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제목만 들어도 바로 ‘촉’이 오는 영화가 있다. 최근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되며,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지느러미>(The Fin) 역시 그런 작품이다. 지난 봄호 매거진의 주제가 ‘촉’이었다면 이번 여름호 매거진의 주제는 ‘쾌’이다. 촉이 날카롭게 서 있는 창작자는 자연스레 관람자에게 쾌의 감정을 선사하기 마련이다. 영상원 영화과 출신 박세영 감독은 최근 누구보다 촉이 날카롭게 서 있는 국내 영화판의 주목받는 신인 중 한명이다.
전작인 <다섯 번째 흉추>가 작년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상을 시작으로, 제26회 판타지아 영화제 베스트 데뷔상,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장편 감독상 등을 수상하며 국내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더니 올해 초, 같은 작품으로 제73회 베를린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되었다. 연달아 공개된 작품 <지느러미>가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판타스틱7’에 선정되며, 최근 박세영 감독은 국내외를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영화 <지느러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전작인 <다섯 번째 흉추>에 대한 소개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두 영화는 기본적으로 같은 ‘결’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흉추>는 버려진 매트리스 위에 피어난 곰팡이, 그리고 그 곰팡이로부터 탄생한 생명체의 이야기이다. <씨네21>의 이유채 기자는 ‘폐기물 스티커가 붙은 매트릭스에 핀 곰팡이의 서울 유랑기’라고 이 영화를 소개한다. 생명체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 부단히 거주지를 옮겨다니다 결국 인간의 척추 뼈에 자리잡는다. 영화의 제목인 ‘다섯 번째 흉추’는 생명체가 선택한 마지막 거주지인 셈이다.
자신은 ‘쓸데없는 찌꺼기’에서 힘을 느낀다는 감독의 말을 들으며, 그가 이번 영화의 제목을 <지느러미>로 정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BIFAN의 모은영 프로그래머는 “최근 몇 년간 가장 독창적이고 예술적 영감이 가득찬 독특한 작품이었던 ‘다섯 번째 흉추’와는 또 다른 지점에서 개성적인 스타일과 SF 장르 속에 우리들의 자화상을 투영한 작품’이라고 <지느러미>를 소개한다. 곰팡이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오브제에서 생명력을 느끼는 그만의 독특한 감수성은 감독의 주목받는 최근 행보와 달리, 눅눅하고 침울하지만 동시에 어딘지 알 수 없는 힘을 품고 있는 것만 같다.
제목만 들어도 범상치 않은 내용을 잔뜩 품고 있을 것만 같은 영화 <지느러미>를 연출한 영상원 출신 박세영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전작인 <다섯 번째 흉추>에 이어 <지느러미> 역시 칸 국제 영화제를 비롯한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우선 영화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지느러미>는 자연재해와 환경오염으로 뒤덮인 미래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삼은 SF 재난 영화입니다. 반인반어가 된 돌연변이 오메가족과 그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 속 혐오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를 통해 이번 영화 <지느러미>가 올해 칸 필름마켓의 판타스틱 장르 활성화 프로그램인 ‘판타스틱 7’에 소개될 작품으로 선정되었는데요, 감독님이 처음 영화를 구상하게 된 동기를 듣고 싶습니다.
우선 제작 차원에선 저예산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영화 <지느러미>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영화에서 주로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맥거핀(macguffin)효과의 기능을 역전시키고 싶다는 생각에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지느러미는 사람이 아니고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공식을 한 번 실험해보고 맥거핀의 기능을 확장시켜보고 싶었습니다.
최근 칸 필름 마켓에서 후반 제작비를 지원받기 위한 피칭을 하셨는데요, 영화제작을 위한 예산이 얼마 남지 않아 간절한 상황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궁금합니다.
피칭 당일날은 떨릴 것 같아 전날부터 굶다가 아침에 폭식을 하고 실수로 에스프레소 세 잔을 연속으로 마셨습니다. 같이 온 사람들은 안 떨려보여서 저도 안 떨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한 명은 발표를 안 해도 되는 사람이었고, 한 명은 아웃트로만 해주는 분이라 당연히 안 떨린다는 걸 깨닫자 더욱 긴장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5분 동안 피칭을 하고 나면 남은 하루 중 23시간 55분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텨냈습니다. 그리고 ‘내일 기타노 다케시 영화를 봐야지’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며 힘을 냈던 것 같습니다.
최근 다른 인터뷰에서 ‘곰팡이 크리처’가 질투 혹은 분노를 느끼며 태어났다고 언급하셨는데요, ‘한을 가지고 태어난 생명체’라는 표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영화 <지느러미>와 전작인 <다섯 번째 흉추>의 캐릭터들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번 영화 <지느러미>, 그리고 전작인 <다섯 번째 흉추> 두 영화 모두 인간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전작에선 인간이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생명체를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지느러미>에서는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노동자가 죽어가며 자신의 몸에서 떼어낸 ‘살 덩어리(지느러미)’를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영화에서 이런 요소들은 주로 맥거핀으로 기능하기 마련인데요. 맥거핀은 서사에 있어선 주로 쓸모없거나 소위 기믹에 불과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이 두 작품에서 저는 맥거핀을 주인공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이런 ‘쓸데없는 찌꺼기’에서 힘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한예종 재학 시절 자취 경험을 바탕으로 ‘곰팡이 크리처’를 구상하였다고 들었습니다.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또다른 사건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예술사 졸업작품으로 완성한 영화가 너무 실험적이라는 얘기를 듣고 졸업을 하기 위해 빠른 시일 내에 다른 단편을 찍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영화 덕분에 처음으로 제가 만든 영화로 영화제에 초청되었습니다. 사실 졸업을 하기 위해, 교수님을 만족시키려고 만든 영화였는데(웃음), 아무튼 학창시절은 저에게 소중한 기억과 고마운 감정이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영화과 예술사와 조형예술과 비디오 아트 전문사를 졸업하셨는데요, 학교에서 배운 수업들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 배움들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미술원 수업을 많이 들었습니다. 주로 미술 이론이나 동시대 미술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술 중에서는 비디오 아트, 실험영화, 구조주의 영화를, 그리고 영화 중에서는 상업영화 시스템 밖에 존재하는 영화들을 많이 접하고 자극을 받았습니다.
<지느러미>의 경우 총 제작 기간이 6개월, 총 8회차에 걸쳐 촬영이 진행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효율적인 작업 방식을 선호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평소 감독님의 구체적인 작업 스타일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저는 사실 특별한 작업 방식이 없습니다. 일 년 동안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영화를 찍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못 버니까 일주일 가량 밖에 못 찍는 것 같습니다. 100회차 찍어보고 싶습니다. (웃음) 스태프와 친구들, 배우들한테 맛있는 식사 대접하고 택시비도 계속 주고 그런 현장을 꾸리고 싶습니다. 많이 부족한 현장이고 짧은 프로덕션 기간들 속에서 영화를 만들기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분배하려고 노력합니다. 아직은 20대니까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곧 있으면 체력이 달릴 것 같은데… 그때에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몸 챙기며 영화를 꾸준히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호 매거진의 키워드는 ‘쾌’인데요. <지느러미>를 본 관객이 느끼게 될 감정은 어떤 것이길 바라시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열심히 후반 작업 중이기 때문에 감정에 관해서 얘기하기엔 이른 것 같습니다. 기다리시는 분이 있다면 열심히 끝내고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후반 작업 중입니다.
영화인을 꿈꾸는 한예종의 학생들에게 선배로서 전달하고 싶은 조언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또한 <지느러미> 이후 앞으로 감독님의 행보도 궁금합니다.
가난하게 영화 찍는 것은 힘들지만 동시에 즐거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난하지 않게 찍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것 같고요. (웃음) 확실한 것은 안 찍는 것보단 가난하게 찍는 것이 나은 것 같습니다. <지느러미>가 끝나고 구성하는 작품은 많습니다. 혹시 이 글을 보시고 투자자가 있으면 메일(syeyoung30@naver.com)로 연락주세요.
감독으로서 언젠가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다음엔 칸에 피칭하러 가는 게 아니라 경쟁하러 가고 싶습니다. (웃음)
Fin.
화살촉은 언뜻 지느러미를 닮은 것처럼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날카롭게 중심부를 향해 날이 선 화살촉과 달리 지느러미는 언제나 주변부에 위치하며 본체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한다는 점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박세영 감독은 그의 영화 제목처럼 지느러미를 닮은 사람임을 느끼게 된다. 특별한 제작 방식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부족’한 현장이라는 말과 함께 스태프와 도움을 준 친구들을 먼저 언급한다. 그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묻는 질문에 ‘가난’과 ‘영화를 찍는 일’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담담하게 전한다.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말들은 그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의 축약처럼 느껴진다. 박세영 감독은 화살촉처럼 목표만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늦더라도 주변을 살피며 방향을 수정해가는 지느러미같은 유형의 사람이다. 방 한 켠의 곰팡이처럼 ‘쓸모없는 것’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그의 통찰력은 지느러미처럼 부드럽지만 일견 화살촉보다 더욱 날카롭다. 이처럼 무디게 주변부를 응시하며, 소외된 것들을 보듬는 그만의 ‘촉’으로 완성된 작품들이 더 많은 이들에게 ‘쾌’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