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2023 SUMMER45

미래의 고전을 창작하기
특별한 기말과제를 찾습니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 마지막 마디에 긋는 끝세로줄(). 며칠 밤의 정신을 파먹고 뇌를 쥐어짜며 뭔가를 만들고 실력을 벼려내는 과정이 그럼에도 마침내 즐거운 것은, 기나긴 여정이 마무리됐을 때의 희열이 앞에서 맞닥뜨렸던 순간순간의 절망들을 조금이나마 밝혀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름에 걸맞은 다채로운 예술의 파편이 공존하는 한예종에서 각기 다양한 전공의 재학생들에게 독특하면서도 낯설고 또 흥미로운 기말 과제에 대한 설명을 들어볼 수 있었다. 한예종에 개설된 대부분의 과목과 전공실기 수업들이 ‘중간고사’라는 개념을 따로 도입하고 있지 않은 만큼 유달리 방대한 이들의 기말고사 및 과제들은 제법 묵직한 부담감과 더불어 끝났을 때의 더할 나위 없는 해방감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수십 번의 리사이틀

한예종 음악원에서는 오케스트라 단원 수만큼 다양한 악기와 함께 평생을 걸어온 기악 전공 학생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전공실기’라는 이름을 가진 수많은 수업들의 실기시험 주간에는 대부분의 음악원 수업들이 휴강할 정도로 기말 실기 시험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음악원 기악과의 전공실기는 모두 시험보다는 리사이틀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량의 실기곡 목록을 구성해야 하는 것으로 이미 악명이 높다. ‘자유곡 40분’으로 진행되는 피아노 전공의 기말 실기시험은 학생과 담당 교강사가 협의하여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특별한 지정곡이 있지는 않지만 대개 바로크, 고전, 낭만, 현대로 나눈 클래식 레퍼토리를 시대별로 한 곡씩 골라 연주하기도 하고, 길이가 긴 곡을 포함하는 경우 한두 곡만으로도 프로그램이 끝나기도 한다. 시험에 대해 묻자 한 학생은 이번 기말 시험을 준비하며 35분 가량의 콘체르토 한 곡에 다른 짧은 소품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여타 학교의 실기시험처럼 앞부분 조금 듣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빨리감기, 전주 건너뛰기 같은 노래방 치트키들도 당연히 없으니, 그들은 그저 준비해 온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연주해야만 한다. 그래서 피아노과 학생들은 주로 시험 직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끊지 않고 연주하는 ‘런스루(Run-through)’ 위주로 연습한다.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할 뿐 이들의 기말고사는 학교생활 내내 총 8번의 독주회 기회를 갖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떤 곡을 연주할지 정하는 것부터 난관이 시작되지만 수없이 반복되는 연주는 그만큼의 방대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운 채로 40분을 쉬지 않고 연주하는 데서 오는 체력 소모도 상당하다. 시험이 끝나면 ‘너무 힘들어서 한 15분은 밖에서 멍 때리다가 나온다’는 후기에서 그날의 고됨이 느껴진다.

“저는 이게 ‘시험이다!’라고 다가오지는 않아서 그냥 몇 개월 동안 열심히 준비한 독주회 끝낸 기분이에요. 되게 후련하고 찝찝하기도 하고요… 또 다음 학기 곡 짜고 연습할 생각에 아주 잠깐 설레기도 해요. (웃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우리 손으로

미술원의 조형예술과에는 미술 전공 학생으로서는 드물게 1학년에 파운데이션(Foundation) 과정이 존재한다. <기초스튜디오> 수업에서는 예술적인 표현을 하는 데 있어 사용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에 대해 공부하고 경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작의 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학생들이 스스로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해 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1부터 8까지로 세분화된 과정 중 1~4에서 3과목, 5~8에서 3과목 이상을 수강해야 하는, 말 그대로 ‘전공필수’다. 2023학년도 1학기의 경우 <기초스튜디오 1>에서는 ‘감각하는 신체’, <기초스튜디오 2>는 ‘이야기와 수집’, <기초스튜디오 3>은 ‘행동–행위’, ‘라이브 퍼포먼스’, ‘언어와 행위’, ‘행위하는 신체’, 마지막으로 <기초스튜디오 4>에서는 ‘구축과 전환’, ‘소리나는 오브제’, ‘형태의 재구성’이라는 주제 하에 수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중 ‘소리나는 오브제’의 경우 팀 프로젝트로 진행한다.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는 데 있어서 조형예술과 학생들은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켜 제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시장의 배치, 팸플릿 및 리플릿 제작, 홍보 등 하나의 전시가 올라가는 데 있어 요구되는 과정 전반을 모두 직접 주도하게 된다. 이 모든 절차는 1학년 2학기 기말 성적에 반영된다. 이들이 손으로 직접 빚어내는 것은 단순 전시 작품만이 아니다. 그렇기에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작품’일지도. 2023년 미술원 파운데이션 기초스튜디오 1학기 과제전은 6월 9일부터 14일까지 석관캠퍼스 갤러리에서 진행되었다. Instagram @karts.foundation

15시간의 푸가 시험

‘시험’을 치르는 데 적절한 시간은 얼마 정도 될까? 잘은 모르지만 4시간 이상 소요되는 긴 시험들은 그 존재 자체도 매우 드문 듯하다. 하지만 음악원의 작곡가들은 하루 온종일을 꼬박 시험 보는 데 투자해야만 한다. 작곡과 2학년 전공필수 <18세기 대위법> 수업의 기말고사를 위해서다. 학생들은 아침 9시부터 자정까지 학교에 남아 주어진 주제에 맞춰 60마디에서 70마디 길이의 4성 푸가(Fuga: 모방대위법적인 악곡 형식을 일컫는다)를 작곡하는 시험을 본다.

<18세기 대위법>은 소위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일 클래식 작곡가 바흐의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양상의 대위법과 그 작곡 기술을 습득하고, 이를 통해 바로크 시대에 유행하던 여러 종류의 대위법적 악곡들을 실제로 작곡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인 수업이다. 커리큘럼은 1과 2로 나뉘어 일 년간 진행되며, <18세기 대위법 1>에서 제시부까지의 푸가 작법을 배우고 <18세기 대위법 2>의 기말고사로 이 기나긴 시험을 치르게 된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곡’이라는 행위 자체가 가볍게 20–30분 투자한다고 뚝딱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 아닌 데다가 일 년간의 수강을 완성하는 시험이라는 의미도 있으니 시험 시간이 오래 걸릴 법도 하다.

물론 15시간을 내내 갇혀 있는 것까지는 아니다. 중간에 밥도 먹을 수 있고 다 쓰면 먼저 가도 된다. 그러나 해당 수업을 수강한 학생의 증언에 따르면 그마저도 시간이 모자라 밥은 시켜 먹고, 시험이 끝나는 자정까지 3–4명은 남아 있는다고 한다. 이 길디 긴 시험을 준비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 동안 정신을 붙잡고 곡을 쓸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것과 수업 때 배웠던 바흐의 푸가들을 들여다보는 것밖에는 딱히 별 수가 없다. ‘작곡’시험이다 보니 훔쳐볼 것도, 급하게 머리에 외워 넣을 것도 마땅치 않으니까 말이다. 바흐의 푸가는 복잡한 규칙이 있기로 악명이 높아서, 아마 그것을 다 설명하려면 이 지면 전체를 할애해도 모자랄 것이다. 그 많은 규칙들에 딱딱 들어맞도록 곡을 써 내는 것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15시간 동안의 시험을 치른 작곡과 학생들의 심경이 어떠할지는 감히 예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학생들이 푸가라는 형식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 확인하기에 이만큼 직접적인 방식은 또 없을지도.

Thought is free -William Shakespeare

매년 인류의 문명 발달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노벨상. 물리학, 화학, 문학, 생리학/의학, 평화, 경제학의 6가지 부문을 시상하며,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으로 만들어졌다. (경제학 분야는 노벨의 유언과는 무관하다)

내가 만약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다면 어떨까? 이 짜릿한 상상을 현실로 옮겨주는 곳이 있다. 바로 연극원 연출과 및 극작과 1학년의 전공필수이자 연극학과 전공선택 수업인 <명작읽기>다. 신화, 역사, 사회과학,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명작들을 읽고 발제와 토론을 통해 작가가 지녀야 할 인문주의적 정신을 기르고자 개설된 수업이다. <명작읽기> 수업에서는 기말 과제로 주제부터 독특한 ‘노벨문학상 수상소감 쓰기’를 제시한다. 강의계획서에 따르면 이 과제에서 중요한 것은 ‘글쓰기란 무엇인가’, 내지는 ‘글쓰기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해당 주제문에 대한 자신만의 의견을 작가의 작업 및 작품을 매개체로 하여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신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2023년 1학기 수업의 경우 함께 읽은 고전 명작들과 더불어 수업 도중 토론한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한 관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에세이에 ‘Thanks to’는 금지. 단순히 ‘감사하다’는 인사만으로 소감을 끝낸다거나 고마운 이름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놀라운 상을 받은 이후 정신없는 와중에도 어떤 연유에서 자신이 이러한 글을 쓰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떠한 글을 쓸 것인지, 창작과 작품에 대한 소견을 뚜렷하게 밝혀야 한다. 해당 수업을 수강 중인 학생은 추후 이 과제를 해내는 데에 있어 소설의 역할, 그리고 창작자로서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이들 간의 교집합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에 중점을 두려 한다고 전했다. 여기에 그가 해준 말을 그대로 옮겨 담는다.

“처음 이 과제를 받았을 때는 자연스럽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제 모습을 떠올려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소감을 말해야 한다면 멋진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솔직해지기 어려울 것 같았어요. 그래도 상을 받으면 좋겠다는 즐거운 망상도 함께 해 봤습니다.”

음악의 시각화

세상 모든 음악이 살아 숨쉬는 음악원 음악학과. ‘음악학’이라는 이름 아래 세분화되는 여러 분야의 과목 중 음악의 주재료인 ‘소리’가 사람에게 전달되는 다양한 경로에 대해 다루는 2학년 전공필수 <음악과 매체> 수업이 있다. 종강 직전까지 기말고사에 반영되는 여러 발표 과제가 주어지는데, 그렇게 제시되는 과제 중 하나로는 우리가 이제껏 당연시 받아들여왔던 ‘오선보 기보’에 대한 색다른 시선 전환이 요구되기도 한다.

이 과제에서는 10초 이상의 짧은 음악을 자유롭게 선택한 후,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시각화해오는 것이 주요 퀘스트이다. 한글이나 영어 등의 문자는 사용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오선보나 음표가 포함되는 것은 가능하고, ‘시각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보니 그림이나 영상을 이용하는 접근 방식도 열려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비주얼에만 집중할 수는 없다. 음자리표가 시작하는 음정이 G냐(), F냐()에 따라 같은 오선상에 위치하고 있더라도 계이름이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는 오선보를 읽을 때 공통된 규칙에 기초하여 읽는다. 학생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기보 방식도 이런 해석이 가능해야 하고 논리적인 설명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물론 음악 기록의 매체를 오선보로 국한시키지 않다 보니 자유로움도 있다. 오선 위에 올릴 수 없는 미세한 음까지 표현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음악학과 학생은 이 과제가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오선보가 음악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는지, 오선보를 벗어나는 사고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과제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논리적이고 깔끔하게 정형화된 오선보가 경이로워지다가도, ‘오선’이라는 방식의 한계점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상하 대칭의 중심축에 오는 음을 ‘C(도)’로 읽게 되는 ‘가온음자리표()’는 음자리표가 그려지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음역을 설정할 수 있다. (예시: 비올라의 알토 보표(Alto clef), 트롬본, 바순, 첼로에서 찾을 수 있는 테너 보표(Tenor clef)) 이 음자리표는 음표를 표시하기 위해 덧줄을 여러 개 그려야만 하는 불편함을 어느 정도 해소해 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양한 악보에서 수많은 덧줄을 발견하게 된다. 한두 개 있을 때는 문제가 아니지만 대여섯 개 이상 찍히면 아무리 전공생들이더라도 밑에서부터 세어봐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쯤 되면 ‘오선’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학생들은 과제에 원이나 직선, 곡선을 사용하고 크기와 색깔, 위치를 조정하며 새로운 기보 체계를 만들기도 하고, 기존의 오선보에 자신만의 사인을 추가해 넣거나 특정 곡의 전자음에 집중해 미디 프로그램처럼 음향을 구체적으로 표기하는 등 다채로운 방식들을 사용한다. 발표 후 그들은 차례대로 소감과 오선보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고 한다. 음악을 ‘시각화’하는 것과 ‘연주 가능한’ 악보가 되는 것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균형, 모든 음악을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없는 오선보의 한계까지. 인상적이었던 말은 그럼에도 오선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기보 체계로 약속되는 것 자체가 어렵기에 오선보가 갖게 되는 권위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인데, 왠지 시원섭섭한 결론이다.



언제 겨울이었냐는 듯 무더워지는 한반도 한복판의 여름처럼, 끝이 보이지 않던 일거리들도 종강에 발맞춰 얼추 마무리된다.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유난스러운 과제나 몸과 마음 양면의 체력 소모가 상당한 시험을 완수하며 힘들고 지치는 순간에 부닥치더라도, 한예종 곳곳의 학생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무언가 의미를 담은 일들을 해나가고 있다. 이 동력은 예술을 매개로 찾고자 했던 사소한 재미부터 원대한 꿈까지 삶의 모든 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을 것이다. 결론의 마침표를 찍고 끝세로줄을 긋고 악보의 마지막 음을 연주할 때까지, 종강을 알리는 마지막 메일의 전송 버튼을 누르고 체크리스트의 가장 아래쪽 할 일을 지워낼 때까지. 정답이 없는 우리의 모든 작업에서 존재 여부조차 모호한 쾌락을 쫓아 달려가는 일은 계속된다.

Thanks to
특별한 기말 과제를 제보해 준 학생들과 반복되는 질문에도 친절하게 답해준 학생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참고
한국예술종합학교 공식홈페이지 음악원, 연극원, 미술원 교과과정
음악원 <음악학(음악과 매체)>, <18세기 대위법>, 연극원 <명작읽기>, 미술원 <기초스튜디오> 강의계획서