그의 작품인 〈기타와 현악 사중주를 위한 알타미라Altamira for Guitar and String Quartet〉였다. 바이올린을 비롯한 바이올린족 악기들과 기타는 사람의 몸처럼 생긴 몸통에 줄을 감고 있다는 점에서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방법과 그로 인한 효과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종류로 분류된다. 줄을 활로 그어서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족 악기들은 특정한 소리를 고르게 지속할 수 있으며, 손으로 퉁겨서 소리를 내는 기타는 줄이 퉁겨지는 순간에 가장 큰 소리가 나고 이내 울림이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다. 가야르도 델 레이는 이처럼 종류가 다른 현악기들을 본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다섯 대의 악기가 가진 고유의 장점을 살리는 것은 물론이고, 한 악기의 주법에서 비롯된 특성을 다른 악기들이 공유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하는 일은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또한 이 작품은 스페인 음악의 서정적이고도 강렬한 색채가 짙게 묻어나는 곡으로, 호세 마리아 가야르도 델 레이가 추구하는 음악적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양한 공연이 모여있는 음악제에서는 늘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낯선 음악은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되어주지 못하며, 음악을 마주하기 전에는 그것이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지, 혹은 실망을 안겨줄지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 음악을 들여다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에 음악의 즐거움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감상에 있어서 나에게 익숙한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의 유연함, 그리고 무언가 반듯하거나 아름다운 것을 발견해 내지 못해도 괜찮다는,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글 김예현
‘음악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물음에 답하고자 애를 쓴다.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음악이 남에게도 의미 있는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 것 같다. 좋아하는 것은 삶의 원동력으로, 싫어하는 것은 글의 원동력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