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을 것이다. 보통은 내가 속한 우물이 세상 전체가 아님을 뜻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이미 사실로써 내 안에 굳어진 믿음들에 대해서는 그리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 내게는 참인 사실로 작용한다. 하지만 당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얼마나 자부할 수 있는가? 우물 밖에 나온 당신이 처음 마주하는 세상은 당신에게 어떻게 다가오며, 전에 알고 있던 것과 어떻게 다름을 선사하는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의미의 ‘유쾌’, ‘충격’, ‘불쾌’…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감정들을 품고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당신에게 다가갈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을 안은 채 시작되는 제44회 서울연극제 참가작 <4분 12초>(작가: 제임스 프리츠, 연출: 이곤)와 <믿을지 모르겠지만>(작가: 김이율, 연출: 최용훈)은 비슷하면서도 각자 자신만의 색깔로 극을 풀어나간다.
극은 어쩌면 공연 시작 전에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마치 누군가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 내지는 뒷담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텅 빈 곳에 오로지 LED 조명의 변화와 깜빡임으로 장면을 나누는 진행방식과 연기자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진 연극 <4분 12초>는 긴장감을 한층 더 조성한다. 한편 <믿을지 모르겠지만>의 경우 오로지 의자 하나로 극을 전개해 나간다. 극의 시작 전 평소 내가 알던 아무런 꾸밈 없는 의자에 불과하지만, 이는 곧 연극이 시작함과 동시에 여러 역할로 탈바꿈하는 하나의 주요 장치가 된다. 오로지 독백만으로는 극을 전개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개인적인 선입견에서 출발한 <4분 12초>는 그 어느 공연보다 몰입감이 상당하였다. 또한 극이 전환될 때마다 상상을 넘어선 <믿을지 모르겠지만>의 의자 활용도 또한 시각적으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즉, 두 공연은 전개 방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관람 차원에 있어서까지 시선의 변주를 꾀함으로 인한 충격으로 와닿았다.
<4분 12초>는 피투성이 된 아들 잭의 교복을 발견한 엄마 다이의 울부짖음으로 시작한다. 그는 곧 아들이 디지털 성폭력 가해자로 의심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남편 데이빗은 그리 동요하지 않는다. 이내 다이는 데이빗의 행동에 의심쩍어한다. 그날의 사건이 담긴 ‘4분 12초’의 영상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인터넷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는가.
이 연극은 우리 사회에 내재한 불편한 진실을 무대 위로 끄집어낸다. 극 중 아무리 다이와 잭이 어떻게 사태를 풀어나갈지 울부짖어도 한 번을 나타내지 않는 아들. 다이가 아들을 더욱 감쌀수록 그는 더 꼭꼭 숨을 뿐이다. 이번 사건이 꼬리표처럼 달려들어 아들의 명문대 법학과 진학을 방해할까 봐 더욱 불안해진 다이. 나아가 아들과 본인을 동일시하며 사건의 당사자인 마냥 해결하려 뛰어드는 모습을 보며 관객으로부터 부모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게끔 한다. 극 중에서 엄마 역할을 맡은 다이는 자식을 진정하게 위한다고 볼 수 있는가. 코앞에 입시를 두고 온전한 상태로 마지막 시험에 임할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해하는 다이는 결국 누굴 위하는 것이며,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가해자로 내몰려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아들인가. 아니면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한, 지금까지 차곡차곡 잘 쌓아온 입시를 위한 자식 농사인가. 자식의 성공적인 입시를 위해 평생을 매달린 부모, 이 모든 과정이 순간의 실수로 물거품이 되기 직전인 상황을 직면하며 다이는 괴로워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다이와 데이빗은 “지금까지 우리가 그 아이에게 금전적으로, 물질적으로 뒷받침한 게 얼만데”라는 발언을 스스럼없이 하며 자식을 하나의 투자 수단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이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불러도 대답 없고 모습 한 번 비춰주지 않는 아들의 행동에는 그만의 서사가 있었을 터. 여자친구 카라의 친오빠와 아빠에게 여러 차례 맞고 집에 들어오지만 본인이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피력한다. 엄마와 아빠는 아무 죄 없는 친구 닉이 그랬을 것이라며 그들 나름의 합당한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우리 아들은 그럴 리가 없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친구를 나무라는데, 사실 범인은 무대 위에 따로 있었다. 자식의 앞날만을 걱정하던 아빠, 늘 다정하던 남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 모든 것이 가족만을 위했던 아빠가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저지른 것이라는 사실을 믿겠는가. 아내 다이 또한 이를 받아들이기 힘든 눈치이다. 이는 가족은 늘 내 편이라는 믿음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실제로 그 동영상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범인이 남편 본인이었음을 실토하는 장면에서 아내 다이뿐만 아니라 관객 모두 놀라움과 충격을 금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그가 그랬을 것이라는 단서조차 없었으며 아들의 학업의 승승장구를 꿈꾸는 아빠라면 당연히 아들의 미래를 발목 잡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너무나 확고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다이와 관객들 모두.
초반에는 아들이 가해자인 것 같았지만 끝내 아들 또한 피해자였음을 알게 되는 시점에서 그런데도 우리에게 피해자와 가해자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근거와 믿음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아들 잭 또한 해당 영상을 찍고, 여자친구의 입을 막은 점에 관해서는 명백히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피해자를 위한답시고 하는 생각과 행동들이 얼마나 피해자의 심정을 고려하고 배려한 것인가. 혹시 그를 위로하는 행위가 미래의 잠재적 범죄자를 키우고 있던 것은 아닌지 연극은 우리에게 반문한다. 또한 여러분은 피해자의 안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엄마 다이가 (4분 12초의 ‘그 비디오’ 시간보다 긴) 20여분 남짓한 시간 동안 아들에게 체벌을 가하는 식의 해결책을 제시했을 때 카라의 심정을 생각해보라. 사실 카라의 정신적 고통을 보듬어 주는 해결책은 그 어디에도 없다. 스마트폰 사용이 만연한 지금 세대에게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주기에 연극 <4분 12초>는 충분했다.
이 작품은 해외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있는 것으로, 각색의 과정에서 지명을 해외 배경지의 것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어쩌면 국내에 실재하는 어느 지명으로 바꾸지 않아 작품의 의도 전달 면에 있어 효과적이었는지 모른다. 국내 지명을 통해 내가 처한 사회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경우 관람자들은 그 상황 또한 직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굳이 지명까지 바꾸지 않아도 될 만큼 이 모든 것(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디지털 성범죄 등)은 현대 사회에서 부각되는 전 세계적인 문제였던 것인가.
이러한 물음을 뒤로한 채, 끝내 잭의 대학 입학 소식을 전하며 극은 마무리된다. 무대에는 이 가족을 둘러싼 웅성거림이 마지막까지 존재할 뿐이다.
알 수 없는 형체를 지닌 공연 포스터. 이것은 여자인가 남자인가, 복장은 도대체 왜 이런가 등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이 연극은 엄마가 남기고 간 하나의 쪽지로부터 시작한다. “사실 우리 엄마 아빠는 원래 갖고 있던 성이 아니었어” 라는 하나의 문장으로부터 엄마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 아들의 모습은 어딘가 매우 불안해 보인다. 사라진 엄마에 대한 단서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인지, 쪽지가 지칭하는 상황에 대한 인지가 불가능한 상황 때문인지 아들은 괴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벌써 포기하기엔 아직이다. 이는 한낱 에피소드의 에피소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끝내 작품 속 작품의 형태를 총 7번을 반복하는 이 작품은 서른다섯의 아들의 이야기로 시작해 언뜻 보기에는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있는 듯한 6개의 다른 에피소드로 향한다. 아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희미하고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형체를 끄집어내려는 잠수부’, ‘과거 하나의 처방이 잘못된 것으로 끝까지 괴로워하는 여의사’, ‘지하철에서 성추행범을 잡았지만, 그는 유명한 교수였기에 이를 무마하고자 하는 주변의 목소리에 저항조차 못 하는 지하철 수사대 경찰’, ‘과거 학교 폭력 가해자였던 민 대리의 이야기’, ‘트랜스젠더 마담’의 이야기를 거쳐 대작가와 작가의 이야기로 도달한다. 이렇게 연결고리 하나 없어 보이는 각각의 에피소드는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
진실은 이렇다. 잠수부가 보았던 알 수 없는 형상은 사실 엄마로 추정되는 것이었으며, 트랜스젠더 마담은 엄마와 알고 지내던 유일한 사람이다. 엄마는 1세대 트랜스젠더로, 마담에게 소개받은 성전환 수술을 한 일본의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남자였지만 여자인 사람과 여자였지만 남자가 된 사람은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심하며 그 아이가 첫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아들이다. 그 사이의 다른 에피소드들은 각각의 일화를 연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써 작용한다. 마지막 장면에서야 대사를 이어 나가는 ‘작가’라고 자칭되는 인물은 사실 공연 시작과 동시에 무대 위에서 우리와 함께했다. 이 모든 것은 마지막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작가의 이 사실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한 듯한 그가 사실 매 에피소드에 등장하며 본인이 설계한 이야기를 관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다시 첫 에피소드로 돌아가 순환의 형태를 띠는지도 모른다.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하는 작가라는 인물은 사실 본인이 그 아들이었을 가능성을 담은 발언을 하며 극을 마친다.
엄마와 아빠의 성은 내가 알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전개되는 <믿을지 모르겠지만>에 혹자는 성소수자 그들의 이야기를 재치 있게 담아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작가라는 캐릭터 자체를 무대 수면 위로 끌고 들어오면서 어쩌면 ‘연극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주변 사람들의 존재론적인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여 결국 원초적인 질문으로 향하는 이 연극은 연극의 형식에 대해 지니고 있을 색안경에 도전한다.
요즘 떠오르는 다른 장르들, 이를테면 뮤지컬 등에 비견해 줄어든 연극 수요에 대해 이들과는 다른 차별점이 연극계에 요구되고는 한다. 그럼에도 서울연극제는 대학로를 찾기에 충분한 이유를 제공했다. 코로나로 잠잠했던 연극계에 다시 한번 불씨를 제공하고, 실험적인 연출과 극을 펼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연극제를 통한 선의의 경쟁으로 활발한 연극계의 토양을 다지기에 충분했다. 우리 삶의 희로애락 혹은 이면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활성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연극, 나아가 예술이 지니는 일상과 구별되는 특별한 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